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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모든 것이 업(業)이다 - 『그림자 밟기』

가엽게도, 마음이 부서지고 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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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밟기』에는 아이를 학대하는 여인도 있고,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요괴도 나오고, 인간 때문에 사람을 죽이게 된 요물도 나온다. 미야베 미유키는 그 사건들을 현대적인 논리로 재단하지 않는다. 요괴나 빙의 등 과학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것들이 끼어들며 각각의 사건들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또한 범인을 찾거나 수수께끼를 해명하는 것만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한때 미야베 미유키는, 당분간 현대물을 쓰고 싶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왜인지 알 것도 같았다. 『이름 없는 독』에서 미야베 미유키는, 보통 사람들이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악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단순한 질투 혹은 시기심 때문에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한 가족을 완전히 파탄지경으로 모는 인간. 그의 마음이 무엇인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렇게까지 된 것일까? 아니 처음부터 그랬던 것일까? 그러면 그건 타고난 것일까, 사회가 만든 것일까. 『이름 없는 독』에서 미야베 미유키는 주인공을 통해서 ‘모르겠다.’고 말한다. 차라리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그냥 원인을 아무 것에나 전가할 수 있다면 편해질 텐데.

미야베 미유키가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쓴 소설을 보고 있으면, 그 생각이 난다. 에도 시대에도 악행은 있고,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악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받아들인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고, 때로 그들을 인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드는 무엇인가도 있다. 마음이 지나치면 생령이 생기기도 하고, 인간이 쓰는 도구가 요물로 바뀌기도 한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소설에서 흔히 그러듯,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초자연적인 사물이나 상황으로 치환시켜 받아들이기도 한다. 제아무리 기묘하고 몽환적이어도, 그 상황 자체는 조화롭다. 지금 이 곳의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가혹하고 억울한 상황일지라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어딘가에 이유가 있고 결과가 있는 것이다.

『그림자 밟기』에는 2003년부터 2010년까지 발표한 단편 6편이 들어있다. 아이를 학대하는 여인도 있고,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요괴도 나오고, 인간 때문에 사람을 죽이게 된 요물도 나온다. 미야베 미유키는 그 사건들을 현대적인 논리로 재단하지 않는다. 요괴나 빙의 등 과학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것들이 끼어들며 각각의 사건들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또한 범인을 찾거나 수수께끼를 해명하는 것만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반드시 어떤 방법으로건 결착을 지어야만 한다. 요괴를 멸하거나, 원한을 달래 제자리로 돌려보내야 한다. 현대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해결책을 통해서, 그들은 평온을 찾는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것들은 그냥 받아들이면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든 진심이든, 마음의 움직임만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런 일이 결코 없으리라고 사이치로 자신도 단언할 수 없게 되었다.

「반바 빙의」에서는 시기와 질투 때문에 누군가를 죽인 여인이 나온다. 그리고 자기가 죽인 여인이 된다. ‘반바 빙의’라는 것은,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내어 그를 죽인 사람에게 빙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살아간다. 하지만 알 수가 없다. 정말로 빙의한 것일까? 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 것일까? 현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들은 받아들인다. 받아들여야만 평화로워지고, 행복할 수 있으니까.

사람의 손에 의해, 어린아이의 피를 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요물이 되고 말았지만, 평범한 도구에서 요물이 됨으로써 일단은 구원되었지요. 이 세상 것이 아니게 됨으로써 구제된 것입니다.

「토채귀」에서는 고향을 떠나 에도에 정착한 사무라이인 리이치로가 나온다. 그가 섬겼던 번의 영주는 극악한 인물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가신의 부인이건, 절의 승려이건 상관없이 빼앗았다. 수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죽게 만들었다. 리이치로의 혼약자도 영주의 눈에 띄고 말았다. 가족을 위하여 자신을 보내달라는 말에, 리이치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는 죽었다.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사람처럼 살았다. 복수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산을 가다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만들어진 수 십 여개의 석불을 보았다.

남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그 혼을 위로하기 위해 남몰래 새겨, 이곳에 쌓아 놓아 온 석불들이다. 벌 받을 것이 두려워 산속 깊이 숨기고. 도망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때다.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이 석불들을 남겨 두고 나만 도망칠까 보냐.

도망칠 수가 없다. 도망치지 않고, 다른 것을 받아들여 조화를 꾀한다. 귀신도 좋고, 요물도 좋다. 원한을 담아 요괴가 될 수도 있다. 「바쿠치칸」에 나오는 요괴 ‘바쿠치칸’은 그를 받아들인 이가 모든 도박에서 이길 수 잇는 운을 준다. 엄청난 재물을 벌 수 있을 분 아니라 재난도 피할 수 있는 운이다. 하지만 대가가 있다. 벌어들인 돈은 어떻게든 탕진해야만 하고, 날로 도박에만 찌들면서 그의 성정 역시 거칠고 포학해지기 마련이다. 가정이 있다면, 풍비박산나기 십상이다. 그래서 ‘바쿠치칸’을 받아들일 이는 가급적 가정이 없는, 홀몸의 남자로 한다. 재물을 얻기 위해 받아들인 바쿠치칸은, 결국 주인을 파괴하고 또 다른 제물을 찾아간다. 인간이 요물을 퇴치할 수는 있지만, 다스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다스리기 힘든 인간이니까.

가엽게도, 마음이 부서지고 만 것입니다.

『그림자 밟기』를 보고 나면, 한 가지 생각만이 든다. 결국은 모든 것이 업이다. 내가 쌓은 것 혹은 남의 업에 내가 말려들어 벌어지는 일들. 그 업을 풀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제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란 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아무리 선해도, 아무리 다정해도 우리들의 마음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쉽게 흔들린다. 그래서 슬프고 또 무섭다.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괴담이 늘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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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밟기 미야베 미유키 저/김소연 역 | 북스피어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시대물 단편집 『그림자밟기』는 2003년부터 2010년에 걸쳐 발표된 6편의 단편을 포함하고 있다. 작가는 남보다 한참 앞서고 싶어 하는 사람의 욕심, 끔찍한 아동 학대, 자식을 미워하는 부모, 데릴사위로서의 고달픈 삶 등, 현대에서도 볼 수 있는 괴로운 사연들을 괴담이란 형식을 빌려 풀어 놓는다. 덧붙여 작가가 작품 인터뷰에서 ‘무서움과 웃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을 인용했듯이 『그림자밟기』의 무서우면서도 슬프고 때로는 웃음이 나는 에도 시대 서민들의 사연 속에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과 정서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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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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