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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 유일무이함이 우리를 살게 하고 읽게 한다

첫시집을 출간한다는 것은 시인이 일평생 누리는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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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가장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내게 물으면 첫 시집을 다시 내는 거라고, 농담처럼 말한다.



격주 월요일, 시인 김소연이 읽은 책 이야기 
 ‘김소연의 내향적 삶을 옹호함’이 연재됩니다. 

 

 

 

 

시집 읽는 걸 처음 좋아하기 시작한 무렵에, 세상 모든 첫시집들을 수집이라도 하겠다는 듯 사모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그렇게 했다. 첫시집은 더 흥미로운 시집과 덜 흥미로운 시집으로만 분류될 뿐, 모두 소중했다. 첫시집에는 어쨌거나 처음 만나는 세계가 담겨 있었다. 그 시절의 그 마음으로 요즘 나는  첫시집들을 챙겨 읽는 재미에 산다. 누군가 가장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내게 물으면 첫시집을 다시 내는 거라고, 농담처럼 말한다.

 

처음 시에 사로잡혔던 시절에, 최승호의 『대설주의보』와 김영승의 『반성』과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과 송찬호의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와 김중식의 『황금빛 모서리』와 이상희의 『잘 가라, 내 청춘』, 황학주의 『사람』, 이진명의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김기택의 『태아의 잠』은 출간되자마자 서점에 달려가서 구입을 했다. 하나하나 챙겨 읽을 때마다 다시 태어나는 것만 같았다. 새로운 문체를 만나는 게 무엇보다 기뻤다. 문체는 비밀한 열쇠처럼 새로운 세계를 가뿐하게 열어보였다. 굳게 닫혀 있어 문장으로는 가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게 했다. 시인들은 한쪽 방향으로 조금씩 미쳐 있었다. 그럼으로써, 이 세계를 누구보다 용감하게 만나고 있었다. 그 용감함 때문에 기울기가 가파른 시인이, 그 미쳐있음이 미치도록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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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시집을 출간한다는 것은 시인이 일평생 누리는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이다. 일평생 누리는 저주 중에 가장 큰 저주이기도 하다. 크나큰 두 손이 시인의 탄생을 산모처럼 에워안고 받치고 있는 것만 같달까. 가문의 장손을 받아든 산파의 손처럼, 제단에 제물을 바치는 손처럼. 그만큼 거룩하고 애틋하다. 첫시집 이후, 다른 어떤 빛나는 순간도, 다른 어떤 방황의 순간도, 다른 어떤 절망의 순간도, 그만큼 거룩하거나 애틋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동혁과 박지혜는 사랑에 대하여 가장 잘 말하기 위하여 단련해온 시인 같았다. 성동혁의 『6』은 아픈 곳에 머문 천사의 기록 같았다. 천사의 몸무게가 그의 문체의 무게일 것만 같았다. 아픈 곳에 깃든 사랑을 그만큼 가뿐한 문체로 표현하려면, 시인은 천사에 가깝거나 천사와 친구를 맺은 자여야 한다. 천사의 희고 투명한 옷과 천사의 반투명한 검은 그림자 사이에서 성동혁의 문체가 야릇하게 존재한다. 박지혜의 『햇빛』은 사랑이 어떤 식으로 현현되는지를 세세하게 다루려는 지극함으로 가득하다. 부유하는 먼지 하나까지도 현기증이 일 정도로 지극하게 바라본다. 고통의 순간을 몽롱하게, 박탈의 순간을 나른하게, 비참한 순간을 아련하게, 외로운 순간을 눈부시게 포착한다. 그 포착은 느릿하고 태연해서 비현실과 닮아간다. 지극하고 골똑하게 바라본 자의 시선으로써 박지혜의 문체는 현실의 아득한 저편에 맺혀 있다.

 

유병록과 주원익의 첫시집은 찰나를 잡아채는 집중력이 닮았다. 유병록의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는 우리가 잘 안다고 믿었던 풍경의 내장에 손을 집어넣는다. 기어이 새로운 풍경으로 치환을 시킨다. 소독이 잘된 예민한 문체로써 그 깊은 내장까지 침투한다. 환부에 닿는 소독약처럼 싸하고 시원한 문체였다. 주원익의 『있음으로』는 의지와 사유가 번개처럼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게 하는 정전기의 문체로 가득하다. 사유의 세계가 초원처럼 펼가진 광야를, 자기부상열차의 차창으로 한 프레임 한 프레임 횡단하듯 읽었다.

 

김현과 기혁의 첫시집은 유희의 세계이다. 김현의 『글로리홀』은 유희로써 반골의 세계를 구축하고, 기혁의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는 유희로써 부조리의 세계를 구축한다. 김현과 기혁 모두, 구축할 수 없는 것을 구축한다. 오래 구축되어온 것들에 진저리를 내며, 부수기 위하여 의사 구축을 구축한다. 구축하지 않는 구축을 하기 위하여 쏟아붓는 열정이, 김현의 문체에는 무용수처럼 기혁의 문체에는 무술가처럼 배여 있다. 김현의 문체는 어딘지 고문하여, 구축의 동작들이 그림처럼 남는다. 기혁의 문체는 꽤나 씩씩하여, 구축의 동작이 휘저은 공기에 배인 땀냄새를 남긴다.   

 

올해에도 거룩한 축복과 저주를 한몸에 담은 또다른 첫시집들이 출간될 것이다. 지금 당장 기다리고 있는 시집은 송승언 시인의 첫시집이다. 그의 시들을 자주 꼼꼼하게 읽어온 나는, 그의 시세계를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첫시집들이 그랬듯이, 내 짐작들을 유유히 배신할 더 놀라운 시집이 태어날 것이다. 어떤 유일무이함이 그 시집에 깃들여 있을지, 시인 자신도 종잡을 수는 없다. 종잡을 수 없음만이 시인에겐 가장 온전한 축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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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연(시인)

시인. 트위터 @catjuice_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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