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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만 갇혀도 모두 미쳐버리는 초현실주의 감옥 - 『토로스&토르소』

초현실주의와 살인의 상관 관계? 누군가를 범죄자로 만드는 것은, 영화나 만화가 아니라 현실의 어떤 부조리와 폭력이다. 혹은 본성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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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 맥도널드는 소설과 영화로도 널리 알려진 엘리자베스 쇼트 살인사건 즉 ‘블랙 달리아’에서 출발했다. 마크 닐슨과 세라 허드슨 베일리스가 쓴 『초현실주의와 블랙 달리아 살인 사건』이란 책이 말했듯, 20세기 중반 등장한 초현실주의 미학 이론은 예술만이 아니라 범죄에도 꽤나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크레이그 맥도널드는 그 점에 착안하여…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감옥 바깥으로 이송된 한니발 렉터는 순식간에 간수들을 제압한다. 간수를 공중에 마치 예수처럼 매달아놓고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작품을 감상한다. 한니발 렉터의 영향을 받은 연쇄살인마 버팔로 빌도 비슷하다. 여성이 되고 싶어, 여성을 납치하여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드는 그에게 살인은,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완성시키는 수단이 된다. 그들에게 살인은, 일종의 예술적 행위다. 크레이그 맥도널드가 『토로스&토르소』에서 인용한 말들에 따르면 이런 것이다.

세상 모든 일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살인은 도덕적 관념으로 볼 수도 있으나…고백하건대 이는 약한 쪽이고 다른 하나 독일인들이 흔히 ‘좋은 취향’이라고 표현하는 미학적 관점에서 볼 수 있다. - 토머스 드 퀸시

살인을 미학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면, 살인자는 예술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를 하는 대신 파괴를 반복하는 반 예술가적인 퍼포먼스를 하는 행위예술가 말이다 - 조엘 블랙


크레이그 맥도널드는 소설과 영화로도 널리 알려진 엘리자베스 쇼트 살인사건 즉 ‘블랙 달리아’에서 출발했다. 마크 닐슨과 세라 허드슨 베일리스가 쓴 『초현실주의와 블랙 달리아 살인 사건』이란 책이 말했듯, 20세기 중반 등장한 초현실주의 미학 이론은 예술만이 아니라 범죄에도 꽤나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크레이그 맥도널드는 그 점에 착안하여 ‘쇼트의 살인사건과 세계대전 후의 할리우드 예술가 그룹, 뿐만 아니라 초현실주의 미술이 계몽적인 역할을 했던 스페인 내전까지 연결된 몇 십년의 세월 동안 계속되는’ 사건들을 그려낸 『토로스&토르소』를 썼다.

『토로스&토르소』의 주인공은 범죄소설가인 헥터 라시터.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절친이기도 한 헥터는 ‘자신의 소설 같은 인생을 사는 남자’로 유명하다. 그가 창작한 소설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범죄가 끊이지 않고,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기자 출신인 크레이그 맥도널드는 방대한 자료를 활용하여, 초현실주의에 매료된 예술가 혹은 범죄자들이 펼치는 유장한 범죄의 역사에 헥터를 밀어 넣는다. 헥터는 가공의 인물이지만 헤밍웨이, 존 휴스턴, 오손 웰즈 등 실제 인물들 사이에 배치된 헥터는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그들을 압도하며 움직인다.

1935년, 폭풍이 밀어닥치는 키 웨스트에서 헥터는 레이첼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날 저녁, 내장이 모두 제거되고 기계 부품들을 가득 채운 여성의 시체가 발견된다. 폭풍으로 엉망진창이 된 폐허에서 헤밍웨이와 함께 구호작업을 벌이던 헥터는 또 다른 시체들을 발견한다. 역시 초현실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듯 기괴하게 변형된 시체들. 그리고 헥터는 레이첼마저 살인마의 제물이 된 것을 알게 된다.

2년 후, 헤밍웨이를 찾아 내전 중인 스페인을 찾은 헥터는 레이첼과 꼭 닮은 동생 알바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고, 1947년 헥터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벌이는 기괴한 파티에 대해 알게 된다. 『토로스&토르소』는 1935년부터 1959년까지, 25년 동안 벌어지는 기이한 만남과 사건들을 질주한다.

『토로스&토르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초현실주의다. 초현실주의의 이념이나 작품에 대해 전혀 모른다면, 그들이 왜 그런 ‘살인’을 했는지 모호할 수밖에 없다. 르네 마그리트의 <경이의 시대>, 살바도르 달리의 <르 로제 상글란테>는 『토로스&토르소』에서 살해된 여성의 몸을 변형시키는 원본이 된다. 사진작가 만 레이의 <미노타우로스>는 검은색 바탕을 배경으로 한 여자의 누드 상반신인데, 머리는 그림자 속에 가려 보이지 않고, 팔은 마치 황소의 뿔처럼 들려 있는 모양이다. 미노타우로스의 이미지는 『토로스&토르소』에서 반복되어 사용된다. 초현실주의에 공감 혹은 중독된 이들은 현실과 꿈의 경계를 지워버리기 위해 살인을 이용한다. 혹은 초월하기 위하여.

물론 초현실주의에 중독된 모든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들의 뭔가 뒤틀린 내면이 그들을 더욱 더 어두운 욕망으로 이끈다. 레이첼의 아버지는, 아내가 죽은 후 어린 레이첼의 누드사진을 찍고 근친상간을 한다. 그건 결코 초현실주의 때문이 아니다. 생각해 보자. 흉악범죄가 나올 때마다 매스미디어는 만화, 영화, 게임 등에서 범죄의 근원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수십만 수백만이 영화를 보았는데, 특정인만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는 그저 핑계거리이고,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를 범죄자로 만드는 것은, 영화나 만화가 아니라 현실의 어떤 부조리와 폭력이다. 혹은 본성이거나.

그렇다면 『토로스&토르소』의 초현실주의자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무엇일까?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크레이그 맥도널드는 『토로스&토르소』를 쓰기 위해 자료를 찾다가 스페인 내전 당시 초현실주의자들이 고안한 감방의 디자인에 대한 보고서를 읽게 되었다. 마치 예셔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기울어진 침대와 의자, 벽돌과 기하학적인 블록이 쌓인 바닥. 패턴과 무늬, 나선과 착시현상의 요소들로 가득한 둥근 벽, 낮밤으로 깜빡이는 불빛 등등. 그 감옥에 이틀만 있어도 제정신인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그 감옥은 지금 미군의 아부 그레이브 같은 곳에서 재연된다. 때로 신념은, 인간을 광기로 밀어 넣는다.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는 어떤 폭력과 희생도 용납할 수 있다는 광기로. 문제는 사상 자체가 아니라, 집착하고 절대화하는 개인에게 있는 것이다.

『토로스&토르소』는 실제 인물과 사건들을 절묘하게 픽션과 뒤섞어버린다. 헥터가 정말 헤밍웨이의 절친이었고, 그들 간의 애증이 무엇이었는지 절감하게 할 정도로. 하지만 그런 기교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헥터와 레이첼의 끈질긴 운명의 끈이다. 『토로스&토르소』에서 투우는 미노타우로스의 이미지인 동시에, 헥터와 레이첼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상징으로 반복된다. 헤밍웨이는 말한다. ‘투우는 예술가 자신이 죽음의 위협에 처하는 유일한 예술이며, 퍼포먼스의 탁월함이 투사의 명예로 치환되는 유일한 공연이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일 필요가 있다. 합법적인. 불법 아니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의미를 포함한다면 ‘살인’ 역시 투우와 동등해질 수 있다. 초현실주의에 경도된 혹은 자신의 내면을 살인을 통해 정화할 수밖에 없는 그들은, 살인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려 할 테니까. 또한 투우에는 케렌시아란 용어가 있다. 투우장 안에서 황소가 편안함을 느끼는 장소인데, 황소는 자꾸만 그 지점으로 돌아와 결국 투우사에게 죽는다. 죽음과 편안함이 공존하는 곳. 헥터와 레이첼에게는 서로가 케렌시아였다.

현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직조한 『토로스&토르소』는 실존인물과 작품들을 계속 등장시키면서도 경쾌하고 빠르게 읽힌다. 미술전문가가 아닌 탓에 『토로스&토르소』가 초현실주의 미술에 대해 얼마나 정확하게 ‘증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작품 안에서는 탁월하게 기능한다. 헥터 라시터라는 매력적인 주인공과 함께. 역사적 인물, 사건을 다룬 범죄소설 중에서 『토로스&토르소』는 단연 발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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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로스&토르소 크레이그 맥도널드 저/황규영 역 | 북폴리오
『토로스&토르소』는 에드가상과 앤서니상 / 검슈상 등 미국의 대표적인 추리문학상의 주목을 받으며 저널리스트에서 소설가로 신고식을 마친 작가 크레이그 맥도널드의 국내 첫 번째 출간작이다. 소설가로는 제임스 엘로이와 잭 케루악, 영화감독으로는 코엔 형제와 쿠엔틴 타란티노와 같은 대표적인 하드보일드 예술가들을 섞어 놓은 듯하다는 극찬을 얻어낸 작품이다. 『Head Game』『Print the Legend』『One True Sentence』『Forever is just Pretend』와 함께 범죄소설가 헥터 라시터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 중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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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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