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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소탕을 위해 마약을 용인한 미국과 CIA -『개의 힘』

무엇이 그를 ‘개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게 했는가… 미국과 멕시코, 쫓고 쫓기는 두 나라의 마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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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윈슬로우는 실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개의 힘』에 그럴듯하게 옮겨놓는다. 1988년 멕시코 제도혁명당 선거 조작 의혹과 콜롬비아의 대통령 후보 루이스 카를로스 갈란과 카를로스 피사로의 암살, 과테말라의 오스카 로메로 신부의 암살 등 실제 사건들을 소설 속에 절묘하게 끼워 넣고, NAFTA 협정을 통해 미국과 마약조직이 어떻게 멕시코에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는지 그리고 마약조직을 이용한 CIA의 비열한 공작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힘에서 구하소서.
- 시편 22장 20절


성경에 나오는 ‘개의 힘’은 아마도 인간의 어두운 본성, 악의 힘 같은 것을 의미한다. 어느 순간 끌려 들어가면 스스로 ‘인간’임을 잃어버리게 하는 그 무엇. 카인이 아벨을 죽이던 그 순간부터, 어쩌면 인간은 늘 ‘개의 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교를 믿건 말건 상관없다. 인간에게 악이란, 태초부터 있었던 본성이다. 단 한 번도 인간은 ‘개의 힘’에서 벗어난 천국을 만들어본 적이 없다. 유토피아, 샹그리라, 율도국 같은 이상향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을 뿐. 그렇다면 인간은 결코 ‘개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한 남자가 있다. 백인 아버지와 멕시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트 켈러. 그는 태생적으로 ‘방황하는 사람, 외로운 사람’이었다. ‘두 문화 속에서 자라 양쪽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지만, 어느 쪽과도 어울리지 못하는 부적응자. 그러나 똑똑하고, 거리에서 막 자랐고, 야망이 있는 사람....아버지라는 존재를 다소 용납하지 못하는 사고방식도 지니고 있었다. 낙오자의 사고방식이었다.’ 아트 켈러의 영민함을 알아본 이들이 있었고, 그를 CIA로 끌어들인다. 베트남전에서 ‘더러운’ 특수작전들을 수행했던 아트 켈러는 미국으로 돌아와 마약 단속국에 들어간다.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은 아트 켈러가 멕시코의 마약조직을 일소하는 작전에 투입된 1975년에서 시작된다. 마약 단속국의 이단아였던 아트는 권투선수의 매니저인 아단 바레라와 친해지고, 그의 친척인 경찰 티오를 만나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지옥의 파트너쉽이었다. 티오가 건네준 정보로 수많은 성과를 거두고, 최대 조직의 보스까지 잡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티오의 야심은 기존의 조직을 해체시키고 새로운 ‘연합’의 보스로 등극하는 것이다. 멕시코에서 생산되어 미국으로 팔려나가는 아편의 공급은 거의 사라졌지만, ‘연합’은 새롭게 콜롬비아에서 코카인을 공급받아 미국 각지로 넘겼다. 진짜 마약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개의 힘』은 1975년부터 30여 년간 아트 켈러가 벌이는 마약 전쟁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많이 본 것처럼, 마약은 인간을 타락시킨다. 마약 자체가 타락시키는 것도 문제지만, 마약을 둘러싼 범죄조직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아트 켈러는 순수했다. CIA를 그만 둔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마약 조직을 부수는 것은,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을 죽이는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마약 범죄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서 아트 켈러는 엄청난 벽에 부딪치고 만다. 케르베로스, 피닉스, 레드 미스트 등 낯선 이름들을 듣게 된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미국의 특수 작전 명이었다.

미국은 자신들의 앞마당인 중남미에 좌파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베트남에서 패퇴한 기억은 그들을 더욱 과격하게 만들었다. 중남미 각국의 독재 정권과 우파 민병대 그리고 좌파 정권이 들어선 코스타리카의 콘트라 반군에게도 막대한 금전과 무기 지원을 했다. 하지만 엄청난 예산을 확보하기 힘들었던 미국 정부와 CIA는 마약을 활용하기로 결정한다. 마약조직이 미국으로 안전하게 마약을 옮기는 것을 용인하는 대신 돈을 받고, 그 돈으로 ‘좌파 소탕’ 작전을 벌인 것이다. 스티븐 시걸의 <형사 니코>에는 CIA 요원이 마약 조직의 간부가 되어 범죄활동을 벌이고도 처벌받지 않는 모습이 나온다. 『개의 힘』의 살 스카키가 바로 그런 인간이다. CIA 상부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살 스카키는 뉴욕에 위치한 마피아의 간부이면서, 중남미 마약조직의 연락책이고, 필요하면 암살과 테러 작전도 진행하는 초법적인 인물이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쿠바 마이애미 마피아 마약 커넥션이군,’
아트가 눈치챘다. 아트는 그 고리가 다시 이어져 콜롬비아에서 중앙아메리카로, 멕시코로, 미국에 있는 마약 중개상에게로 코카인이 운송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피아가 공급한 무기는 니카라과 반정부세력 콘트라스로 갔다.‘


아트 켈러는 마약 전쟁의 실체를 알게 된다. 단지 마약을 파는 사람들을 찾아내서 잡기만 하면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거물들은 아무리 잡아도 그냥 풀려난다. 멕시코의 정부, 경찰 심지어 대통령까지 마약조직과 관련이 없는 사람은 없다. 아트 켈러는 동료를 고문하고 죽인 아단과 그의 조직을 궤멸시키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들을 잡으려면 CIA의 음모를 폭로해야만 했다. 그래서 아트는 타협을 한다.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 내 보복을 위해 홉스에게 영혼을 팔았을 때부터, 내가 거짓 증언을 하고 은폐했을 때부터, 홉스를 찾아와 아단 바레라를 죽이도록 도와달라고 했을 때부터, 나도 공범이 된 거야.

『개의 힘』을 읽는 일은 참담하다. 그냥 범죄조직의 만행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세계가 어떻게 아수라장이 되어 움직이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CIA의 작전을 통해 미국에 들어온 건 ‘주식중매인들이나 인기여배우들이 흡입할 마약이 아니었다. 크랙으로 만들어 하나에 10달러씩 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팔 마약이었다. 소비자는 대부분 흑인이나 스페인계였다.’ 1985년 멕시코시티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재건 자금을 구할 곳은 단 두 군데뿐이었다. 교황청과 마약조직. 이걸 선과 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똑같았다. 아니 보수적인 교황청은 중남미에 신을 믿지 않는 좌파가 득세하는 것을 싫어했고, 오푸스데이를 중심으로 CIA의 공작에 협력했다. 1993년 마약 조직의 싸움에 희생된 실존 인물 후안 헤수스 포사다스 오캄포 전 추기경을 모델로 한 후안 신부의 암살은 그들의 음모로 그려진다.

돈 윈슬로우는 실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개의 힘』에 그럴듯하게 옮겨놓는다. 1988년 멕시코 제도혁명당 선거 조작 의혹과 콜롬비아의 대통령 후보 루이스 카를로스 갈란과 카를로스 피사로의 암살, 과테말라의 오스카 로메로 신부의 암살 등 실제 사건들을 소설 속에 절묘하게 끼워 넣고, NAFTA 협정을 통해 미국과 마약조직이 어떻게 멕시코에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는지 그리고 마약조직을 이용한 CIA의 비열한 공작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개의 힘』을 읽는 일이 참담한 이유가, 단지 현실이 추악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현실이 암흑이어도 어떤 희망, 인간의 가능성만 보아도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 『개의 힘』은 오히려 악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웅변한다. ‘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슬프다. 아트 켈러는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분명한 진리가 있다. 전쟁에서는 좋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 아트 역시 현실을 잘 알고 있다. 동료인 어니를 위해서 시작한 복수이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무고한’ 이들이 죽어간다. 진짜 악은 여전히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데 ‘개의 힘’이 물어뜯은 이들의 시체가 도처에 즐비하다. 홀로 죽은 자들과 함께 밤을 보내는 아트는, 너무나도 쓸쓸하다. 하지만 결코 개인적인 싸움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상관없어. 신은 자네를 믿거든.”
아트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신은 어리석군요.’


진정으로 어리석은 것은, ‘개의 힘’을 결코 떨쳐내지 못하는 우리일지도 모른다. 돈 윈슬로우는 희망을 완벽하게 포기하지는 않는다. 『개의 힘』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는 아일랜드계의 킬러인 칼란과 고급 매춘부인 노라가 있다. 젊은 시절 단 한 번 노라를 만났다가, 수 십 년 뒤에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된 칼란. 그동안 칼란은 마피아 보스를 죽이고 도망쳤다가 중남미에서 CIA의 비밀작전에 참여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 그녀를 만난 칼란은 실낱같은 희망을 믿는다. ‘어떻게든 그 미녀에게 닿을 수 있었다면 칼란의 삶은 덜 추악해졌으리라’, 라고.

피와 폭력의 역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알고 있다. ‘글쎄 저 세상은 완벽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상당히 부족했다.’ 그러니까 필요한 건 ‘개의 힘’에 사로잡히지 않을 그 무엇이다. 아트의 복수일 수도, 칼란의 사랑일 수도, 노라의 믿음일 수도 있는 그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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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힘 1 돈 윈슬로 저/김경숙 역 | 황금가지

『개의 힘』은 마약 단속반 아트, 마약 조직 보스 아단, 고급 매춘부 노라, 킬러 칼란 등 네 주인공의 피와 배신으로 얼룩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75년 멕시코의 대대적인 마약 농장 소탕 작전에서 시작되어 2003년까지 약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백 명에 이르는 등장인물과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굵직한 역사적 사건 등이 절묘하게 이야기와 어우러져 한 편의 대하 소설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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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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