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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기다림, 시간을 이탈하는 힘

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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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고명재 시인이 매달 마음 깊이 사랑하는 시를 전합니다.
시인의 사려 깊은 시선을 통해, 환한 사랑의 세계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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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세상에는 사랑에 관한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나는 『사랑의 단상』에서 바르트가 말한 이 문장을 가장 좋아한다. 그리고 그는 ‘기다림’이라는 챕터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음의 이야기를 인용하는데, 나는 이 이야기가 참 아득하고 사랑스럽다. 


중국의 선비가 기녀를 사랑하였다.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아홉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가만히 이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사랑의 본질’을 자꾸 생각하게 된다. 왜 이야기 속 선비는 99일을 채우고 떠나갔을까. 마지막 날 심하게 흔들린 걸까. 너무 오래 기다리다가 실망한 건가. 99일이 그를 지치게 한 걸까. 그런데 왜 하필 80일도 92일도 아닌, 아흔아홉 번째 되던 날 밤 그는 떠난 것일까. (왜 모든 이야기는 항상 이렇게 미완을 통해, 매혹적인 지속을 만들어 내는지!)

나는 이 이야기가 ‘사랑 주체’의 시간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 속에서 선비는 사랑하는 사람, 즉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보통 직선적인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이때 시간은 ‘나의 주도권’ 아래에 있다. 나의 안위를 위해 나의 시간을 사용하고 그것을 대가로 임금을 지불받고 재산을 축적하는 것. 여기에는 계획과 실행과 완성이 있다. 즉 사회의 일부가 되어 ‘기능 주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다. 그러나 ‘사랑 주체’는 이러한 시간을 이탈해 버린다. 그는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을 무시해 버린다. 그는 자신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지 않는다. 사랑의 주체는 타인의 시간을 산다.

이 이야기 속에서 기녀는 자신을 마치 물건이나 재화처럼 다룬다. 그녀는 특정한 시간을 지정하고 이를 완수하면 ‘소유권’을 주겠다는 ‘거래’를 제안한다. 선비는 이러한 ‘거래’를 부수고자 한다. 왜냐하면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녀를 (마치 물건처럼) 소유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진실로 사랑하는 이는 사랑으로 인해 소유권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기다림을 보여주기만 한다. 진심으로 사랑을 해내는 수행성 자체. 그것이 바로 기다림이니까. 그리고 그는 사랑하는 이를 자유로움의 영역에 두고 조용히 물러난다. 그의 사랑법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당신을 가지거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기다리는(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상한 전화가 왔다.

“기다려. 지금 갈게.”

(중략)

식민지가 된 것처럼 나는 조용했다.

여분의 손에 수화기를 맡기고

두 손을 포함하여 나는

원래부터 그래야 했던 것 같았다.

-  신해욱, 「벨」 중에서 (『생물성』)


긴요하고도 절박한 수행성의 말. “기다려. 지금 갈게.” 단 두 문장이 화자의 일상에 구멍을 뚫고 시간의 질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예전에는 이런 신기한 침입(?)이 종종 있었다. 전화번호를 확인할 수도 없는 채로 낯선 이의 방문을 받기도 했다. 초인종도 그때는 그런 식이었다. 식별 불가능한 누군가가 오직 목소리 하나로 내 앞에 출현했을 때, 그렇게 “벨”이 울리고 존재는 흔들린다. 우리는 ‘자신의 시간’을 잊어버린다. 누구지? 하는 순간 우리는 ‘과거-현재-미래’의 주도권을 잃고 오직 낯선 이를 향하여 기울어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타인을 향한 기울어짐(傾向性)이 우리의 능력이다. 오직 당신을 향한 기울임만이 나를 지배하는 것. 그래서 이 시의 “식민지가 된 것처럼 나는 조용했다.”라는 문장은 참 눈부시다.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나에게 진심을 뱉을 때, 이 말 앞에서 우리는 주권을 잃어버린다(식민지처럼). 이런 것을 ‘아름다운 식민지’라고 말해볼까. 아주 모순적이지만 그런 순간이 우리에게 있다고. 


용수는 내 친구, 어릴 적에 자주 놀았다

골목에 온종일 나와 있었다


주말 아침에도 용수가 있었고

저녁의 귀갓길에도 용수가 있었다


용수를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잠자리도 잡고 돌도 던졌다


여우비 맞으며 술래잡기하던 날,

나는 용수가 나를 찾지 못했으면 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후로 용수를 다시 볼 수 없었고

지금도 맑은 날에 비가 내리면 그때가 떠오른다


누가 내게 첫사랑에 대해 물으면

나는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 황인찬,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여기서 기다리는 쪽은 어느 쪽인가. 처음 이 시를 읽어나갈 땐 용수를 생각했다. 용수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갑자기 사라진 친구를 얼마나 늦게까지 찾았을까. 그런데 이 시의 끝에 다다랐을 땐 정작 기다리고 찾던 사람은 용수가 아니라, 사랑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쪽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를 찾지 못했으면 해서” 숨어버린 쪽이 훨씬 더 사랑에 갈급했음을. 그러니 우리는 “누가 내게 첫사랑에 대해 물으면/나는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문장 앞에 멈춰 서게 된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걸, 깨닫고 승인할 수 있게 되는 때가 있다. 결국 숨은 쪽은 나였지만, 평생에 걸쳐 기다린 쪽도 나였다는 것. 그러니 이 시는 어쩌면 시인이 아니라, 기나긴 시간이 써낸 시인지도 모른다.

덧붙여 이 시의 제목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물음은, 양쪽 모두에게 가능한 질문이다. 나를 찾던 용수가 없어진 나를 찾아서 종일 했던 물음일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뒤늦게 모든 걸 깨닫고 그 사람의 본적을 찾고자 하는 나의 입술. 어쩌면 며칠 뒤 어린 나는 이 질문을 수도 없이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여기, 단 하루의 간절함과 평생에 걸친 간절함이 있다. 사랑은 이렇게 내 집이 아닌, 당신의 집과 방향을 자꾸만 생각하게 하는 힘. 우리는 그렇게 타인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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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저 | 김희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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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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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명재(시인)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과 첫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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