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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에세이스트] 6월 대상 - 아홉 달 그리고 하루짜리 헛수고

지금도 잊히지 않는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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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10월 28일, 나와 남편은 맥도날드에서 맥모닝 세트를 하나만 시켜서 나누어 먹기로 했다. 1인분을 다 먹기에는 왠지 부끄러운 아침이었다. (2021.06.02)

언스플래쉬

“우리 회식은 해야겠지?(시험이 끝났잖아.)”

“그래도 맥모닝 이상은 먹지 말자.(우린 그 시험을 보지도 않았잖아.)”

3년 전 10월 28일, 나와 남편은 맥도날드에서 맥모닝 세트를 하나만 시켜서 나누어 먹기로 했다. 1인분을 다 먹기에는 왠지 부끄러운 아침이었다.

그해 1월 나는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달력에는 시험날 동그라미를 치고, 속으로는 ‘어머니 제사 다음 날’이라 외웠다. 수험생 생활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주변에 알렸다.

“너 공인중개사 안 어울려.” 친구가 말했다. ‘붙고 말 거야.’

“공부하느라 힘들겠네.” 부모님이 말씀하셨다. ‘한 번에 붙어야지요.’

“그 시험 어렵다던데요?” 이웃이 말했다. ‘붙을 건데요?’

“교재비 아까운데 나도 같이 시험 볼게.” 남편이 말했다. ‘같이 하면 덜 외롭겠네.’

인터넷 강의에 수십만 원을 결제했고, 쌓으면 높이가 내 무릎까지 오는 분량의 교재도 샀다. 동네 도서관으로 매일 출근을 했다. 창밖으로 계절이 지나는 걸 보면 처량했고, 들러붙는 엉덩이 살을 보면 우울했다. 그럴 때면 시험이 12월 아닌 10월인 것을 위안 삼았다. 시험이 닥치자 벼락치기 전용 아드레날린이 온몸에 가득해서, 기출문제집을 파도처럼 넘기고 형관펜을 색색이 내리꽂았다.

어머니 제삿날이 되었다. 시험장소는 시가가 있는 부산으로 신청해 두었고, mp3 강의 파일과 요약 노트를 챙겨 내려갔다. 부엌에 들어서서 형님과 시고모들께 양해를 구했다. “내일 공인중개사 시험을 봐서요.” 대형 전기 후라이팬 옆에 노트를 놓고, 이어폰을 꽂았다. 족집게 특강이 흘러나왔다. 이어폰이 부엌 어른들께는 ‘있어도 없는 며느리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겠지. 누리끼리한 전을 부치다 고개를 돌리면 곧게 뻗은 형광 밑줄들이 느끼함을 덜어 주었다.

시험날, 남편과 나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암기한 내용을 주고받았다. 내가 어려운 민법 용어에 장단을 넣어 물으면, “통정허위표시에서(읏따다쿵-딱!), 이해관계제3자는(쿵따다쿵-딱?)?” 남편이 첫 자를 따서 대답했다. “가-장채권 가-압류! 쩌-당권 취-이득! 보-증서고 보-증인!” 한 소절씩 나누어 부르는 아이돌처럼. 팀웍은 컴퓨터 싸인펜을 살 때도 쓰였다. 남편은 편의점 앞 골목길에 비상 깜빡이를 켜고 주차했고, 나는 달려가서 싸인펜 두 자루를 사 왔다. “나 빨랐어?” “응! 괜찮았어.” 같이 공부하기를 참 잘했다.

시험장에 들어섰다. 초록 조끼를 입은 조기축구회 회원이 운동장에 하얀 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여보, 너무하지 않아? 아무리 공인중개사가 흔해도 그렇지, 축구 하는 옆에서 시험을 보라는 거야?” 학교 건물로 향했다. 문이 닫혀있다. 안내문도 없고 다른 수험생들도 오지 않는다. 이상했다. 남편이 수험표를 꺼내 들었다. “오늘 며칠이지?” “28일.”

남편의 손가락이 가리킨 날짜는 10월 27일. 어제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숫자를 잘 못 봤나? 7과 8은 얼핏 봐도 다른데. 그럼, 동그라미를 한 칸 밀렸나? 토요일과 일요일은 다른 줄인데. 그럼 혹시, 어머니 제삿날? 어머니 제사는 양가 부모 중 처음이라 남편도 나도 제삿날이 사신 날밤인지 돌아가신 날 밤인지를 몰랐다. 우리는 형님과 통화하고 이 날에 동그라미를 쳤다가 아버지와 통화하고는 다음 날로 옮기곤 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시험 날짜마저 옮겨 기억할 건 뭐람. 둘 다 수험표조차 확인하지 않았으니 원망할 사람도 없었다.

피로와 허기가 몰려왔다. 아침에도 문을 연 밥집을 찾았다. 가까이 맥도날드 간판이 갈매기 눈썹을 하고 웃고 있었다. 우리는 1인분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남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쨌든 끝났잖아.”

“그렇지. 근데 억울하네.”

“시험 못 본 게?”

“아니. 남들보다 공부 하루 더 한 게. 어젠 안 해도 됐었잖아.”

밤새 요약 노트를 배 위에 얹고 자느라 뱃가죽이 뻐근했다. 먹어야 풀릴 텐데. 우리는 연습만 하고 해체한 아이돌 그룹처럼 모닝세트 하나를 너 한 입, 나 한 입 조심히 베어 물었다. 아홉 달을, 그리고 남보다 하루 더 공부한 배우자 몫의 위로를 넘보지 않으려고.


김기혜 심심풀이 마음풀이 글쓰는 아줌마. 자다가 이불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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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기혜(나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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