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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버킷리스트-평일에 낮술하기

낮술, 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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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저 아래에서 모두들 열심히 일하고 있겠지. 이것들아, 돈 한 푼 안 벌어도 열심히 즐기는 내가 챔피언이다. 취하여 하늘을 보면 구름이 참으로 천천히 흐른다. 1분이 10분처럼 느껴진다. 일할 땐 10분도 1분 같더니만.


낮술이 단지 낮에 마시는 술의 의미로 직역된다면 몹시 서운할 것이다. 밤에 퇴근 후 마시는 밤술의 반대말로 해석되어도 마찬가지고. 퇴근 후 한잔마시는 술은 고단한 밥벌이에 대한 위로고, 내일은 더 열심히 일하려는 무언의 다짐이 깔려 있다(아무리 과음해도 다음날 어떻게든 출근하더라). 반면 낮술은? 일단 대낮에 술을 마신다는 것 자체가 그날 노동에서 자유롭다는 뜻이고 또 빈 시간을 술로써 허비하겠다는 결심 같은 거니까. 낮술은… 낮술은… 좌골과 불순분자의 아이콘이랄까.


몇 년 전 나는 당분간 돈 벌기를 포기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 꾸준히 참석했던 게 등산모임인데 매주 수요일 시간 되는 이들 몇 명이서 북한산 둘레길을 도는 그런 모임이었다. 아침 10시쯤 만나 설렁 설렁 걷다보면 금세 점심시간이 된다. 그럼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돗자리를 펴고 배낭에 싸온 음식들을 쏟아낸다. 김밥, 족발 같은 등산 정통 메뉴부터 오리훈제, 골뱅이무침 같은 특식, 여기에 갓김치, 멸치조림, 장조림 같은 특별식이 한 상, 아니 한 돗자리 가득 차려진다(이런 모임엔 적절히 살림하는 주부님이 계셔야 상이 풍성해진다). 2시간 정도 걸었으니 적절히 배고프고 산의 고도는 적당히 상쾌하다. 그리고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4~5명의 인원. 이게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최적의 상태다. 그리고 산 위 밥상에 화룡정점을 찍는 건 막걸리다. 이때 막걸리는 등산로 앞 편의점에서 급조해오면 정말 무성의한 거다. 모임 전날 밤 12시 이전에 사서 냉장고에 얼려둔 것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다음날 정오쯤 배낭에서 꺼냈을 때 몸의 열기에 적절히 녹아 꽝꽝 언 상태도 아니요, 미지근한 상태도 아니요, 살짝 살얼음이 낀 최적의 상태가 된다. 각자 준비해온 스테인레스 컵에 한 잔씩 막걸리를 받아 공복에 붓는다. 이빨이 시리고, 뇌까지 시리다. 거기에 고기 한 점을 김치에 싸 안주로 먹는다. 약과 음식이 같은 거라는 약식동원을 패러디해 밥과 술이 같은 거라는 식술 동원. 밥과 술의 경계가 없다. 막걸리 서너 잔에 싸온 안주이자 밥을 다 먹고 나면 그 자리에 드러눕는다.

산 저 아래에서 모두들 열심히 일하고 있겠지. 이것들아, 돈 한 푼 안 벌어도 열심히 즐기는 내가 챔피언이다. 취하여 하늘을 보면 구름이 참으로 천천히 흐른다. 1분이 10분처럼 느껴진다. 일할 땐 10분도 1분 같더니만. 그렇게 다시 걷고 저물녘에 내려와 뒷풀이 하고 흩어진다.


이렇게 북한산에서 맛들인 낮술은 산에 가지 않는 날에도, 백수가 아닌 상황에서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 되었다. 비가 온다는 이유로, 일이 하기 싫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낮술의 핑계를 생산해내고 있으니까. 어쩌면 알코올 중독자의 낮술 예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알코올 기운이 간절해서가 아니다. 비가 오면 빗소리를 즐기는 여유를 갖기 위함이고, 일이 바쁘게 몰아칠 때면 속도를 내리기 위해 쉬어가는 거다. 조금 더 천천히 살자고, 가끔은 시간을 허비해도 괜찮다고. 그게 해발 300미터 북한산의 낮술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복음을 초기신도처럼 열에 들떠 전하고 다닌다. 내가 당신에게 낮술을 권한다면 당신을 매우 사랑해서다. 그러니까 낮술, 하실래요?


나의 낮술집
▶ 경복궁역 금천교 시장 안에 있는 <체부동 잔치집>은 낮술하기에 무난한 집이다.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등산객들이 많아 비교적 낮술 손님도 많은 편이고.
▶ 인사동 초입에 있는 <줄없는 거문고>는 콩나물 국밥과 뜨거운 모주의 조합이 끝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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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 서울 김지현 저 | 네시간
방송작가 특유의 객관성 있는 담담한 어조로 ‘도시, 서울 살이’의 다양한 모습을 현장성 있게 그리고 있다. 마치 나래이션을 듣는 듯한 느낌은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자신을 타인화하여 감정을 한 꺼풀 걷어낸 단조롭고 관조적인 감성도 매력적이다. 여행과 지리적 공간, 풍광이나 맛집 등을 찾아다니는 표피적인 도시 즐기기에만 국한하지 않고,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사소한 일상의 모습을 통해 서울의 지도에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노선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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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현

1975년생, 14년차 방송작가, 2년 전세 계약이 만료될 때마다 서울을 뜰 생각을 하지만 19년째 유예하고 있는 중견 서울생활자다. 요리와 정리정돈을 잘하고 맥주, 씨네큐브, 수영장, 효자동을 좋아한다. 게스트하우스, 똠얌꿍 식당, 독신자 맨션처럼 실천 가능성 없는 사업을 자주 구상하며 그나마 가장 오래 하고 있는 일이 글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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