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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짐승의 길을 선택한 이유 - 『짐승의 길』

나라면… 내가 저들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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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짐승의 길을 착각하여 들어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길이라 생각하고 가다 보면 수풀 밑으로 길이 나 있기도 하고, 진흙탕을 통과할 수도 있다. 사람이 다니기에는 도통 불가능한 험한 길을 만날 수도 있다. 애초에 짐승의 길이란, 사람이 다닐만한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마쓰모토 세이초는 어떤 의미로 ‘짐승의 길’이란 제목을 붙인 것일까?

마쓰모토 세이초의 『짐승의 길』 초입에 ‘짐승 길’이 무엇인지 설명이 나온다.

산양이나 멧돼지 등이 지나다녀서 산중에 생긴 좁은 길을 말한다. 산을 걷는 사람이 길로 착각할 때가 있다.

사람이 짐승의 길을 착각하여 들어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길이라 생각하고 가다 보면 수풀 밑으로 길이 나 있기도 하고, 진흙탕을 통과할 수도 있다. 사람이 다니기에는 도통 불가능한 험한 길을 만날 수도 있다. 애초에 짐승의 길이란, 사람이 다닐만한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마쓰모토 세이초는 어떤 의미로 ‘짐승의 길’이란 제목을 붙인 것일까?


다미코란 여인이 있다. 병에 걸려 쓰러진 남편은 거동이 불편하여 일을 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다미코는 고급 온천 여관에서 일을 하며 며칠에 한 번씩 집에 들른다. 남편은 그런 다미코를 의심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심이라기보다는 질투이고 욕정이다. 자신은 하루 종일 누워서 허송세월하고 있다. 그런데 아내는 혹시, 이런 나를 비웃으며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은 아닐까. 질투는 망상을 부르고, 집착은 날로 심해져만 간다. 다미코는 알고 있다. 이런 남편과 함께 있는 이상, 시들어가는 날들밖에는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런 다미코에게 제안이 들어온다. 뉴 로얄 호텔의 지배인 고다키는, 잠시 동안 도구가 되지 않겠냐고 물어온다. 일본 정재계를 쥐고 흔드는 기토 고타라는 노인의 애인이자 하녀가 되어달라는 것이다. 당분간 그 일을 하고 나면, 오히려 누군가를 쥐고 흔들 수도 있는 미래가 열릴 수 있다면서. 다미코는 망설인다. 과연 이대로 가면 내 인생은 좋아질 수 있을까? 뼈 빠지게 일해서 돈을 벌어봐야 남편의 병간호에 다 들어갈 것이고, 그래 봐야 얻을 것은 남편의 질투와 시기가 아닐까. 고다키는 말한다. 보통 사람이 보통의 심리로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고.

행복해지고 싶었던 다미코는 짐승의 길로 들어선다. 골칫거리가 될 수 있는 남편을 죽이고, 도구가 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짐승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들어서기는 쉽지만 헤어 나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기토 고타라는 노인은 일본 사회를 뒤흔드는 실력자다. 돈과 폭력 그리고 섹스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조종하고 파멸시키거나 죽이기도 한다. 다미코는 그런 남자의 도구가 되기 위해, 자신 역시 살인을 저지른다.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이 아니기에, 한 번을 하나 두 번을 하나 마찬가지가 된다. 다미코도 잘 알고 있다. 이제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점점 더 짐승의 길로 깊이 들어간다.

『짐승의 길』에는 특별히 사악한 인간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짐승 길’에 접어든 인간의 말로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다미코는 보통의 여자였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고다키는 ‘보통의 행복’을 들먹였던 것이다. 이대로 살아갈 수는 없다, 는 불안감 그리고 도망치고 싶은 욕망이 다미코를 ‘짐승’이 되게 했다. 살인이나 강도 같은 흉악한 범죄를 겪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범죄자’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뭔가 성정이 포악하거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범죄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사이코패스’라고 부를만한 범죄자들이 존재한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전혀 없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태연하게 타인을 희생시키는 특별한 인간들이 범죄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현실에는 의외로, 보통 사람들이 저지르는 흉악한 범죄가 상상 이상으로 많다. 별로 범죄를 저지르려는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그건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휘말려서 위법 행위를 해야 하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다미코는 남편을 죽였다. 형사인 히사쓰네는 다미코를 의심한다. 그런데 히사쓰네는 의혹을 상부에 알리고 정식으로 수사를 하는 대신 홀로 다미코의 뒤를 추적한다. 히사쓰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지만, 다미코는 그 이후가 더욱 더 두렵다. 짐승의 길에 이미 접어든 다미코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아예 짐승의 길에서 나오면 좋겠지만 이미 다미코는 소용돌이 속에 갇혀 있다. 다미코가 살아나는 방법은 히사쓰네를 제거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그들은 공범자가 되고, 악인을 넘어 짐승이 된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선구자인 마쓰모토 세이초는 추리소설이 트릭과 반전을 위주로 한 ‘논리 게임’에 치우치는 것에 반대하며 ‘사회’를 전면으로 끌어들였다. 『짐승의 길』에서도 다미코는 그저 보통의 여자였다. 그러나 고다키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녀는 범죄자가 되고 짐승이 되어버린다. 이처럼 보통 사람들이 범죄에 휘말리거나 선택을 하면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범죄들을, 사회파 미스터리는 주요 제재로 삼는다. 그리고 개인의 일상적인 범죄들을 파헤쳐 보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거나 간섭하는 더욱 더 큰 권력과 음모들이 드러난다. 개인을 통해서, 개인적인 범죄를 통해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모순을 들여다보는 것.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에서 범죄는 별세계의 게임이나 사건이 아니다. 아사다 지로의 말처럼독자들은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을,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과 같이 어쩔 수 없는, 인간으로 느낀다.’



물론 마쓰모토 세이초는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는 ‘흑막’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것을 누구는 단지 음모론일 뿐이라며 일축하기도 한다. 그런데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을 읽다 보면 흑막의 존재에 대해서 놀라기보다는, 보통 사람들이 짐승이 되어가는 과정에 먼저 공감하게 된다. 『제로의 초점』이나 『모래 그릇』 같은 작품들에서는,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슬픈 과거가 드러난다. 물론 그들은 범죄를 택했고, 짐승이 되기를 자처했기에 용서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들이 왜 짐승의 길로 접어드는 선택을 했는지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다미코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할까? 도구를 거부하고, 매일같이 열심히 일하면서도 어떤 희망도 미래도 없는 날들을 택했을까? 아니면 다미코와 같은 짐승의 길? 모르겠다. 단번에 결정할 수가 없다. 고심하고 고심하다가, 어느 순간에 한쪽으로 기울어져버렸을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쪽이건 후회했을 것 같다. 왜 나는 다른 길로 가지 않았을까, 라며.

『짐승의 길』은 1962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무려 50년 전의 소설. 그런데도 핸드폰이 없고 인터넷이 없다는 사실 정도를 제외하면 뭔가 낡았다는 느낌이 그다지 들지 않는다. 그것은 곧 『짐승의 길』이 쓰여진 당시와 50여년 후의 지금이, 별 차이가 없다는 말도 된다. 즉 인간이 살아가는 조건,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과 절망은 전혀 바뀐 것이 없다는 것. 그 말은 곧 지금 우리들 역시 똑같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짐승의 길에 접어들 것인가, 말 것인가.




< 국내에 번역, 출간된 ‘마쓰모토 세이초’ 저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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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길 (상) 마쓰모토 세이초 저/김소연 역 | 북스피어

『짐승의 길』은 1962년 1월 8일부터 1963년 12월 30일까지 《주간신초》에 연재되었다가 다음해인 1964년에 단행본으로 나온 작품이다. 당시 세이초는 작가 부문 소득액 순위에서 매년 1위를 달렸고, 나오키 상 선고위원이었으며, 무려 열여덟 편이나 되는 장편소설을 신문과 잡지에 폭풍 연재하던 중이었다. 아울러 논픽션 『일본의 검은 안개』, 『심층 해류』, 『현대 관료론』 등을 쓴 공로를 인정받아 제5회 일본 저널리스트회의 상을 수상하고, 일본 추리 작가 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작가의 이력을 통틀어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한 시기라 볼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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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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