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얼버무리지 않습니다
마감 열차 탑승기
쓸모를 시험하지 않으면서 쓸모 있고 싶은 마음. 읽고 쓰는 일은 그런 욕심의 합의점이다. (2019. 08. 02)
언제부터 글을 쓰게 된 걸까. 어쩌다 마감을 앞두고 컴퓨터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게 된 거지? 작가도 아닌 내가? 한 달 주기로 책을 추천하는 글과 두 달 주기로 내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글과 자발적으로 쓰는 글, 외부 청탁 글의 마감이 한 주에 겹쳐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아니다. (아마도….) 딱히 쓰고 싶은 이야기도, 분야도, 마음도 없이 어쨌든 쓰는 사람이 되어버린 오늘이 새삼 낯설고 신기하다.
언스플래시
글쓰기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가면 우선 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공부한 덕에 비평과 아주 가끔 소설 따위를 썼고, 고등학생 때에는 대학 입시를 위한 소논문과 자기소개서라는 실화 기반의 판타지를 써냈으며, 중학생 때에는 학교 대표로 백일장에 나가 ‘소금’과 같이 의도를 알 수 없는 주제에 맞추어 시를 썼고, 그 출발에는 선생님의 한 마디가 있었다. 학교 백일장이 열린 지 며칠 지난 수업 시간, 국어 선생님이 지나가듯 내뱉은 한 마디. “아참, 정연아. 너 글을 참 잘 쓰더라?”
한국에서 자란 대부분의 아이들은 칭찬에 약하다. 그러므로 우리 어른들이여 명심하자. 칭찬은 적재적소에 잘 해야 한다. 나는 아직도 내가 학교 다닐 적에는 중학교 교과목에 코딩이나 코딩이나 코딩 같은 수업이 없었다는 점이 아쉽다. 성향과 맞아 잘했을 것 같은데.... 그때 코딩 잘한다고 칭찬 받았더라면 ‘문송(기업에서 이과의 채용을 늘리면서 문과의 취업이 어려워지자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의미로 만든 신조어. 출처: 네이버 사전)’한 시기를 거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뭐, 그렇다고 선생님의 한 마디에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실존주의 소설과 시드니 셀던의 섹슈얼 호러 미스터리 따위를 즐겨 읽던 아이는 일찍이 쓰기를 포기했었다. 좋아했으니까. 계속 좋아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잘 쓰고 싶다는 욕심 없이 그저 글이 더 좋아졌다. 따라잡고 싶다는 마음은 나만 괴롭게 한다는 사실을 배운 후였다.
아직도 글에 대한 기본적인 자의식은 ‘읽는 사람’이다. 취업하면서 ‘파는 사람’도 추가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를 쓰기 시작한 것도 제안 덕분이었고, 쓰겠다는 답변에는 자기 PR 시대에 나를 노출할 채널이 하나 생긴다는 계산이 작용했다. 문제는 마감이었다. 무엇이든 써내야 하니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모르는 채로 빈 문서 파일을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일단 쓰기 시작하니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쓸 거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스치는 생각을 메모하고, 기분 좋거나 나빴던 대화를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다. 순간 순간이 어떤 의미인지 잠시 멈추어 생각할 ‘일시중지’와 ‘되감기’ 버튼이 생긴 느낌이다.
털어내면 돌아오고, 또 털어내면 또 돌아오는 마감을 마주하면서는 쓸 거리를 고민하는 시간이 길수록 쓰기 어렵다는 점을 깨달았다. 일단 쓰고 나서 그 결과물이 별로라면 빨리 버리고 새로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임을 배웠다. 요즘엔 초현실주의인지 뭔지의 무의식적 글쓰기처럼 우선 되는 대로 써버리고 뒷마무리는 내일의 나에게 넘겨버린다. 어쩌면 내게 제일 필요한 삶의 방법론이 이거였는지도 몰라. “글은 마감이 쓴다”던 선배의 말을 내 맘대로 오해해버린다.
읽히기 위해 쓰는지 말하고 싶어서 쓰는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그리고 두 가지가 서로 다른 의도인지 같은 의도인지도 헷갈리지만), 아무도 안 읽을 것처럼 솔직하게 쓰면서도 다음 날 게시물 옆의 조회수나 댓글을 확인하는 걸 보면 둘 다인 듯하다. 그렇다고 댓글 0개에 상처 받거나 속상해 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순간이 중요하다. 글 쓸 때에는 일할 때와는 달리 내가 별다른 쓸모 없이도 괜찮은 존재처럼 느껴진다. 빈 문서 파일을 거울 삼아 내 속을 더듬어 보기 때문일까. 그런 용기는 좀처럼 솟지 않으니까. 아직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겠다. 한편, 글을 사고 팔 때에는 내 쓸모가 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종종 울적하다. 글 쓰는 순간의 최선과 기지에 비해 사고 파는 일은 너무 쉽고 또 어렵다.
송곳으로 조개 껍질마다 조그만 구멍을 뚫었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바람 때문에 창가에 걸어두었던 조개껍데기 풍경이 떨어져 있었다. 바닷가에 놀러갔다가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걸 보고 (더 정확히는 가격을 보고) 직접 만든 풍경이었다. 바닷가에서 주운 조개에 실로 잇기 위한 구멍을 뚫느라 엄청 낑낑댔는데. 조개 껍질끼리 부딪치며 내는 절걱거리는 소리가 참 좋았는데. 쉽게 깨져버렸다.
영화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은 매일 시를 쓴다. 그의 직업은 버스 기사이다. 매일 같은 코스를 운전하면서 매일 같은 수첩에 시를 쓴다. 딱히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용도는 아니다. 그냥 쓴다. 그리고 패터슨의 수첩이 사라지는 일도 한 순간이다. 사랑하는 반려견 마빈이 그의 수첩을 물어뜯은 순식간. 허망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패터슨에게 어느 일본인이 다가와 새 노트를 선물한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라는 말과 함께.
다시 처음 고민으로 돌아와서, 내가 스스로에게 마감을 쥐여 준 까닭을 생각한다. 아무래도 좋을 일상 없이 아무래도 좋은 인생을 살고 싶은 모순된 욕심.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지만 목적지는 없는 삶. 쓸모를 시험하지 않으면서 쓸모 있고 싶은 마음. 읽고 쓰는 일은 그런 욕심의 합의점이다. ‘엉엉’ 거리면서도 다시 마감 열차에 탑승하고 마는 이유는, 글이 남기 때문이 아니라 오롯이 나를 위해 모니터 앞에 앉는 순간 때문인가 보다. 나는 나를 허투루 마주하지 않았다. 얼버무리지 않는 하루는 아무래도 좋고 아무래도 소중해진다.
대체로 와식인간으로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