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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처럼 창조하고, 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하라” - 건축가 승효상

기억의 한 공간을 차지한 외할머니의 김치죽 내가 삶을 바꾸고 삶을 개혁한다 “신처럼 창조하고, 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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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허물지 말고 다음 세대에 이어주는 게 지속가능한 건축의 핵심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없으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을 수가 없죠. 음식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게 섭생에 관한 문제인데, 기억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섭취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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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삶을 짓는 것이지요. 하이데거가 그랬던가요. 우리는 거주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고, 거주는 건축을 통해서 이뤄진다고요. 건축이라는 건 삶의 존재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삶이 스며든 건축에는 기억도 깃들겠고요.

제 기억이 깃든 집, 기억의 자궁에 웅크리고 있는 집은 부산에 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부산에 있었고, 지금은 제 가슴에 있죠. 부모님이 원래 평안북도 분이세요. 같은 마을에 살다 6?25가 터지면서 월남을 하셨죠. 부산에 정착하시고 제가 태어난 곳이 피난민 8가구가 모여 사는 집이었어요. 지금 식으로 얘기하면 연립주택 비슷한데, 판잣집이었죠. 가운데에 아주 길고 깊은 마당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집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해요. 세 살 때 제 동생이 태어났는데, 어머니를 동생한테 뺏기고는 내내 칭얼댔나봐요. 결국 저는 누님 등에 업혀 마당으로 쫓겨났죠. 누님이 저를 업고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어린 제 눈에 사진처럼 그림처럼 새겨진 게 그 마당입니다.

8가구가 마당은 물론이고 화장실과 우물을 같이 썼어요. 아침마다 화장실 앞에 긴 줄이 생겨서 북새통이었죠. 밖에서는 빨리 나오라고 두드리고 안에서는 볼일 좀 보자고 항의하고요. 혹시나 잔치라도 있으면 평상을 깔고 다 같이 모여 앉아서 시끌벅적하던 장면이 머리에, 가슴에 박혀 있어요. 바로 그 집, 그 장소가 저의 건축이 돌아가야 할 귀소본능이 숨 쉬는 곳입니다.

그 집을 한동안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스승이신 김수근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후 전 독립해서 스터디 그룹을 하나 만들었어요. 15년 넘도록 선생님 밑에서 ‘김수근 건축’만 하다가 ‘승효상 건축’을 해야 했는데, 참 막막했지요. 학연, 지연 다 떠나서 비슷한 연배끼리 매월 한 번씩 모여서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어요. 토론하고 고민하는 와중에 ‘나’를 차츰 깨닫기 시작했어요. 유독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어릴 때 자란 피란집이었어요. 어느 달동네를 지나가는데 공간 구조가 기억 속 피란집과 너무나 흡사했어요. 공동체를 이룬 지혜가 촘촘하게 공간적으로 완성돼 있었어요. 이게 내가 해야 될 건축이다, 결심하고 제가 선보인 게 ‘빈자(貧者)의 미학’입니다. 그게 지금까지 제 건축의 바탕이지요.

마치 소명처럼, 사명처럼, 건축으로 기억을 살린 적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북한을 나오신 게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오신 거였어요. 독실한 신자이셨기 때문에 저도 어릴 때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랐죠. 엄청난 절제와 검박한 생활을 강조하신 말씀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어요. 그래서 목사가 되려고 했는데 반대하셨어요. 장남이니까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뜻이셨죠. 그러면 화가가 될까 했는데, 그것도 막으셨어요. 옆집에 화가가 하나 살았는데 이혼하고 매일 술 먹고 주정하니 좋은 예가 못 됐죠. 제가 붓 들고 종이 찾으면 말리셨어요. 그거 하면 안 된다고요. 결국 어찌어찌해서 건축과에 가게 됐고, 고향집은 마음에만 묻었죠.

저희 집이 부산 서대신동 산비탈에 있었는데 제가 일곱 살, 그러니까 1959년에 아버지께서 집을 지으셨어요. 담벼락을 공유하던 교회가 구덕교회였습니다. 그 교회 설립에 아버지께서 참여하셨고, 교회 마당은 제 놀이터였죠. 6년 전 즈음에 가족이 함께 부산을 갔어요. 혹시나 해서 찾아가봤는데 놀랍게도 그 집이 고스란히 있는 거예요. 뒷골목이라서 개발이 안 된 거죠. 제가 골목대장 한다고 지나가는 사람 괴롭히고 뛰어놀던 나날이 고스란히 살아오더군요. 어린 저의 무대였으니까요. 실로 감개무량했습니다. 그런데 구덕교회가 마침 설계자를 찾고 있었어요. “아, 이거는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해서 열일을 제쳐놓고 달려들었지요. 건축사 시험에 합격하고 드렸던 기도에서도 구덕교회를 짓게 해달라고 했거든요. 소년의 기억과 청년의 기도가 힘을 합해서 완공한 것이 지금의 교회입니다. 2008년에 완공했어요. 예전 저희 집까지 포함해서 넓혀서 지었는데, 우리 집 기억을 남겨야 할 것 같더라고요. 평면도에 우리 집이 있는 영역을 그대로 살렸어요. 영구적으로 남는 것이지요, 그 기억과 그 기도가요.

우리가 흔히 지속가능한 건축을 얘기하는데, 건축은 본연적으로 반(反)환경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았던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죠. 기억을 허물지 말고 다음 세대에 이어주는 게 지속가능한 건축의 핵심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없으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을 수가 없죠. 음식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게 섭생에 관한 문제인데, 기억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섭취할 수 있겠습니까. 삶의 이야기를 일궈가는 게 음식이니 기억을 빼놓고는 음식을 이야기할 수 없죠. 새로운 음식이라는 것도 자기 기억과 더불어서 비교되는 것이니까 결국 기억의 산물이 음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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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기억의 음식 역시 기억의 공간에서 먹었던 ‘김치죽’입니다. 정말로 자주 먹었죠. 가장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다 보니 먹기도 자주 먹었어요. 김치라야 요즘처럼 화려한 모양이 아니었죠. 시래기에 고춧가루가 전부인 적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참 맛있었어요. 재료는 김치하고 밥만 있으면 됐고, 물 끓여서 밥 넣고 김치 넣고 휘휘 저으면 바로 김치죽이었죠. 시험 공부한다고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것도 김치죽이었고요. 빈에 유학 가서 혼자 살 때 만들어 먹던 것도 김치죽, 런던에서 유학할 때 끓여 먹던 것도 김치죽이었습니다. 제 아내가 지금은 음식을 곧잘 하지만 막 결혼한 무렵에는 밥도 할 줄 몰랐어요. 제가 다 만들어줬죠. 아내에게 한껏 뽐내며 가르쳐준 음식도 역시 김치죽입니다. 나눠 먹고, 자주 먹고, 편하게 먹던 모든 기억이 응집된 음식, 그것이 저의 김치죽인 거죠.

요즘에도 직접 김치죽을 만들어 먹곤 합니다. 멸치 우린 물에 신김치를 쓸 때가 제일 좋아요. 김치는 송송송 썰지 말고 있는 그대로 투하하고, 가래떡이 있으면 살짝 넣기도 하고요. 제가 하면 다들 맛있다고 해요. 음식을 따로 배운 적은 없어요. 하지만 맛을 딱 보면 어떻게 간을 했고 소스가 뭔지 맞힐 수가 있어요. 배후의 구조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역시 건축과 마찬가지라고 보시면 됩니다. 보통 사람은 건축을 보면 건물로서만 인식하지만, 건축가의 머리에서는 평면도가 펼쳐지는 것이죠. 반대로 평면도를 보면 실제 건물을 상상할 수가 있어야 하고요. 아마 요리사의 머리에서도 맛의 평면도가 수시로 그려졌다 지워지겠지요.

건축하는 후배들은 물론이고 요리사, 화가 등 창조하는 고통을 선택한 젊은이들에게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 얘기를 해주고 싶네요. 브랑쿠시는 무척이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 고향을 떠나서 천신만고 끝에 파리에 갔지요. 간신히 친구의 도움으로 작은 아틀리에를 얻었는데, 거기 들어간 첫날, 벽에 선언하듯 써 붙인 글귀가 압권입니다. “너는 신처럼 창조하고, 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하라.” 아, 이 말이 너무너무 근사하지 않습니까. 제 가슴에 선연한 빛줄기처럼 와서 꽂힌 말입니다. 자신의 창조적 재능에 관해서 믿고,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존감을 잃지 말고 왕처럼 절대 굴하지 말라는 것이며, 작업을 할 때는 노예처럼 성실하게 하라는 것이죠.

일단 자기 재능을 믿어야 합니다. 재능이 있다는 걸 믿어야 신처럼 창조도 하게 되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건 자존심에 관한 이야기일 겁니다. 저는 건축이 우리 삶을 바꾼다고 믿는 사람이거든요. 건축을 통해서 삶을 바꿀 수 있고, 나아가 삶을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처럼 위대한 직능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믿으니 이 일 자체가 저의 의지를 북돋워주고,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단단히 서게 하는 거죠.

저는 일부러 불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불편하니까 궁리하겠죠. 불편함을 타개할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고, 사유하게 되는 겁니다. 불편함으로써 오히려 삶의 여유를 줄 수 있어요. 방과 방 사이를 떨어뜨리면 걸어가야 하는 불편함이 생기지만 걸어 다니면서 안 보던 바깥 경치도 보고 그러면서 사유의 여지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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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좋아하는데, 요새는 건축 보러 안 다닙니다. 건축보다는 대개 풍경을 보러 다니죠. 설계하는 것도 건축물 설계한다고 하지 않고 풍경 설계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건축도 풍경의 일부가 되는 설계를 하는 것이죠. 기억이 깃들고 사유가 살아 있는 삶을 위해, 건축을 통한 저의 혁명은 계속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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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다, 내 인생 신정선 저 | 예담

맛은 추억이고, 위로이다. 맛있는 먹을거리가 풍성해진 요즘에도 사람들은 어릴 적 먹던 거칠고 투박한 음식을 기어이 찾아다니며 먹는다. 추억을 음미하고,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서이다. 이 책은 이순재 신경숙 이승철 에드워드권 김대우 윤대녕 패티김 배병우 김수영 황주리 강수진 박찬일 이원복 하성란 이지나 배한성 서상호 이진우 진태옥 문훈숙 이왈종 장석주 조태권 이희 승효상 전무송 정끝별 안효주 김윤영 조은과 같은 이 시대 최고의 명사들과 함께 한 끼 식사를 나누며, 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간절한 맛의 기억을 함께 음미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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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정선

1974년 3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언어학과를 어렵게 입학해 간신히 졸업했다. 2001년 8월 수습 41기로 조선일보에 입사해 날마다 책상에 머리를 찧으며 기사를 쓴다. 2011년 12월 현재 문화부에서 공연을 담당한다.

맛있다, 내 인생

<신정선> 저12,510원(10% + 5%)

추억으로 맛을 내고, 그리움으로 차려낸 생애 잊을 수 없는 맛 맛은 추억이고, 위로이다. 맛있는 먹을거리가 풍성해진 요즘에도 사람들은 어릴 적 먹던 거칠고 투박한 음식을 기어이 찾아다니며 먹는다. 추억을 음미하고,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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