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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훤의 한 발 느린 집사람] 조촐한 생일 파티

<월간 채널예스> 2023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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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표정은 미묘하고 손에 잘 잡히지 않아, 어떤 식으로도 옮겨오는 데 실패한다. 그런 마음의 목록을 만들어가던 중 요즘 자주 찾아오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다. (2023.07.07)


집사람은 집에 있다. 시를 쓰게 된 건 어쩌면, 내가 시 쓰는 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집에 있기 때문일 거다.

집을 나서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폭우보다는 날씨가 좋아야 하고, 온도가 너무 낮지 않아야 하고, 감기 기운이 없어야 한다. 급한 마감은 다 마쳤어야 한다. 꼭 친구와 가지 않아도 되지만 혼자 배회하고 싶은 기분이어야 한다. 그러다 친구를 만날 수도 있겠다. 예약된 촬영이 없으면 좋겠다. 그렇게 집을 나서고 나면 좋은 것들을 알아보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도 집사람들이다. 나서기까지가 힘들 뿐.

집 바깥 세상이 나를 모르게 될까 봐. 집에만 있으면 잊힐까  봐 나를 채근했던 적도 있다. 그러다 너는 고립될 거야. 지금 널 찾아주는 친구들과 조금씩 소원해지다 결국 널 떠날 걸. 그런 목소리 때문에 원하지 않는 만남에 동석하거나 애매한 지인의 파티에 가서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데 자꾸 집에서 이 시간에 내가 뭘 할 수 있었을지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만 갔다. 꼭 가고 싶은 자리만 가기로 했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집사람이었던 나는 지난 몇 년 간 여러 사람이었고 여러 나라였다. 나는 여러 명의 동물이었다. 

지난 10월에는 산업 잠수사였다가 여행 가이드였다가 신랑이었다가 고등학생이었다. 올해는 몇 번이나 고양이였고 해마였다. 강원도 영월에서 나고 자란 지 백 년 넘은 나무였다.

시를 쓰면 모두가 될 수 있다. 어디든 갈 수 있다. 모든 있었던 사건과 없었던 소문이 될 수 있다.

어떤 표정은 미묘하고 손에 잘 잡히지 않아, 어떤 식으로도 옮겨오는 데 실패한다. 그런 마음의 목록을 만들어가던 중 요즘 자주 찾아오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다.

깊이 — 내가 누군지 잠시 잊을 만큼 깊이 — 영화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 찾아오는 엄청난 충만함. 삶으로 돌아왔을 때의 낙차. 오래 기다렸던 목표를 성취한 후 찾아오는 뾰족한 기쁨과 슬픔. 그 사이 너무 많은 감정들. 북 토크를 성황리에 잘 마치고 돌아온 밤의 조금 다른 침묵. 이런 마음에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나는 이 모든 마음이 성대한 생일 파티로부터 느꼈던 것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생일은 정말이지 이상하다. 시끌벅적했는데 귀갓길은 쓸쓸하고 고작 둘이서 축하했는데, 더 바라는 게 없기도 했다.  성대하다고 풍성하지 않았다. 조촐하다고 초라하지도 않았다.

축하를 조금 받은 생일에도 답장을 많이 한 생일에도 시를 쓰고 싶어졌던 건 왜였을까.

해서 작년부터 연작을 쓰기 시작했다. 여러 화자들의 생일을, 혼돈을, 축하의 전후와 무심하게 드러나는 우리의 속내를 시에 데려왔다. 설명이 잘 되지 않는 표정과 비밀의 뉘앙스를, 비슷하게 생긴 와인병에 담듯 이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다. 시리즈의 이름은 '조촐한 생일 파티'다.

그중 한 편을 당신께 보내며 이 서신을 맺는다. 부디 집에 있을 때 읽어주시길. 몇 발 느려도 좋으니, 이 파티에 동참해주시길.




조촐한 생일파티 11

밤 산책을 다녀왔다


처음 가본 아파트 단지에 누가 두고 간 축구공


슬리퍼 신은 아내와 나와 장모가 바람 빠진 그 공을 설렁설렁 주고 받고


축구에 서툰 장모는 공을 밟고

넘어질 뻔했다 두 팔 뻗고 세리머니 하듯


산책에서 돌아와 

집에 있는 불을 다 끄고 영화를 봤는데 거기서 

마라도나가 골을 넣었다 

헤딩을 하려 했다가

손으로 툭

공이 들어간 걸 확인한 마라도나는 두 팔로 원을 그리며 뛰었다

누군가는 그걸 신의 손이라고


마라도나를 지켜보던 영화 속 청년은

영화가 만들고 싶다


로마로 가지 말고 

나폴리에서 영화를 만들자던 유명 감독을 만나고서야

로마로 향하는 청년

그는 나폴리로 돌아와 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

그런 손을 뭐라고 부를까


영화에서

조용히 환희하는 표정과 너무 슬퍼 검붉어지는 얼굴이

순차를 기억 못 하는 불꽃놀이처럼 뒤섞인다

팡 팡


피곤했던 장모가 코를 골며 잠들고

팡 팡


아내는 오늘 끝내주는 인생

이라는 책의 원고를 전부 보냈다


끝났다!  

책 만드느라 다 지나간 이 봄이야말로 얼마나 영화적인지 

아내와 나는 영화가 끝나고 생각한다


사진을 공부하고 싶다는 학생이 얼마 전 다녀갔다

그가 쓴 보고서를 읽는다

카메라로 하고 싶은 일과 그걸 하기 위해 갈 도시에 대해 소상히 썼다


이 영화를 걔가 보았으면 좋겠다


보고서 시작과 끝에서

로마로 간 청년의 세리머니가 

밤 파도처럼 허리를 펼쳤다 접었다 침묵 

허리를 펼쳤다 접었다 침묵


종일 생일파티를 한 사람처럼 나는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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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훤(시인, 사진가)

시인, 사진가. 시집 『너는 내가 버리지 못한 유일한 문장이다』, 『우리 너무 절박해지지 말아요』, 『양눈잡이』를 썼다. 사진 산문집 『당신의 정면과 나의 정면이 반대로 움직일 때』를 쓰고 찍었으며, 산문집 『사람의 질감』을 집필 중(2023년 출간 예정)이다. 미국 시카고예술대학에서 사진학 석사를 마쳤고 2019년 큐레이터 메리 스탠리가 선정한 '주목해야 할 젊은 사진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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