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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 소설을 쓰는 마음

문지혁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 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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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힌 이야기와, 적히지 못한 이야기를 오래오래 들려주세요. 소설을 쓰는 마음이란, 결국 소설에만 담을 수 있는 것일 테니까요.


어느새 헤어질 시간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은 어느새 다 녹아 없어진 지 오랩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처럼, 입을 대봐도 커피 맛은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당신과 나는 이제 조금 지쳤습니다. 소설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눈 탓일까요. 내향적인 사람들은 밖에 나와 일정한 시간을 보내면 집을 간절히 그리워하기 마련입니다. 당신과 나는 서로 무언의 눈짓을 주고받습니다. 그래요, 이제 헤어질 시간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쓰실 건가요?”

당신이 묻습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기 때문에 당황한 저는 얼음 맛만 남은 유리잔을 집어 듭니다. 잔 밖에 맺혀 있던 물방울들이 게으른 비처럼 하나, 둘, 바지 위로 떨어집니다. 차갑습니다.

“……소설 말이에요.”

제가 잘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당신이 덧붙입니다. 아니요, 저는 잘 들었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게, 앞으로도, 소설을, 계속 쓸 거냐고 묻고 있습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21세기에 소설가란 무엇일까요. 소설가가 되고, 소설가로 살고, 다시 그 소설가가 소설을 쓴다는 일은. 소설을 쓰는 마음이란 것은.

저는 대답하지 않고 일어납니다. 당신도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는 듯 같이 일어섭니다. 트레이를 반납하고 짐을 챙깁니다. 물방울이 묻은 손으로 놋쇠 손잡이를 당깁니다. 우리는 카페가 있던 골목길을 빠져나와 지하철역을 향해 함께 걷습니다. 어떻게 가세요? 묻자 당신은 버스를 타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래요. 반가웠습니다. 나는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당신이 뒤돌아 걸어갈 때까지 손을 흔듭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지하철역을 향해 걷다가, 몇 년 전 아이가 말을 배우던 시절 했던 말을 떠올립니다.

그즈음 아이가 즐겨 보던 책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직업들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경찰관, 의사, 가수, 엔지니어, 변호사, 요리사, 운동선수, 교사…… 그중 작가가 끼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까지 한글을 온전히 읽지 못하던 아이는 손가락으로 직업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때론 부정확한 발음으로, 때론 비슷한 소리로 읽어냈습니다.

“겨차간. 우사. 까수. 앤지어……”

하나씩 직업들의 이름을 부르던 아이는 마침내 작가 위에 손가락을 멈췄습니다.

“가짜.”

“뭐라고?” 

제가 다시 묻자 아이는 저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아빠는 가짜야.”

아이가 글자의 앞뒤를 바꿔 읽는 것은 그리 드물지 않은 일입니다. 다만 그 사건이 저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이유는 아이의 목소리가, 그 느닷없는 호명이, 어떤 평가이자 경고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가짜를 진짜처럼 말하는 사람입니다. 가짜 속에서 진짜를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가짜가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허구적 진실이 아니라 허구 그 자체만을 전하는 공허한 그림자로 남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몸을 돌립니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전히 쓰고 싶은 이유. 써야 하는 이유.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당신은 저만치 멀어져 있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잡을 용기가 저에게는 없습니다. 진심이란 언제나 문틈에 끼어 있기 마련이지요.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편안하고 안정된 공간에서 우리는 대개 진심을 전하지 못합니다. 쓸데없는 이야기, 안전한 이야기,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야기만을 나누지요. 그러다 헤어질 때, 문이 닫힐 때, 집 앞에서, 버스에 오르거나 차에서 내릴 때 우리는 그 짧은 순간에만 우리의 진짜 속내를 말합니다. 마지막 순간이 될 것을 직감할 때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꺼냅니다. 

저는 계속 쓸 겁니다. 소설을 쓸 거예요. 

언제까지나, 소설을 쓰고 앉아 있는 사람으로 남을 거라고요.

여섯 살 때부터 저는 작가였고, 작가가 되고 싶어 살았고, 이제 겨우 작가로 산 지 십여 년인데, 아직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이 남았는데……

하지만 그 순간 아주 조그마한 막대기로 작아진 당신은 푸른색 버스에 오릅니다. 버스는 언젠가 제 아이가 좋아했던 캐릭터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웃는 얼굴이 점점 다가오는 것이 두려워 저는 서둘러 지하철이 기다리는 역 안으로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당신을 불러 세웠어야 한다는 후회, 대답하지 못한 찝찝함, 말하고 싶었던 미련들이 지하철 안내방송과 함께 스크린도어 너머 어두운 공간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헤어진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당신이 벌써 그리워집니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러기를 바랍니다. 다음에는 당신이 쓴 소설을 보여주세요. 거기 적힌 이야기와, 적히지 못한 이야기를 오래오래 들려주세요. 소설을 쓰는 마음이란, 결국 소설에만 담을 수 있는 것일 테니까요. 저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얼굴도 모르는, 아니 실은 만난 적도 없는 당신의 소설을 마음 다해 기대하고 기다리겠습니다.

따뜻한 커피가 어울리는 새로운 계절에,

우리 다시 만납시다.


* <문지혁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는 내년 상반기, 책으로 출간됩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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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문지혁

2010년 단편소설 「체이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중급 한국어』 『초급 한국어』 『비블리온』 『P의 도시』 『체이서』, 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사자와의 이틀 밤』 등을 썼고 『라이팅 픽션』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등을 번역했다. 대학에서 글쓰기와 소설 창작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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