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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한 여자> 죄의식과 그 책임감을 품고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전쟁과 한 여자>, 이노우에 준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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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되어 그 자극적인 수위 때문에 논란이 되었던 일본 영화 <전쟁과 한 여자>는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패전국인 일본의 과거를 담아낸다. 영화의 중심에 과감한 성적인 표현과 지극히 개인적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기에, 조금만 흐트러져도 논란이 될 법하다. 그런데 이 영화 한국에서 8월 15일 광복절에 개봉했다. 그 자신감만큼이나, 영화는 공정할까 의심하면서 극장을 찾았다.


영화를 말하기 전, 역사적 죄의식과 죄책감에 대해서 먼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사전적 의미로 죄책감이란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이며, 죄의식은 ‘저지른 죄과나 잘못에 대하여 스스로 느끼고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죄에 대해 의식하는가와 죄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가에 대한 명백히 다른 뜻을 가지고 있지만, 선조들이 자행한 역사적인 악행에 대해 후대들이 죄책감 혹은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는 무척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불쑥, 현재의 뿌리를 뒤흔들어 놓는 휴화산 같은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잊을만하면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소유권 주장이나 한국과 중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의 모욕적인 발언도, 깨끗하게 청산되지 않은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현재의 망령이 되어 떠도는 것이다.

식민 지배와 광복이라는 한일간의 역사는 21세기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논할 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전쟁을 바라보는 일본 예술가의 시선 속에 전쟁 도발국으로서의 죄책감과 죄의식이 담겨있는지 아닌지는 무척이나 중요한 화두이다. 그들의 시선이 공정하지 않다면 왜곡된 역사의식을 후대들에게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이 역사적 죄의식을 공유하지 않고, 예술가가 가해자로서의 근원적 죄의식을 잃는 순간, 예술작품은 교묘하게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편향성을 숨길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로 위장될 수 있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만들 때, 예술가로서의 표현의 자유에 앞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않기 위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최근 개봉되어 그 자극적인 수위 때문에 논란이 되었던 일본 영화 <전쟁과 한 여자>는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패전국인 일본의 과거를 담아낸다. 영화의 중심에 과감한 성적인 표현과 지극히 개인적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기에, 조금만 흐트러져도 논란이 될 법하다. 그런데 이 영화 한국에서 8월 15일 광복절에 개봉했다. 그 자신감만큼이나, 영화는 공정할까 의심하면서 극장을 찾았다.


전쟁 속 한 여자의 시선

이노우에 준이치 감독의 <전쟁과 한 여자>는 전쟁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황폐해진 사람들이 섹스를 통해 삶에 집착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영화이다. 주인공들에게 섹스는 단순한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카메라는 거칠게 섹스에 탐닉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데, 그 과정이 전혀 에로틱하지 않다. 표현 수위는 강하지만, 영화 속 섹스는 폭력만큼이나 처절하고 흉하다. 한정된 장소에 소수의 사람만 출연하는 저예산 영화의 특징과 ‘섹스’를 다루는 영화의 특징 상 카메라는 계속해서 세 배우의 몸을 뒤따르는데 불감증에 걸린 여인, 불구가 된 군인, 술과 마약에 찌든 소설가의 몸으로 표현되는 상징은 직설적이고 상투적이지만, 만신창이가 된 그들의 육체를 통해서 현재의 절망이나 미래의 희망 대신, 생존이란 의미를 드러내는 과정은 치열할 정도로 내밀하다.



이노우에 준이치 감독은 전쟁의 가해자인 일본인으로서, 스스로의 죄의식과 죄책감을 작품 속에 녹여내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는 분명한 반전 영화의 메시지를 가지고 전쟁 속 일본인들 또한 피해자라는 동정론을 어설프게 늘어놓지 않는다. 3,500만원이라는 저예산으로 일본 특유의 성애 영화를 일컫는 ‘핑크 영화’의 장르적 특징을 따른다. 핑크 영화란 일정 분량 이상의 섹스 장면만 넣으면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맘껏 펼칠 수 있었기에 현재에 수오 마사유키, 구로사와 기요시 등 거장이 된 감독들을 많이 배출한 일본 특유의 장르 영화이다. 성애 묘사는 과감하고, 배우들의 연기는 일부러 저러나 싶게 어색하지만 감독의 의식은 제대로 살아 있다. ‘전쟁과 여자’가 아니라 굳이 전쟁과 ‘한’ 여자라는 제목을 단 것처럼 이노우에 준이치 감독은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 갇힌 ‘한’ 여자를 통해 전쟁이 내포하고 있는 파괴력과 그 전쟁의 주범인 천황과 전쟁에 참여한 남성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기의 도쿄. 사창가에서 일하다 불감증에 걸린 여인(에구치 노리코)은 일을 그만두고 소설가(나가세 마사토시)와 동거를 시작한다. 한편 전쟁터에서 오른팔을 잃은 군인(무라카미 준)은 성폭행과 살인을 통해서만 쾌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쌀을 미끼로 여인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한다. 패전이 확실시된 가운데 여인과 소설가는 곧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며 서로의 몸을 탐닉하고, 군인은 계속해서 여인들을 폭행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전쟁이라는 소용돌이에 빠진 세 남녀의 태도이다. 허무주의에 빠진 소설가는 술과 마약에 절어 세상을 저주한다. 중국에서 강간, 살인이란 만행을 저지른 군인은 일본에서도 강간과 살인을 멈추지 않는다. 어느 날 마주친 노인은 여인을 향해 ‘너 같은 년 때문에 일본이 망했다’고 저주를 퍼붓는다. 이렇게 일본의 남자들이 모두 무책임하게 남 탓을 하는 동안 여인은 ‘생존’을 위해 기꺼이 그들에게 육체를 내던진다. 각기 다른 삶을 살던 군인은 어느 날 여인을 성폭행한다. 여인은 태어나 처음으로 폭행당하면서 오르가즘을 느낀다. 두려워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군인은, 여인이 두려워하지 않고 한 번 더 섹스를 요구하자, 오히려 겁을 먹고 달아난다. 강렬한 반전의 메시지를 담고 있긴 하지만, 여성의 육체를 다루는 영화의 논조는 분명 논란의 여지가 될 법하다. 하지만 전쟁의 소동 속에서 여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과 미래라는 사실은, 타인을 배척하고 모든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고 파괴하는 남성의 세계와 분명하게 대비되면서 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하야오 유감

<전쟁과 한 여자>와 함께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할 영화가 곧 개봉 예정이다. 2008년 <벼랑 위의 포뇨> 이후 5년 만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한 <바람이 분다>이다. 지난 7월20일 일본에서 개봉 후 5주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현재까지 600만 명의 관객을 동원, 지브리사의 작품이 늘 그랬듯 일본 여름 극장가의 승자가 되었다. <바람이 분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츠비시 중공업에 근무했던 제로센 전투기 설계사 호리코시 지로의 삶을 담아낸다. 주인공 호리코시 지로는 관동대지진, 경제공황, 2차 세계대전의 혹독한 시대를 겪으면서도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열정 하나로 똘똘 뭉친 인물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물의 순수한 열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내지만, 문제는 호리코시 지로가 만들어낸 전투기가 진주만 공습, 가미카제 특공대의 전투기로 쓰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던 무시무시한 살상용 무기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미츠비시 중공업은 그 비행기를 만들기 위해 조선인 10만 명을 강제 동원해 노동력을 착취했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은 숨긴 채 “전시에 살았던 일본인이라고 모두 죄가 있는 건 아니다.”라며, 역사의식을 뭉개고 개인의 꿈과 야망을 낭만적인 시선으로 그려낸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우선 영화의 문제는 주인공 호리코시 지로가 자신이 만든 비행기가 살상용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고민하거나 번민하지 않는다는데 있고, 감독이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역사적 시선은 거세한 채, 지극히 낭만적인 개인의 이야기로 함몰시켰다는데 있다. 이에 <전쟁과 한 여자>의 시나리오 작가 아라이 하루히코는 “미야자키 감독이 영화 밖에선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과 중국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영화에서 침략전쟁에 쓰인 전투기 기술자를 그린 건 이중적”이라고 비난했다. 하야오의 말처럼 일본인 모두가 죄인은 아닐 수 있지만, 역사적 죄의식을 가지고 진정 사과하고 과거의 잘못을 거듭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죄책감이야 말로 일본인들이 후대를 통해 계속 가지고 가야 할 양심이지 않을까?

무솔리니가 유대인 학살을 한 것은 그저 작은 실수이며, 그가 잘한 것도 있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무솔리니의 손녀 같은 삶을 살 것인지, 스탈린이란 이름과 평생 함께 하는 죄수라고 자신을 칭하며 평생 속죄하면서 살았던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의 삶을 살 것인지, 어느 삶이 더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건지 미야자키 하야오 정도의 거장이라면 충분히 고민했어야 한다. 온전한 이데올로기를 담아낸 <전쟁과 한 여자>보다 왜곡된 역사관을 보여주는 <바람이 분다>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기고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객들 중 대부분은 과거에 대해 백지상태인 어린이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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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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