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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아무도 구할 수 없는 걸까? - 연극 <칼집 속에 아버지>

내가 진짜 구하고 싶은 건 뭘까? 내가 진짜 구할 수 있는 건 과연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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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를 보고 알게 됐다. ‘왜 우리는 아무도 구하지 못하는 걸까?’와 같은 질문이 슬픈 까닭은, 우리가 어떤 이타적인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사실보다도, 소중한 것을 잃는 그 순간 나의 나약하고 먼지같은 모습을 거울보듯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질문은 정정되어야 한다.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구하지 못하는 걸까?’

Why can't you save anybody?


우리나라에서는 ‘헤르미온느’로 더 잘 알려진 배우 엠마 왓슨이 열연한 영화 <월플라워>는 학교라는 세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십대 청춘들의 이야기다. 벗어나고 싶지만, 경제력도 지력도 물리력도 없어 꼼짝없이 감당해야 하는 학창 생활. 인기도 없고 친구도 없는 데다가, 누구도 ‘슬프고 기쁜 마음이 한꺼번에 드는’ 내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시절을 겪고 있는 소년 소녀들이 등장한다.

내 존재가 한없이 시시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 그러니까 완전히 좌절해버리기 직전, 세상의 아웃사이더들이 간신히 서로를 알아본다. 뭉친다. 그리고 그렇게 기대서 그 시절을 버틴다. 배경이 영국인 탓에 우리네 학창시절에 고스란히 대입하기는 어려운 장면이나 상황도 간간 등장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이 한마디로 기억한다. 내 마음을 흔들었던 패트릭의 그 한마디. “우리는 왜 아무도 구할 수 없는 걸까?(Why can't you save anybody?)” 왜 우리는 우리에게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지 못할까?

연극 <칼집 속에 아버지>를 보고 나오는데, 문득 이 영화가 떠올랐다. <칼집 속에 아버지>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를 날카롭고도 근사한 언어로 무대 위에 올리는 고연옥 작가와 작가의 언어를 몸으로 풀어내는 데 능숙한 강량원 연출가가 만든 창작 연극이다. 국적도, 분위기도, 성격도 매우 다른 두 작품이 겹쳐 떠오른 까닭은 무엇일까?

칼집 속에 아버지를 이고 떠나는 주인공은 갈매. (오랜만에 무대 위에서 보는 배우 김영민이 반갑다.) 짙은 녹색이라는 푸르디 푸른 이름을 가진 갈매가 칼을 차고 길을 나선 사연은 이러하다. 싸움꾼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추앙 받는 찬솔아비, 갈매의 아버지가 살해되어 변소 간에 거꾸로 처박히는 일이 벌어졌다. 사실, 밖에서나 영웅이었지, 집 안에서는 결코 좋은 남편도, 좋은 아버지도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평판을 사모했던 엄마는 갈매의 등을 떠밀며 말한다. “너도 무사가 되어라. 가서 네 아버지의 원수를 갚거라.”

아들 된 도리로 길 위에 떠밀리기는 했는데, 우리 겁 많고 유약한 갈매는 싸움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고, 칼을 뽑아드는 일에 흥미도 관심도 없는 청년이다. 대체 어디서 원수를 찾고, 어떻게 복수를 한단 말인가? 갈매는 아버지 원수들의 이름이 적힌 긴 종이를 들고, 7년의 고행 길을 시작한다. 지친 갈매는 이제 그냥 누구와라도 싸워서 명예롭게 죽을 수 있다면 좋겠다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길에서 만난 무사들은 한 번도 칼을 뽑아보지 않은, 무사 자격 미달인 갈매와 상대도 해주지 않는다. 집으로 갈 수도, 계속 길을 걸을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 작가 고연옥은 이 작품을 두고 “작정하고 재미있게 쓴 희곡”이라고 했는데, 정말이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코믹한 상황이 이어진다.


갈매는 도대체 왜 싸워야 하는가?


갈매는 이윽고 마지막 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은 마을 처녀를 재물로 받는 잔혹한 왕, 검은등이 지배하는 곳이다.(갈매 아버지 찬솔아비와 검은등을 한 배우가 연기한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마을 처녀 초희는 갑자기 나타난 갈매가 검은등을 무찌를 수 있는 영웅이 틀림없다며 자신을 구해달라고 애원한다. 갈매는 백 년을 넘게 노인으로 살며 마을을 지배하는 검은등과 맞서 싸워, 명성도 얻고 이 여정도 끝내야겠다는 각오로 검은등을 무찌르러 간다. 그, 그런데, 어떻게 싸워야 한담?

갈매는 도대체 왜 싸움 길에 올랐는가? 갈매는 왜 싸워야 하는가? 갈매가 길을 떠난 지 7년이나 흘렀지만, 연극은 끊임없이 관객에게 질문한다. 이 작품에 가장 큰 코미디가 이 질문 속에 있다. 갈매의 여정이 꼭 남의 일 같이 느껴지지만은 않아 섬뜩하기도 하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우리가 온전히 선택한 길인가? 누군가의 요구로, 누군가의 기대로, 이게 합당하고 이게 바르다고 하니까 떠밀려 걷고 있는 건 아닌가? 연극은 무섭게 되묻는다.

갈매에게 아버지는 영웅도,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아버지였다는 혈연관계 때문에, 그에게는 복수라는 의무가 주어졌다. 마치 덴마크의 왕자 <햄릿>처럼. 어떤 아버지는 죽어서도 아들의 발목을 잡는다. 아버지 죽인 자를 복수하라는데, 누가 이 운명을 거부할 수 있으랴? 어떤 부모는 이렇게 자식을 통해 두 번 삶을 산다. 물론 여기서 부모란, 나를 낳고 키워준 두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로는 어떤 사람이, 어떤 사건이, 어떤 환경이 내 등을 떠민다. 내 것이고 내 안에 속해 있지만, 내 본연의 모습과 합하지 않는 것, 화해되지 않는 것들이 극 속의 ‘부모’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검은등이 자는 방에 잠입하는 일은 성공했지만, 갈매는 차마 칼을 뽑지 못한다. 차마 그를 찌르지 못한다. 누군가를 한 번도 베어본 일이 없는, 경험 없는 무사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칼을 꺼내는 일 조차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갈매도 은연중에 자신이 복수를 ‘해야만 하고’ 영웅이 ‘되어야만 한다’고 그저 믿어왔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그리고 검은등을 찌르러, 숨죽여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일촉즉발의 순간에 비로소 자기 자신, 자기 안의 두려움과 직면하게 된다. 그때 검은 등은 깨어나고, 갈매는 검은 등의 주특기인 저주에 빠져든다. 이제, 정말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에 놓인 것이다. 갈매는, 그때야, 칼을 뽑아든다.

백 살이 넘은 검은등은 동네에서 어린 소녀들과 결혼하고, 이내 자신의 아내를 죽인다. 그리고 소녀의 부모들에게 큰 보상을 해주는데, 가난한 부모들은 딸의 죽음을 대가로라도 자신을 보살펴주는 검은등에게 감사하고 존경을 바친다. 참으로 기괴한 일이다. 기자, 목사, 이장, 서장은 몰려다니면서 검은등의 덕망을 칭송하고, 새 결혼을 축하하고, 장례를 위로하며, 새 아내를 얻어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극 속에서 권력은 돈과 명망을 이용할 줄 안다. 이런 다양한 메타포와 에피소드로 극은 다양하게 해석하고 읽어낼 수 있다. 참으로 부조리한 상황 설정이지만,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갈매는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다. 검은등과 결혼할 초희를 지켜내야 하는 순간에도, 그는 칼을 뽑는 일을 망설였다.


내가 칼을 뽑지 못하는 까닭은 대체 뭘까?


“우리는 왜 아무도 구하지 못하는 걸까?” 영화 <월플라워>의 질문을 떠올린 건 이 때문이다. 우리는 갈매처럼 재능도, 적성도 없으면서 모두가 추앙해 마지않는 영웅을 꿈꾼다. 아니,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타적이고 숭고한 일을 할 수 있길 원한다. 아니, 최소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다고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아무에게나 허용되지 않는다. 타고난 영웅은 따로 있는 거지, 갈매나 <월플라워>에 등장하는 소년소녀나, 나 같은 사람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우리는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존재들이니까.

갈매를 보고 알게 됐다. ‘왜 우리는 아무도 구하지 못하는 걸까?’와 같은 질문이 슬픈 까닭은, 우리가 어떤 이타적인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사실보다도, 소중한 것을 잃는 그 순간 나의 나약하고 먼지같은 모습을 거울보듯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질문은 정정되어야 한다.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구하지 못하는 걸까?’

그 대답은 우리가 여기까지 다다르는 동안, 이미 쓰였다. 첫 번째 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 왜 이 복수의 여정에 서 있는지 스스로 모르기 때문에, 어째서 적을 무찔러야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싸워야 한다는 것만 알지 실제로 싸움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소중해서 지키고 싶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 그것이 내가 두려움을 이기고 칼을 뽑을 만큼 소중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기 때문에……. 내가 진짜 지키고 싶은 건, 나의 체면, 나의 자존심, 나의 평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말이다. 그래서 섬뜩했다.

봄이고 날씨도 좋은데 밖이 소란스럽다. 정권이 바뀐 지 70여 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경질이니 성추행이니 대국민 사과니 뭐니 세상이 떠들썩하다. 권력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언론들은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경쟁적으로 사건을 실시간 브리핑한다. 웬일이니 웬일이야, 들리는 장단에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는 내가 정말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소리를 놓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디선가 해고자들이 복귀를 위해 시위한다는 소식이나, 직원들을 교묘하게 괴롭히는 기업의 횡포나, 권력에 의혹을 제기한 기자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는 소식들이 흘러가고 묻히고 있다. 눈 뜨고 귀를 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참 쉽게 쉽게도 놓친다. 그리고 허무한 척 이렇게 되뇐다. “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소중한 것들을 구할 수 없는 걸까?” 그때 <칼집 속에 아버지>가 영화 <월플라워>가 떠올라 나는 이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진짜 구하고 싶은 건 뭘까? 내가 진짜 구할 수 있는 건 과연 뭘까? 내가 칼을 뽑지 못하는 까닭은 대체 뭘까?” 질문이 바뀌면 대답도 조금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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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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