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에세이스트의 하루] 허수경 시를 읽는 하루 – 생강

에세이스트의 하루 21편 – 생강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시인 허수경의 이 세상 마지막 길 배웅을, 먼 진주도 아니고 더 먼 독일의 뮌스터도 아니고, 서울 북한산에서 할 수 있다니 가야만 했다. (2021.10.12)


예스24가 진행하는 글쓰기 공모전 ‘나도, 에세이스트’ 대상 수상자들이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에세이스트의 일상에서 발견한 빛나는 문장을 따라가 보세요.

언스플래쉬 

‘2021년 10월 3일, 오늘은 허수경 시인의 3주기입니다’라는 김민정 시인의 트위터 글을 보았다. 허수경 시인의 49재에 다녀왔던 3년 전 하루가 떠올랐다. 벌써 3년이 되었구나. 그때도 트위터 글을 보고 북한산 중흥사에서 열리는 49재에 다녀오기로 마음먹은 터였다. 생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웬 49재?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해 10월에 동네 뒷산에서 넘어져 팔을 깁스한 상태였기 때문에 산행을 하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다. 팔 다치고 첫 산행인데 모르는 사람들에게 폐 끼치게 되지 않을까. 가보지 않은 산길인데 험하면 온전치 않은 오른팔로 몸의 균형을 잘 맞출 수 있을까. 여러모로 주저했지만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시인 허수경의 이 세상 마지막 길 배웅을, 먼 진주도 아니고 더 먼 독일의 뮌스터도 아니고, 서울 북한산에서 할 수 있다니 가야만 했다. 그의 시구에 기대어, 한 세상 빚지며 살아왔다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기억하겠다고. 시인 하늘로 떠나는 날, 날씨는 어찌 그리 화창한지, 11월 중순의 메마른 산길에서 바라본 하늘은 시인 자리를 벌써 잘 준비해 놓았다는 듯 시리도록 맑고 푸르렀다. ‘떠나기 좋은 날씨다’『혼자 가는 먼 집』을 예비한 시인을 맞이하는 하늘이라 생각했다. 2년 전 봄, 오랜만에 친구들과 경남 지방 여행 중에도 굳이 진주에 들렀다. 허수경 시인의 고향이라 가보고 싶었다. 진주 남강을 지나기도 하고, 촉석루에도 앉아보고, 진주비빔밥도 먹으며 ‘진주 저물녘’에 시인이 그리워했을 공간이라 생각했다. 

 그의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를 다시 꺼내 본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므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하고 시인의 ‘책 뒤에’ 말이 적혀있다. 1988년 11월 30일 펴냄. 시인이 새롭게 편집해 펴낸 산문집,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의 표지를 들추니 “2018년 허수경입니다”라고 쓰여있다. 첫 시집 이후, 동년배 여성 시인인 것도 좋았고 무엇보다 그의 시가 좋았고 나중에는 독일에서 내가 배우고 싶던 고고학 공부를 하는 것도 좋았다. 그 30여 년 동안 시인이 먼 이국에서 시와 고고학으로 그의 언어를 찾는 동안, 나는 직장생활과 아이 키우며 살림하며 때로는 한 해에 책 한 권 읽지 못하는 바쁜 일상을 이어왔다. 그래도 어느 날, 그의 시집이 새로 나왔다는 걸 알게 되면 읽지 못해도 샀다. 시 한 편 읽을 여유가 없어도 내가 좋아하던 시인이 그 먼 곳에서 모국어를 벼려 또 한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생각이 들면 뭉클했다. 좋아하는 시인이 있는 게 좋았다.

그의 시 「탈상」을 다시 읽어본다. 어린 모를 흔드는 잔잔한 바람이 불고, 떠난 사람 자리는 썩어나고 슬픔을 거름 삼아 고추는 익어가고, 우리는 처연하게 삶을 이어간다. 33년 전 어떤 마음 상태에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구에 매혹되었는지는 잊었다. 다만 시집의 한 시의 제목도 아닌 한 구절이 시집 제목으로 쓰일 정도였으면 당시에도 많은 사람에게 가닿는 구절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벅찬 일상을 이어가며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사는 게 그렇게 고통스럽진 않았다. 고통을 대면하지도 극복하지도 못했다. 다만 사는 게 좀 슬펐다. 어쩌니저쩌니해도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득달같이 달려드는 일상을 이어가는 일이 매번 고달프고 슬펐다. 그저 슬픔이 차곡차곡 쌓이면 시를 읽고 노래를 듣고 그림을 보고 책을 읽으며 들과 산을 걸으며 살아냈다. 그러면 슬픔이 좀 가시고 딱 한 주일분의 살아갈 힘이 생겼다. 그렇게 슬픔을 거름 삼아, 그 시구에 기대어 힘을 내고 세상을 건너왔다.

시인이 그 마음을 적확하게 알아준 것 같아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의 첫 시집에 오래 빚졌다. 이제 그의 시를 오래 읽으며 그를 기억할 일만 남았다. 누군가 이 세상을 떠나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한 그는 죽은 게 아니다. 허수경 시인의 3주기, 그의 시를 읽으며 하루를 보낸다. 




*생강

지구에 쓰레기를 덜 남기기를 고민하며 매일 배운다.



혼자 가는 먼 집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저
문학과지성사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허수경 저
실천문학사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허수경 저
난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생강(나도, 에세이스트)

지구에 쓰레기를 덜 남기기를 고민하며 매일 배운다.

ebook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허수경> 저11,200원(0% + 5%)

“그리움은 네가 나보다 내 안에 더 많아질 때 진정 아름다워진다. 이 책은 그 아름다움을 닮으려 한 기록이다.” 2018년 8월 허수경 시인의 산문집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를 펴냅니다. 이 책은 2003년 2월에 나온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의 개정판이기도 합니다. 제목을 바꾸고 글의 넣음새..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수학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는 엄마표 유아수학 공부

국내 최대 유아수학 커뮤니티 '달콤수학 프로젝트'를 이끄는 꿀쌤의 첫 책! '보고 만지는 경험'과 '엄마의 발문'을 통해 체계적인 유아수학 로드맵을 제시한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수학 활동을 따라하다보면 어느새 우리 아이도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랄 것이다.

나를 바꾸는 사소함의 힘

멈추면 뒤처질 것 같고 열심히 살아도 제자리인 시대. 불안과 번아웃이 일상인 이들에게 사소한 습관으로 회복하는 21가지 방법을 담았다. 100미터 구간을 2-3분 이내로 걷는 마이크로 산책부터 하루 한 장 필사, 독서 등 간단한 습관으로 조금씩 변화하는 내 모습을 느끼시길.

지금이 바로, 경제 교육 골든타임

80만 독자들이 선택한 『돈의 속성』이 어린이들을 위한 경제 금융 동화로 돌아왔다. 돈의 기본적인 ‘쓰임’과 ‘역할’부터 책상 서랍 정리하기, 용돈 기입장 쓰기까지, 어린이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로 자연스럽게 올바른 경제관념을 키울 수 있다.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야

저마다 삶의 궤적이 조금씩 다르지만 인간은 비슷한 생애 주기를 거친다. 미숙한 유아동기와 질풍노동의 청년기를 거쳐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하고 늙어간다. 이를 관장하는 건 호르몬. 이 책은 시기별 중요한 호르몬을 설명하고 비만과 우울, 노화에 맞서는 법도 함께 공개한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