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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메기라는 생선을 잘못 알고 있었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 - 구룡포라는 옛날들 누군가 나에게 구룡포가 어떤 곳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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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구룡포가 어떤 곳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수 없어 한동안 망설일 것이다. 전국에서 대게가 가장 많이 유통되는 지역이라 할까, 과메기의 본고장이라 말해야 할까. 한때 고래잡이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오징어잡이 배와 대게잡이 배가 포경선을 대신하고 있는 항구라고 말하면 좋은 대답일까. 만약 그 물음에 대한 답을 꼭 해야만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구룡포, 그것은 포구가 아니라, 시간이다.

누군가 나에게 구룡포가 어떤 곳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수 없어 한동안 망설일 것이다. 전국에서 대게가 가장 많이 유통되는 지역이라 할까, 과메기의 본고장이라 말해야 할까. 한때 고래잡이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오징어잡이 배와 대게잡이 배가 포경선을 대신하고 있는 항구라고 말하면 좋은 대답일까. 만약 그 물음에 대한 답을 꼭 해야만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구룡포는 아침과 저녁이 같은 곳이다. 어제와 오늘이 같은 곳이다. 구룡포는 과거와 현재다.

파스칼 끼냐르는 『옛날에 대하여』의 36장에서 프랑스를 이렇게 묘사한다.

외호에 남겨진 로마의 폐허, 빵집 부근의 두 눈이 상반된 코르시카-사르데냐의 석재 입상, 강가에 설치된 토르의 망치, 성당 아래 자리한 메로빙거 왕조의 무덤, 최초의 인간들에 의해 채색되고 가시덤불이나 언덕의 키 작은 떡갈나무로 입구가 가려진 동굴, 물속 깊이 가라앉은 그리스 항아리, 캅카스에서 바스크로 곧장 전해지는 옛 노래, 도처에 보이는 로마의 예배당들이 있다.
프랑스, 그것은 나라가 아니라, 시간이다.


소주와 과메기

동해어업기지인 구룡포는 그만큼 다채로운 맛을 가졌다. 농담 섞어 이야기 하자면, 근교에서 소주가 가장 많이 유통되는 지역도 구룡포일 테다. 포구를 여행하다보면 가끔 술 생각이 간절해질 때가 있다. 듬성듬성 썰어낸 회를 맛볼 때가 꼭 그랬다. 막 삶은 고동이나, 초장에 찍은 문어 역시 술안주로 제격이었다. 구룡포를 찾았으니, 원조의 맛, 과메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나는 배춧잎 위에 생미역을 얹고 윤기가 흐르는 과메기 한 점을 올렸다.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마늘종과 풋고추를 곁들인 쌈이 비린 맛을 잡아주었지만, 소주 만한 것이 없었다. 달리 말하면 술맛을 돋우는 데에는 이 과메기가 한 몫 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초행길에도 구룡포가 친숙했던 것은 과메기 덕분이었다. 대학시절 선배들이 데려간 낙동강가의 술집에서였던가, 부모님을 따라간 횟집에서였던가. 과메기를 처음 맛본 때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과메기의 원산지가 구룡포라는 것은 각인되어 있었다. 그만큼 과메기는 구룡포의 특산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과메기가, 과메기라는 생선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누구도 그것이 어떤 생선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여행지에서야 비로소 과메기의 정체가 꽁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메기 작업장에서는 꽁치의 살을 발라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붉은 살점만 남은 꽁치는 소금 간에 절인 후에 곧장 냉동고에 넣어졌다. 이미 얼려두었던 것은 해풍이 잘 부는 곳에 널어두었다. 그렇게 반복적인 작업을 거쳐야 비로소 갈색 빛이 돌고 윤기가 흘렀다. 과메기를 만들어 먹게 된 것은 옛날부터였다. 냉장고도 통조림도 없었던 시절의 구룡포에는 개가 돈을 물고 다닌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로 청어나 꽁치가 풍년이었다. 장에 내다 팔고 남은 꽁치는 이웃과 나눠 먹었다. 남은 것은 새끼로 꼬아 말려 놓았는데, 겨울 내내 자연히 얼었다 녹은 것은 빛깔이 진해지고 기름이 돌았다. 과메기가 된 것이었다.

또 하나, 왜적의 침입이 잦았던 구룡포에서 지붕 위에 숨겨 놓은 청어가 얼었다 녹아 과메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과메기는 꼬챙이로 청어의 눈을 뚫어 말렸다는 뜻인 관목청어(貫目靑魚)에서 나온 말이었다. ‘목’이라는 말을 영동 지역에서는 ‘메기’나 ‘미기’로 불렀다. 이 때문에 관목에서 관메기가 되고, 받침이 탈락하여 ‘과메기’가 된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청어가 아닌 꽁치가 과메기의 주역이 된 것은 청어가 동해 어안에서 잘 잡히지 않고부터였다. 하지만 40여 년 간 자취를 감추었던 청어가 최근 들어 다시 돌아오고 있다고 했다. 청어건, 꽁치건 어쨌든 과메기는 옛날을 맛볼 수 있는 별미였다.




옛날이 머무는 곳

구룡포의 일본가옥거리에서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청바지와 베이지색 조끼를 입은 그는 큰 카메라를 목에 걸고 동네 구석구석에 셔터 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정면으로 렌즈를 드밀어 나는 조금 놀랐다. 사진 찍기를 멈추고 인사를 나눴을 때, 나는 더 놀랐는데, 그의 나이가 94세라는 이야기를 듣고서였다. 나이는 그저 숫자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는 듯 미소를 내보이는 그의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여 있었다. 주름이 미소의 방향으로 나 있어,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여행객에게 가장 고마운 순간은 이렇듯 작은 미소를 선물 받았을 때였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할아버지라는 말을 불러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문득 찾아온 호칭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그와 함께, 그가 살아온 거리를 걸었다. 이곳은 요리집, 저긴 여관, 저곳은 치과방, 굴뚝이 솟은 곳은 목욕탕.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구룡포에서 보낸 그의 숨결엔 기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걷던 이 거리도 그를 찌르는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었다.

그 시절, 일본인과 함께 생활했던 때, 원망과도 같은 감정을 느낀 적이 없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끝끝내 묻지 않았다. 우리네 아픈 역사 속에도 그의 청춘이, 아름다운 젊은 시절이 스며 있을 터인데, 우문(愚問)으로 왜곡된 답을 바라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 뒤론 셔터 소리가 괜스레 헛헛하게 들려왔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끝까지 사진을 찍었다. 뷰파인더로 보이는 거리는 어떨지 궁금해졌다. 나는 최대한 몸을 가까이 붙여서 그가 바라보는 것들을 함께 보려 애썼다. 그에게서 봄꽃의 향이 났다.

잘 모르는 거리를 걷거나, 오르막 계단에 앉아 잠시 쉬고 있을 때, 지나가는 주민들이 인사를 건네고 행선지를 물어봐줄 때, 좁은 골목길로 아이들 몇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릴 때, 멀어진 아이들 뒤로 작은 바람이 불어올 때, 나는 여행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곤 했다. 그곳의 공기에, 그 공간에 스며, 풍경의 일부가 되는 것. 그땐 떠나왔다는 실감보다는 다녀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나에게 구룡포가 어떤 곳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전히 대답할 수 없어 한동안 망설일 것이다. 하지만 끝내는 이런 답을 할 것이다.

옛날이 머무는 곳이라고.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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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오성은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
씨네필
문학청년
어쿠스틱 밴드 'Brujimao'의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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