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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여행하는 낭만버스

서울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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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천편일률적인 지하철 역세권 풍경 대신 시장, 대학가, 유흥가, 주택가 같은 보다 역동적인 풍경을 선물했다. 금호동을 지날 때 구불구불한 언덕을 넘어 만난 금남시장의 생소한 풍경이란. 버스 안에까지 한약방 냄새 진동했던 경동시장의 풍경이란. 이런 기억은 참으로 오래간다. 그리고 지금도 낯선 버스를 타게 되면 은근히 설레인다.


뉴욕에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움켜쥘 것은 아마도 지하철 노선도일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가야할 곳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낯설고 두려운 장소에서 본능적으로 제일 먼저 하는 게 좌표 찾기. 그걸 용이하게 해주는 도구가 지하철 노선도니까. 나에게 낯선 도시와 친해진다는 건 그 도시의 지하철 노선도에 익숙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처음 서울에 오고 나서 종로, 신촌, 홍대, 강남처럼 지하철 위주의 세상에서만 살았으니까. 예를 들어 절대 갈 일 없는 5호선 화곡이나 1호선 부평은 그 시절 나에게 무의미한 셈.

그렇게 지하철 위주의 서울지도는 버스로 인해 재편된다. 버스는 천편일률적인 지하철 역세권 풍경 대신 시장, 대학가, 유흥가, 주택가 같은 보다 역동적인 풍경을 선물했다. 금호동을 지날 때 구불구불한 언덕을 넘어 만난 금남시장의 생소한 풍경이란. 버스 안에까지 한약방 냄새 진동했던 경동시장의 풍경이란. 이런 기억은 참으로 오래간다. 그리고 지금도 낯선 버스를 타게 되면 은근히 설레인다.

정릉에서 출발해 한강 이북을 훑고 돌아오는 110B번 버스. 버스 한 대가 이토록 도시의 다양한 표정을 담아내다니. 누군가는 이 버스를 거대한 수평 엘리베이터에 비유했다. 한적한 고산 도시 느낌이 나는 정릉 세검정 구간, 한계령 한 구비 도는 것 같은 홍지문 구간. 7,80년대 서울 변두리 풍경을 간직한 홍은동을 거쳐 신촌에 도착해야 비로소 지금이 2013년이라는 걸 새삼 확인한다.


강북의 110B번 버스에 견줄 만한 게 강남의 462번 버스다. 송파에서 출발해 영등포를 찍고 돌아오는 서울 남부 횡단 버스. 비릿한 생선 냄새가 버스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영등포 노량진 구간. 반포의 모 아파트 단지는 22세기 미래 도시에 온 느낌이 들고. 낮에는 남한산성으로 가는 등산객이, 밤에는 강남역으로 가는 청춘들이 번갈아 승차하는 버스다.

서울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는 402번 버스다. 이름마저 서정적인 소월로를 지난다. 왼편은 남산이고 오른편은 후암동인데 타는 이도, 내리는 이도 없는 고즈넉한 남산의 정류장을 지날 때마다 버스에서 내려 하염없이 소월로를 걷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또 정릉에서 출발해 세검정을 거쳐 종각 한 바퀴 돌고 오는 1020번 버스는 부암동 언덕을 넘을 때가 제일 환상이다. ‘터널을 지나자마자 설국’이라는 표현처럼 언덕을 지나자마자 거대한 자연이 펼쳐진다.

마을버스는 시청, 광화문에서 타 옥인동으로 오는 종로 09번이 오밀조밀 예쁜 길로 유명하고. 얼마 전에는 우연히 ‘옥수동’이란 표지판을 단 7127번 버스를 발견했다. 옥수동이라니 동네 이름이 너무 예쁘지 않은가. 그 곳엔 한석규 닮은 노총각이 운영하는 낡은 사진관이 있을 것 같고, 학교를 파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떡볶이 집이 있을 것 같다. 조만간 그 버스를 타야지.

버스 여행은 누군가와 동행하는 것보다 혼자 다닐 것을 추천한다. 오롯이 혼자, 음악을 듣거나, 무심히 창밖을 보다보면 분명 풍경이 말을 걸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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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 서울 김지현 저 | 네시간
방송작가 특유의 객관성 있는 담담한 어조로 ‘도시, 서울 살이’의 다양한 모습을 현장성 있게 그리고 있다. 마치 나래이션을 듣는 듯한 느낌은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자신을 타인화하여 감정을 한 꺼풀 걷어낸 단조롭고 관조적인 감성도 매력적이다. 여행과 지리적 공간, 풍광이나 맛집 등을 찾아다니는 표피적인 도시 즐기기에만 국한하지 않고,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사소한 일상의 모습을 통해 서울의 지도에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노선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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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현

1975년생, 14년차 방송작가, 2년 전세 계약이 만료될 때마다 서울을 뜰 생각을 하지만 19년째 유예하고 있는 중견 서울생활자다. 요리와 정리정돈을 잘하고 맥주, 씨네큐브, 수영장, 효자동을 좋아한다. 게스트하우스, 똠얌꿍 식당, 독신자 맨션처럼 실천 가능성 없는 사업을 자주 구상하며 그나마 가장 오래 하고 있는 일이 글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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