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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가지 아버지 얼굴을 가진 배우 이순재

평생 연기할 수 있는 비결, 낫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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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배우들에겐 다음 작품에서 어떤 새로운 연기변신을 할지를 기대한다. 그런데 이순재 선생에게도 그렇다. 자주 아버지 역을 맡아도 다 같은 아버지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언젠간 해보고 싶다는 노인들의 삶과 사랑을 그린 시트콤. 또 한 번 화제를 몰고 올 이순재 표 시트콤이 탄생할 수도 있겠다.



‘제가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이 미국서 초연된 건 무려 1949년. 앓던 대한민국이 태동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한국에서 동일 제목으로 초연된 건 1970년대. 이순재 선생은 1978년과 2000년에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주인공 윌리 역을 맡았다. 지난해부터는 <세일즈맨의 죽음>에 한국적 정서를 입혀 <아버지>라는 제목의 연극으로 재탄생됐다. 1940년대 미국 소시민의 한 가정 이야기가 2010년대 한국 서민의 한 가정으로 옮겨온 순간이다.

“원래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작품이 대단히 동양적이에요. 가족 중심의 이야기이고.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간의 이야기는 우리와 같단 말이야. 다만 나한텐 나이의 변화가 있던 거지. 1978년엔 3, 40대였으니까 다들 열심히는 했지만 아무래도 보는 입장에선 역할에 밀착됐다고 보긴 힘들 수도 있었겠단 생각이 들어요. 이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도 아서 밀러가 더스틴 호프만 에게 윌리 역을 시켰는데 더스틴 호프만이 ‘제가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했더니 아서 밀러가 ‘그 역할은 힘이 들어서 제 나이엔 못해’ 그랬단 말야. 원래 대사는 500마디가 넘는 대작이거든.”

<아버지>에서도 여전히 4백 마디, 그러니까 4백 개가 넘는 대사를 소화해내면서도 대사를 잊을까 아찔한 순간은 없었다던 대배우 이순재, ‘아파트 사이로 숨어버린 달’에 대한 낭만적 오해나 연탄 때던 시절엔 없던 ‘가스 고무호스’라는 단어의 낯섬 때문에 원작에서 빠져버린 장면 말고는 1978년도나 2013년도나 달라진 건 없단다.

“아버지 자체는 달라지지 않아요. 가정을 책임지려하고 자식들을 염려하는 부모의 마음은 변함이 없으니까. 마지막에 아버지가 아들한테 ‘너와 난 언젠간 화해할 수 있을 줄 알았다’라는 말에서도 부자간의 진한 관계가 느껴지거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또 시대가 달라져도 같단 말이죠.”

지금, 1978년과 굳이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젠 ‘아버지’의 얼굴에 그려 넣지 않아도 될 만큼 자연스레 패인 세월의 흔적이 생겼다는 것 정도.




“연극하다 막히면 폐업해야지”

분장을 했음에도 오른쪽 눈꺼풀에 미세하게 남은 흉터자국, 지난해 바로 <아버지>를 공연하다 생긴 상처다. 보는 이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던 사고, 하지만 정작 이순재 선생 본인은 태연하게 당시 얘기를 들려줬다.

“무대 뒤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면서 구조물에 부딪쳤어요. 그 사고 전에도 한 번 부딪쳤지만 크게 다치진 않았거든.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지. 그런데 피가 나더라고. 워낙 피가 잘 나는 부위기도 하고. 손수건으로 닦아가면서 연기를 했지 뭐. 연극이 40분이나 남았는데 별 수 있나.”

연극이 끝난 뒤 병원에 가서 꿰맬 정도의 상처를 입었지만 너무도 태연한 그의 연기에 대다수 관객은 뚝뚝 떨어지는 피를 닦는 것 역시 정해진 연기인 줄 알았단다. 함께 연기한 동료나 그를 보러왔던 지인들만 깜짝 놀랐던 사고. 다행히 이번엔 다칠만한 구조물은 모두 치웠다. 이처럼 기사화될 정도의 돌발사고 말곤 장기 공연에도 건강으로 인한 공백도 없었던 이순재 선생. 비결이 뭘까?

“아파도 현장에 와야 힘이 나요. 더블 캐스팅은 다른 방송 스케줄과 겹쳐서 안 맞는 때가 있으니까 할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거고. 다만 나이 먹고 가장 걱정되는 건 대사를 깜박하면 어쩌나 하는 건데 이 작품은 여러 번 했던 거라 한 번 훑어보면 기억이 난단 말이지. 재작년에 했던 돈키호테도 그렇고 이제 연극을 하는 건 암기력에 대한 스스로의 테스트고, 이 행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없을까 내 컨디션에 대한 콘트롤인 거야. 연극은 내 능력의 시험장이니까 이거 하다 막히면 폐업해야지.”


최루성 연극이 부담스러운 관객들에게 고함

기자 역시 어머니, 아버지를 소재로 하는 문화상품에 다소 알러지가 있다. 요즘엔 간혹 초등학생들에게 질문을 해도 엄마, 아빠 얘기를 꺼내는 순간 뭐가 그리 목이 메는지 눈물부터 쏟는다. 자식들이 원초적으로 갖는 부모에 대한 무한 애잔함 탓에 어머니, 아버지를 소재로 한 최루성 연극을 부담스러워하는 관객들도 있는데...

<아버지>는 배우가 울음을 유도하는 작품은 아니에요. 사실 어머니를 소재로 한 작품이 꽤 많은데 배우가 펑펑 울면서 관객을 자극하기도 하고. 그런데 연극을 하다보면 관객에게 넘겨줘야 할 대목이 있단 말이지. 배우가 그 몫까지 다 해버리면 관객은 방관자가 되는 거고. 그 정서를 어떻게 관객에게 몰아주느냐, 어떻게 배우가 절제해야 하느냐 그게 배우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죠.”


평생 연기할 수 있는 비결, 낫 오케이!

어느 드라마를 할 때의 일이었다. 단지 외울 뿐? 연기라곤 할 수 없는 어린 후배의 대사가 끝나고 떨어진 감독의 싸인, 오케이.

“낫 오케이! 이게 어떻게 오케이야. 아무리 쪽 대본이어도 그렇지. 네 일생에 일어난 엄청난 사건을 내가 얘기했는데 어떻게 날 쳐다보지도 않아. 그건 본능이야. 네 연기에 대한 설명을 해봐.”

쩌렁쩌렁한 대선배의 울림에 그 때 그 어린 상대 배우는 몹시 주눅 들지 않았을까 싶을만한 지적이다.

“우리 때는 그런 걸 연습과정부터 다 지적을 한다고. 하지만 요즘엔 그런 연습과정이 없어졌어. 연기를 평생 할 수 있었던 조건이 ‘다시, 다시’라고.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 김창숙 다 그렇게 배운 배우야.”

잠깐의 미모만으로 연기를 평생 할 순 없으므로. 지금 활약하고 있는 노년의 대배우들이 음성만으로도 화면을 압도하는 비결인 셈이다.

“그렇다고 무서운 선배는 아냐. 싹수 있는 후배들한텐 다정하게 가르치지.”

이 대목에서 기자는 반성했다. 기껏 머리나 꽁 쥐어박으며 기사를 고쳐주던 카리스마 절대 부족의 선배였음을.


국민 아버지라는 말이 갖는 무게감

그가 맡은 아버지 역할만 따져도... 못 세겠다. 누군가는 ‘대발이 아버지’로, 또 누군가는 ‘야동 순재’로, 혹은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무뚝뚝한 로맨티스트 만석이로. 그가 만든 다양한 아버지상은 언제나 고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킨다.

“관객이 봤을 때 차이를 못 느낄지 몰라도 나로선 전작과 다른 역을 하려고 해요. 가장 떴던 이미지인 대발이 아버지역과 비슷한 걸 해본 적이 없단 말이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역할의 이름으로 기억되길 거부하는 노장. 그는 한 작품으로 떴다 시시한 역만 맡게 되고 그러다 좌절하는 경우를 숱하게 봐왔다.

“어느 한 작품을 통해 부각된 자신의 고정적인 이미지를 앞세우다보면 역할에 변화가 없게 된다고. 젊었을 때 영화촬영을 하다가 대감독과 충돌한 적이 있었는데 처음 촬영할 때 나한테 개성이 없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오늘부터 이 역할에 맞게 개성을 창조해야 하는 거 아니겠냐’고 했지. 그랬더니 감독이 무슨 소리냐고 하더라고. 그래서 ‘이미지가 굳어지면 거기에 변화가 있을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배우의 캐릭터라는 것은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 노란색, 빨간색, 파랑색 위에 다른 색을 입히려고 하면 표현하고자 하는 색이 나오질 않는다, 백지상태에서 색을 입히는 게 배우의 개성의 조건 아니냐’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나를 다시 쳐다보더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창조한 아버지에 시대를 투영하거나 소외된 아버지들을 새삼 응원한다.


만석은 배우의 힘

물론 훌륭한 공연의 객석은 늘 가득 찬다. 인터뷰를 마치고 한 시간여 남은 공연을 보기로 한 기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남주민들이 몽땅 왔는지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들이 이미 로비를 점령한 상태. 물론 이날은 성남시민을 위한 특별공연이라 티켓 값이 저렴했지만 무료 공연도 많은 요즘, 주말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온다는 건 역시 배우의 티켓 파워다.

“지방에서도 공연을 할 때 관객이 여기에도 많이 올까 했지만 다 차더라고. 지방도 예전과는 달라졌어요. 이 연극은 관객들이 보시면 아마 공감을 많이 하실 거예요. 어제는 비가 왔는데도 1400석이 가득 차서 3층까지 받았을 정도니까.”

기자 역시 좌석이 없어 2층 꼭대기에서 무대 위 세일즈맨 ‘장재민’을 지켜봤다.


신인 배우들에겐 다음 작품에서 어떤 새로운 연기변신을 할지를 기대한다. 그런데 이순재 선생에게도 그렇다. 자주 아버지 역을 맡아도 다 같은 아버지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언젠간 해보고 싶다는 노인들의 삶과 사랑을 그린 시트콤. 또 한 번 화제를 몰고 올 이순재 표 시트콤이 탄생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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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예진

일로 사람을 만나고 현장을 쏘다닌 지 벌써 15년.
취미는 일탈, 특기는 일탈을 일로 승화하기.
어떻게하면 인디밴드들과 친해질까 궁리하던 중 만난 < 이예진의 Stage Story >
그래서 오늘도 수다 떨러 간다. 꽃무늬 원피스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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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아버지]
    • 부제: 연극 [아버지]
    • 장르: 연극
    • 장소: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
    • 등급: 만 13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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