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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비웃는 도쿄 연쇄 살인사건, 손가락만 잘라가… - 누쿠이 도쿠로 『후회와 진실의 빛』

정의와 불의, 그 희미한 경계 사이 “빛이 환할수록 그림자가 짙듯 정의가 있는 곳에 악의가 숨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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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젊은 여자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손가락 하나를 잘라가는 엽기적인 범죄가 발생한다. 경시청의 형사 사이조, 기동수사대의 와타비키, 첫 번째 범죄 현장을 발견한 경찰 오사키 등이 합동수사본부에 배치되어 수사를 시작한다. 범인은 경찰을 비웃듯이 인터넷에 범행예고를 올리고, 수사본부의 허를 찌르며 계속해서 범행을 성공시킨다. 범인은 스스로 붙인 ‘손가락 수집가’라는 별명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의를 수호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고등학교 때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을 읽고 미스터리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누쿠이는 게임에 능한 작가다. 누쿠이 도쿠로는 치밀한 복선을 세세하게 깔아두고 독자가 수수께끼를 따라오도록 치밀하게 유도한다. 데뷔작인 『통곡』은 아이들이 유괴, 살해되는 사건을 중심으로, 두 개의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진행한다. 두 이야기가 대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 독자는 짜릿한 희열을 느낀다. 두 개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했던 지점이 어디였는지, 은유적으로 혹은 모호하게 묘사되었던 부분들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되는 즐거움. 머릿속의 희미한 조각들이 서로 맞춰지면서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냈을 때의 환희 같은 것.






하지만 누쿠이 도쿠로를 단지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라고만 하기에는 아쉽다. 『통곡』이 실제로 벌어졌던 미야자키 쓰토무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처럼, 누쿠이는 단지 트릭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회’를 이야기 속에 적극적으로 끌어이는 작가다. 『우행록』은 완벽해보였던 중산층 일가족이 살해당한 사건을 통해 현대 사회의 거짓과 위선을 낱낱이 드러낸다. 피해자들의 어리석은 행동, 그들을 비웃는 지인들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사건을 접하는 대중의 말초적인 시선까지, 누쿠이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는다. 어쩌면 범죄라는 것은, 이 사회의 총체적인 어리석음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니까. 『살인 증후군』 『실종 증후군』 등 ‘증후군’ 시리즈에서도 누쿠이는 사회파적인 시선을 견지한다. 누쿠이 도쿠로는 신본격과 사회파의 장점들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작가인 것이다.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받은 『후회와 진실의 빛』은 그러한 누쿠이 도쿠로의 장점들이 최고조에 다다른 듯한 기분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도쿄에서 젊은 여자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손가락 하나를 잘라가는 엽기적인 범죄가 발생한다. 경시청의 형사 사이조, 기동수사대의 와타비키, 첫 번째 범죄 현장을 발견한 경찰 오사키 등이 합동수사본부에 배치되어 수사를 시작한다. 범인은 경찰을 비웃듯이 인터넷에 범행예고를 올리고, 수사본부의 허를 찌르며 계속해서 범행을 성공시킨다. 범인은 스스로 붙인 ‘손가락 수집가’라는 별명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의를 수호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누쿠이 도쿠로는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 형사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경시청에서 합류한 수사 1과 9계의 형사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육체 능력은 떨어지지만 한 번 본 사람은 절대 잊지 않는 가나모리, 언제나 싹싹하고 까불까불하지만 모든 것을 계산하고 있는 미쓰이, 오타쿠처럼 이것저것 파고들지만 모든 정보를 예리하게 분석하는 톰 등등. 주인공인 사이조는 지나칠 정도로 원칙적이고 합리적이라 마찰도 잦지만, 탁월한 감 덕분에 ‘명탐정’이라고 불리는 형사다. 그리고 한때 사이조와 함께 근무하면서, 그를 질투하게 된 와타비키. 누쿠이 도쿠로는 공들여 그들을 하나하나 묘사한다. 사이조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그의 동선만을 따라가지 않는다.

『후회와 진실의 빛』은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는 이야기가 중심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야기는 사이조라는 한 남자의 전락이다. 사이조는 차가운 남자다. 공을 세우기 위해서, 출세하기 위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과 잘 지내면서 행복하게 사는 걸 원하지도 않는다. 사건을 해결하는 것. 그것만이 사이조의 목적이다. 어린 시절부터 사이조는 원칙에 맞지 않는 것, 불합리한 것에는 결코 굽히지 않았다. 경찰이 된 것도 그런 이유다. 뛰어난 감각과 논리로 사건들을 해결한 사이조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누구나 질투하고, 서먹해 하면서도 사이조의 실력만은 인정했다. 사이조도 그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어긋나버렸다. 자신의 결혼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내와 멀어지면서 불륜에도 빠졌다. 단순한 불륜이 아니라, 사이조의 가슴에 뚫린 구멍을 그 여자는 너무나 다정하게 메워주었다. 그것은 사이조의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남자의 야비함을 여자가 허용함으로써 성립되는 관계. 자신의 신조와는 어긋나는 삶.’ 그렇게 서서히 사이조의 삶은 허물어지고 있었다. 『후회와 진실의 빛』은 ‘손가락 수집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순식간에 사이조가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때로는 측은하게 때로는 차갑게 지켜본다. 사이조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것은 결코 그의 악의 때문이 아니었다.

와타비키는 사이조를 미워했다. 가족을 돌보기 위해서 치열하게 일했지만, 아내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아들은 장애인이 되었다. 가정을 잘 돌보지 못한 자신 때문에 사고가 일어났다고 자책한다. 와타비키가 본 사이조는 너무 쉽게 사건을 해결하고, 공을 가져간다. 그래서 질투한다. ‘일에 파묻혀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자야 어디에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그 탓에 결코 지울 수 없는 회한을 품게 된 인간은 과연 몇이나 될까. 이런 고통을 짊어지면서까지 직무에 긍지를 가져 온 내가, 단지 운이 좋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보다 성적이 떨어지다니.

누쿠이 도쿠로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조롱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때로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부질없는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너무나도 냉철하고 명석했던 사이조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너무나 절실한 일들 때문에 추락한다. 와타비키는 자신의 질투가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미쓰이도, 톰도 다 그들 안의 세계에서 때로 분노하고 자책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그들도, 어느 한 순간의 선택을 잘못했다면 ‘손가락 수집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빛과 어둠, 선행과 악행의 경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희미하고 허약한 것일지도 모른다.

『후회와 진실의 빛』은 어둡다. 손가락 수집가의 어리석은 악행보다는 사이조의 추락 때문이다. 그 남자의 절망과 고통 그리고 후회를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처절하다. 그런데 궁금하다. 그 남자, 사이조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누쿠이 도쿠로가 사이조를 주인공으로 하는 하드보일드 소설을 연이어 써준다면 정말 읽고 싶다. 추락하기 전의 사이조는 그리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었지만, 그 모든 상처와 고통을 짊어진 사이조에게는 한없이 끌린다. 그 어둠 아니 그 상처와 흉터들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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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와 진실의 빛 누쿠이 도쿠로 저/이기웅 역 | 비채

《통곡》과 《우행록》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 내면의 어두운 본성을 더욱 세밀하게 묘파해 ‘사회파 미스터리 대표작가’로서 입지를 굳힌 누쿠이 도쿠로의 신작. 인적이 드문 밤의 주택가, 희생자의 집게손가락이 사라지는 살인사건이 잇따라 발생한다. 일본 열도는 충격에 휩싸이고 범인은 세상을 비웃듯 또 한번의 예고를 던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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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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