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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맛보다 카페 풍경이 더 마음에 들었나 보다”

다정한 상점들의 거리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작은 가게 위를 흐른다 “당신이 즐거운 삶은 원한다면 ‘오블라디 오블라다’를 외쳐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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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어쩌면 좋든 싫든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신만의 리듬으로 즐겁게 허송세월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나름 ‘범생이’로 잠깐의 쉼도 없이 제도권 안에서의 전형적인 삶만 살아온 나에겐 마음 놓고 자책하지 않고 쉬는 일이 참 힘들었다. 진료실을 찾아오는 환자들에겐 늘 강조하는, 남의 시선이나 내면의 강박에서 자유로운 삶. 잠시 어깨에 힘을 풀고, 재킷을 벗고 쉬어가는 일이 말이다.



가령 배경 음악이 흐리지 않는 분위기 좋고 널찍한 찻집을 몇 군데 확보해 두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북적대는 사람들로 시끌시끌한 데를 돌아다니느라 짜증이 나곤 할 때, 이런 오아시스 같은 찻집에 찾아와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노라면, 뒤엉킨 실꾸러미 같던 머리가 한 올 한 올 조용히 풀려감을 느낄 수 있다. …(중략)…
길거리를 지나다가 문득 책이 읽고 싶어졌을 때는, 뭐니뭐니해도 오후의 레스토랑이 최고이다. 조용하고, 밝고, 손님이 들끓지 않고, 푹신한 의자가 있는 레스토랑을 한 군데 확보해 둔다. 포도주와 가벼운 전채만 주문해도 웨이트리스가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 친절한 가게가 좋다. 거리에 나가 시간이 남으면 책방에서 책을 한 권 사가지고 그 레스토랑에 들어가 백포도주를 찔끔찔끔 마시며 페이지를 넘긴다. 그러면 아주 호사스럽고 한가로운 기분이 든다. 체홉을 읽는다면, 무척 어울리는 풍경이 될 듯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3: 랑겔한스섬의 오후』(무라카미 하루키 저, 백암) 중
「레스토랑에서 책 읽기」
편안하게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는 가게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친구와 마주앉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인생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가게.

20대 초반은 학교와 학교 앞에서 살았다. 빡빡한 시간표였지만 단대 노래패였던 나는 짬이 날 때마다 노래패실에서 키보드 연습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집기장을 쓰고 숙제를 하며 보냈다. 가끔 선배나 동기들이 들어와 기타를 퉁기거나 수다를 떨기도 했고 내키면 여럿이 돈을 모아 치킨이나 피자를 시켜먹기도 했다. 노래패실은 춥고 악기와 악보와 공연소품들로 정신없었지만, 편안했고 사람들의 얘기가 있었고 적당히 외로웠다.

20대 후반엔 그냥 병원에서 살았다. 꼭 필요해서 쇼핑을 하거나, 학창시절 친구들을 만나러 학교 앞에 가거나, 회식을 위해 나가는 일이 외출의 전부였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30대. 회식을 위한 고깃집과 횟집, 최신가요가 나오는 30인 이상 단체가능 호프집, 교수님 접대를 위한 일식집, 어려운 만남을 위한 호텔 커피숍, 병원 안에 있는 스타벅스만 아는 인생은 뭔가 너무 무미건조했다.

그래서 작은 가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체인점이 아니고, 너무 크거나 화려하지 않고, 주인이나 일하는 사람의 색깔이 은은히 드러나는 곳들을.

작은 가게를 좋아하고 찾아다니는 마음에는 어쩌면 허영도 섞여있다. 화려하진 않아도 나만의 이야기, 나만의 멋, 분위기가 중요한 삶.

나는 이런 호사가 좋으면서도 쉽게 익숙하거나 편해지지 않았다. 아마 그런 유유자적한 삶을 본 적이 없어서인 것 같다. 내가 존경하는 부모님이나 선생님, 친척들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누군가의 배우자이자 부모였고, 너무나도 열심히 총총총총 살고 있었다. 자기를 위해 돈을 쓰고 시간을 갖는 일은 책에서나 본 이야기였다.

게다가 뭔가 그런 삶은 치열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단골찻집이 있다고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멋진 책을 줄줄이 써내거나 인생의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가끔 틈이 날 때 작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도 왠지 자신에게 변명을 늘어놓곤 했다.

“아니, 난 글을 써야 하니까...... 시끄러우면 싫으니까.” 등등. 그런 곳에서 차를 마시고 글을 끄적이다가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누군가 “먹고 살기 힘들고 종일 엉덩이 땅에 못붙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넌 참 팔자 좋구나.”라고 등짝을 후려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적십자 마크와 같은 거지. 누구도 커피숍을 폭격하지는 않잖아.” 작고 오래된 마을에 거대한 간판을 건 커피숍이 있다. 오늘도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곳에는 커피적인 평화가 있고, 따뜻하고 맛있는 커피가 있다.
『소울메이트』(무라카미 하루키, 세시)
인생이라는 것이 가끔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어떤 주제에 대해 고민 중인데 그와 관련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날 때가 있다.

얼마 전 『카페 제리코』
라는 책의 출판기념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한때 함께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고 작은 음악회를 열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없는 그 작은 가게를 떠올리며 웃고 눈물짓는 자리였다. 그 가게에서 시간을 보냈던 음악가, 아기 엄마, 친구들이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한 공간이었는지를 수줍게 고백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까지 행복하고 찡하게 했다.

또 우연찮게 경복궁과 낙성대의 골목길에 있는 작은 바 두 군데에 가보게 되었다. 술은 대체로 5명 이상의 학연으로 얽힌 사람들과, 시끄럽게, 마구 , 또는 긴장하고 접대하며 마셔온 나에게 그것은 정말 새롭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내키면 가벼운 독서도 할 수 있는 차분하면서도 흥겨운 분위기에서, 장소를 즐기고 술과 날씨를 음미하는 가게의 사람들은 인상적이었다. 작은 가게의 단골과 이웃들은 서로 간섭하거나 참견하지 않지만 따뜻한, 새롭고 헐렁한 관계를 만드는 것 같았다.

와, 이런 곳이 진짜 있구나.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사람들이 오니기리와 시나몬롤을 사이에 두고 느꼈던 같이 있되 자유롭고 혼자인 그 느낌을 실제로 느낄 수 있구나.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아, 나는 그동안 혼자이면서 함께일 수 있는, 나의 새로운 노래패실을 찾고 있었구나.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런 공간과 사람들을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구나.

인생은 어쩌면 좋든 싫든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신만의 리듬으로 즐겁게 허송세월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나름 ‘범생이’로 잠깐의 쉼도 없이 제도권 안에서의 전형적인 삶만 살아온 나에겐 마음 놓고 자책하지 않고 쉬는 일이 참 힘들었다. 진료실을 찾아오는 환자들에겐 늘 강조하는, 남의 시선이나 내면의 강박에서 자유로운 삶. 잠시 어깨에 힘을 풀고, 재킷을 벗고 쉬어가는 일이 말이다. 나에게 작은 가게란, 쫓기지 않고 마음과 시간을 흥성흥성 써재끼며 함께 앉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곳이다. 그렇게 120% 효율적으로, 완벽하고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슬그머니 말해주는 곳이다.

자기 리듬대로 살아가는 주인과 사람들이 머무는 가게들은 지나친 효율에 잠식당한 우리의 삶을 은근한 방식으로 위로해준다. 어쩌면, 작은 가게가 도시의 삶을 구원할 것이다. 오블라디 오블라다.



Ob-la-di, Ob-la-da life goes on bra, La-la how the life goes on.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흘러가고, 우리 삶도 흘러가지요.
And if you want some fun-take Ob-la-di, Ob-la-da.
당신이 즐거운 삶은 원한다면 ‘오블라디 오블라다’를 외쳐보세요.

-비틀즈, 「오블라디 오블라다」





거기에는 언제나 커피 잔의 친밀한 온기가 있었고, 소녀들의 상냥한 향기가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커피의 맛 그 자체 보단 커피가 있는 풍경 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무라카미 하루키, 「커피가 있는 풍경」




함께 읽으면 좋을 책

[ 카페 제리코 ]
[ 해 뜨는 나라의… ]
[ 4월의 어느 맑은… ]
[ 채소의 기분… ]

함께 보면 좋을 영화

[ 카모메 식당 ]
[ 바그다드 카페 ]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

이한철 <흘러간다>
비틀즈 <오블라디 오블라다>
이랑 <너의 리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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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미녀정신과의사

늘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한, 밝고 다정한 정신과의사 안주연입니다. 우울증과 불안증, 중독을 주로 보고 삶, 사랑, 가족에 관심이 많아요. 책읽기와 글쓰기, 고양이와 듀공을 좋아합니다. http://twitter.com/mind_man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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