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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럼 짜면 사형! 1단 기사들이 스크럼을 짜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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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스크랩 9, 10권(1973년1월~1976년10월)을 세 번째로 펼친다. 유신선포 이후 칼바람 불던 국내 정세에 집중해서 본다. 우우우우우-. 한편에선 권력의 광풍이 불고, 또 한편에선 뜨거운 함성이 맞바람이 되어 부딪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어깨동무’를 하고 싸웠다.
그냥 구호를 외치면 허전하다. 서로 어깨를 걸고 함께 소리치면 외롭지 않다. 꽉 찬 연대감을 느낀다. 내가 기억하는 1980년대 대학가의 시위현장에선 늘 ‘어깨동무’를 했다. 전초전이었다. 집회가 끝나면 어깨와 어깨가 고리처럼 연결된 단단한 대오가 만들어졌다. 처음엔 천천히 걸었다. 서서히 빨라졌다. 나중엔 뛰었다. 구호는 격렬해졌고, 호흡은 가빠졌다. 절정의 순간, 교문 밖으로 어깨동무 대열이 돌진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았다. 친구들은 어깨를 풀었다. 코를 쥐고 눈물을 흘리며 흩어졌다.

‘스크럼’이라고도 한다. ‘어깨동무’는 다정하고 친밀한 어감이지만, ‘스크럼’에선 용단과 저항의 냄새가 풍긴다. 시위대의 선두에 선 이들은 메가폰을 들고 이렇게 외치곤 했다. “동지 여러분, 자 모두 일어나서 함께 스크럼을 짜고 나갑시다.”

아버지의 스크랩 9, 10권(1973년1월~1976년10월)을 세 번째로 펼친다. 유신선포 이후 칼바람 불던 국내 정세에 집중해서 본다. 우우우우우-. 한편에선 권력의 광풍이 불고, 또 한편에선 뜨거운 함성이 맞바람이 되어 부딪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스크럼’을 짠 그들이 몰려오는 환상을 본다.

서울대 농대학생 5백여명은 9일 상오11시15분께 교내 강당 앞에 모여 ‘언론자유와 구속?구류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한 뒤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면서 한때 시위를 벌였다. 1백여 명의 기동경찰은 이날 교문 밖에서 학생들의 진출을 막았다.

상오 11시35분께 기동경찰이 쏜 최루탄에 쫓겨 일단 해산했던 (고려대)학생들은 낮12시20분 다시 강당 앞에 집결, ‘스크럼’을 짜고, 교정을 돌아 학교북쪽 철조망을 넘어 중앙산업 옆 골목으로 진출하려다 종암로 중앙산업 정문 앞에 배치된 경찰의 제지로 다시 교내로 쫓겨들어갔다.


(1973년11월10일치 <한국일보>의 두 1단 기사)

스크럼을 짜기 시작했다. 1972년10월 유신체제 선포 이후 숨죽였던 1년이었다. 1973년 10월2일 벌어진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이른바 ‘10?2 시위’가 발화점이었다. 20명이 구속되고, 23명이 제명되고, 18명이 자퇴당하고, 56명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지만 불은 꺼지지 않았다. 11월5일 김지하, 법정, 지학순, 천관우, 함석헌, 홍남순 등 각계 인사 11명이 서울 YMCA 회관에서 시국선언을 하면서 불은 더 힘을 받는다. 스크랩엔 조그만 1단 기사들이 군중집회를 연상시키듯 우루루 몰려있다.


(서울) 치대생들 맹휴(盟休)

외대 맹휴 결의

한국신학대생도

1명 더 구속
시위 경북대생

수업복귀 호소
공대 교수들 권고문

고대학생 간부
20명 시한 단식

감리교신대생
수업 1주거부

동맹휴학 결의한
외대생 2명에
20일 구류처분

고대 교내시위
학생석방 요구

서울신학대
기한부 맹휴

서울대생 1명 송치

성대생들 연좌

서울대 음대
기한부 맹휴
상대도 연좌

고대 성토대회
한때 대치상태

연대 교내시위
3개항 결의문

서강대 휴강

숙대생 수업
무기한 거부

한신대 농성 해산

전남 법대생
기한부 휴강

영남대 7항 선언문

경북대 시위학생
4명 구속 송치

(1973년 11월10일치 <한국일보>)

1970, 80년대 세로편집 신문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면, 1단 기사 스타일이 눈에 익으리라. 80년대 중반 대학에 다닐 때에도 대학가 시위기사는 왼쪽 뒷편 사회면에 이와 비슷한 형식으로 편집되었다. 세로 2.8cm 가량의 크기에 200자 원고지 한 장 분량. 제목은 한 줄에 길어야 여덟 글자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 큰 시위가 있은 다음날이면, 1단기사라도 나오지 않았는지 신문을 뒤적이곤 했다.

1973년 10?2시위 이후 서울대를 비롯한 대학가엔 동맹휴학 바람이 불었다. 이를 전하는 활자들이 꿈틀거린다. 학생들의 요구는 크게 1. 구속학생 석방 2. 학원사찰 중지 3. 언론자유 보장 4. 민주체제 확립이었다. 여기서의 민주체제란 오직 한 사람이 독식하는 유신체제에 반하는 개념이었다. 한 단에 5~6자 되는 제목들이 각각의 대학 이름을 명찰처럼 달고 길고 긴 행렬을 이룬다. 활자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스크랩 안에서 ‘유신철폐’라는 구호를 외치는 듯하다. 아버지는 이런 시를 적었다.

인생의 거부

벌거벗은 나무에 목을 건다
배곺은 창자들이
프랜카드를 치켜들고
천사의 합창 소리에
벙어리들이
춤을 추며 거리로 나왔다

여기는 광야
우물안 개구리를 비웃는다
권력의 타자(打者)
아무도 없는데
세월은 고아처럼 울고만
있구나

태양이 솟구치는 아츰(아침)
반기는 손님도 없는데
흰 손수건을 든 처녀들이
기분을 낸다



‘벙어리’들은 없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도 ‘광야’에 나와 ‘태양이 솟구치는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나섰다. 아버지가 구독하던 교계신문에까지 시국기사가 등장했다. 일간지(<한국일보>) 1단 기사의 제목 행렬도 계속된다.


12월 첫 주일 교역자 금식 기도회로
기장 전남노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회장 임기준 목사)는 현재 직면하고 있는 현 사태를 위해 12월 첫 주일(2일)날 노회 산하 전 교회가 기도하기로 하는 한편 교역자는 금식기도키로 했다.
한편 전북노회(회장 최희섭 목사)는 11월13일 임시노회를 열고 ‘교회와 학원과 언론의 자유가 극도로 제압을 받고 있는 현실에서 신앙 양심에 기초한 애국애족하는 충정에서 성명서를 발표한다’고 성명서의 취지를 밝혔다.

◇성명서

① 우리 교회는 예언자적인 사명에 입각하여 일제 때에도 자유와 독립을 위해 직접, 간접으로 투쟁해왔고 6?25 공산침략시에도 생명의 존엄과 신앙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기도하고 항쟁해왔다. 이 사명은 지금도 변함이 없음을 밝힌다.
② 성전에서 기도하는 교인들을 강압으로 축출한 일이나 신성한 제단에서 기도하는 목사를 체포한 처사는 전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탄압이요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로 인한 어떠한 행동도 전혀 당국의 책임임을 분명히 한다.
③ 우리는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도 하나님이 주신 신앙 양심의 자유를 제한받을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인간의 존엄을 위한 최선의 체제임을 믿기에 하루빨리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적극적인 정책전환을 촉구한다.
④ 우리는 자유신앙이나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한 행동은 창조주 하나님의 요청이요 성서적인 진리라고 믿기에 하나님이 주신 양심과 자유를 방해하려는 그 어떤 악의적인 세력에 대하여서도 결코 묵과치 않고 적극적으로 항거할 것이다.


(1973년12월1일치 <크리스챤신문>)


인권선언발표
각계30명참석
기독교협의회

구국기도회 갖고
한때 가두데모

이대생 2천명
경찰대치 연좌

고대생 40여명
단식농성 시작

교문 밖에서 대치
건대생 시국선언

횃불가두데모
새문안교회 학생

기말시험거부
한양대생 60여명

동대생 백여명도

67명중 60명 훈방
데모관련 성대생

(1973년11월29일치 <한국일보>)


성대생 5백명
한때 가두데모

기말시험 연기
서울여대 교무회의

서강대 2백명
단식농성 시작

기말시험 없이
어제 조기방학
숭전대

15명이 구국기도회
연대 신학대학원생

처벌학생 규제
총장방문 건의
경북대학생회장단

어제 조기방학
인하공대 시험연기

(1973년11월29일치 <한국일보>)


중대생 투석전
플래카드 시위

홍대생 연좌
교문 앞에 나와

농성 연세대생 해산

조기방학철폐
고대생들 결의

경북대생 시위

기말시험 거부
영남대 상경대생

서강대생 성토
경찰과 2시간대치
덕성여대 교내시위

교문 밖서 결의문
수도여사대생들

(1973년12월1일치 <한국일보>)


전남대생 데모

경북대생 연좌

이대생들 시위
시청앞에 모여

(1973년 12월4일치 추정 <한국일보>)

대학가 시위가 격화하자, 정부는 11월27일부터 12월1일에 걸쳐 조기방학을 실시하도록 지시했다. 광주에서는 고등학생까지 시위에 나서자 오일쇼크에 따른 에너지 절감을 이유로 12월4일부터 방학에 들어갔다. 국민학교(초등학교)까지 조기방학을 했던 모양이다. <한국일보> 4컷만화 ‘두꺼비’ 는 이러한 상황을 풍자한다. “국민학교도 왜 일찍 방학을 하나요?”(꼬마) “그건 날씨도 춥고 기름도 절약할 겸….”(아빠) (손가락질을 하며) “이러지를 마세요!!”(꼬마) “도매금이라는 거쯤은 나도 알고 있어요!”(꼬마) “...”(아빠)


정부는 12월7일 포용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구속됐던 나병식 등 서울대생 5명을 석방하고 교내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율적 학생활동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전국의 대학 총?학장들은 14일 “정부의 아량에 감사하고, 학생들은 면학분위기에 힘써달라”는 요지의 학원사태 결의문을 냈다.


각본이 짜 있었던 듯 12월18일 홍성철 내무장관은 취임 후 첫 회견에서 “경찰에 의한 학원 및 종교단체 사찰은 대공성 문제를 띤 것을 제외하고는 일체 않을 것이며 특히 정치적인 의도에서 경찰이 학원 내에 출입, 학생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신체제 안에서 너그럽게 봐주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곤 ‘반체제’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지명한 국회의원의 모임인 ‘유신정우회’(유정회)의 12월20일 의원총회 자리에서 백두진 회장은 “반체제라는 것은 개헌을 통해 옛날 체제로 돌아가자는 것”이라 한 뒤 “정부?여당은 지식인들의 비판은 경청할 것이나 이러한 반체제적인 움직임은 용납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유신체제를 반대하면 반체제!! 신민당은 같은 날 “반체제운동이 무엇을 의미하며 왜 할 수 없는 것인지 구체적인 내용과 한계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반체제운동의 시말

분명히 반체제다
그래서 모두가 우울하다
정치는 강자의 수수께끼 놀음이다
손톱으로 호랑이의 이빨을
뺄 수가 있단 말이냐

모두가 야단들이다
뭣이 어쨌다는 말인가
군중심리로 득을 보자는
악덕정객들이다
불상(불쌍)하다
헌법은 고칠 수 있는 것
사람이 만든 것이니까
그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월을 따라
강남을 가려무나



‘군중심리로 득을 보자는 악덕정객’은 신민당을 일컫는 듯하다. 아버지는 유신에 도전하는 ‘반체제’를 ‘손톱으로 호랑이의 이빨을 빼는 일’에 비유한다. 그러면서 ‘세월을 따라 강남을 가려무나’라고 말한다. 호랑이의 이빨을 빼도, 천천히 빼라는 말씀인가. 어쨌든 그해 겨울, 반체제 아니 반유신체제운동의 횃불이 타올랐다. 12월24일엔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터져나온다. 김수환, 함석헌, 천관우, 장준하, 김동길, 계훈제, 백기완, 법정, 김재준, 박두진, 이호철 백낙준, 김윤수, 김찬국, 안병무, 홍남순 등 각계 민주인사 30명이 발기인이 되었다. 이들은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백만인 서명운동을 선포했다.
박정희 정권은 겁이 났던 모양이다. 김종필 총리는 이틀 뒤인 12월26일 방송연설을 통해 “유신체제에의 도전은 지켜야 할 국가기본체제에의 도전이며 분명히 자유의 한계를 넘어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박정희도 12월29일 담화문을 발표하고 “현 유신체제를 부정하고 뒤집어엎으려는 일체의 불온한 언동과 소위 개헌청원서명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엄중히 경고해둔다”고 못박았다.


그리고 1974년으로 해가 바뀌자마자 1월8일에 개헌언동을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하는 긴급조치 1,2호를 선포했다. 1월15일엔 개헌청원서명운동을 이끌었던 장준하, 백기완씨를 구속했다.


1월21일엔 김경락, 이해학, 김진홍, 인명진 목사 등 11명을 또 구속했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였다. <한국일보> 만평은 달랑 ‘대화지묘’라는 무덤 하나를 그려놓고 “대화시대 끝”이라는 글을 붙였다. 아버지는 ‘인생의 묘(妙’라는 시를 적었다.

인생의 묘(妙)

정치를 하는 것은 쌍놈이 변소간에
출입하는 것과 같다
서로 목을 조이고 침을 삼킨다
세상은 감투의 행렬
속치마 속에 더러운 신비가 숨어있듯이
정치란 그 속에----------
무서운 음모가끼리 간음을 한다
인생의 묘는 벙어리가 되는 데 있다
인생도 대화도 없이 모두가 짐승처럼 살자



1974년 1월14일엔 긴급조치 3호가 선포되는데, 이는 신나게 사람을 고문하다가 잠시 빨아먹으라고 던져준 사탕 같은 존재였다. 가구별 주민세를 면제하고 5만원 이하 갑근세를 면제한다는 등의 ‘생활안정 긴급조치’였다.


자, 그리고 4월3일. 무시무시한 긴급조치 4호 납시요~


학원데모 징역 5년~사형
소속학교 폐교까지도
대통령 긴급조치4호, ‘민주학련’활동 금지


박정희대통령은 3일 하오10시를 기해 학원사태에 관한 대통령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제단체를 조직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는 등 일절의 행위, 학생의 정당한 이유 없는 출석 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 등 및 학교내외의 집회, 시위, 성토, 농성 기타 일절의 개별적, 집단적 행위를 금하고 이에 위반하거나 이조치를 비방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며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수 있다고 발표했다.

출석?수업?시험거부 엄금, 보도?편의?문서의 소지도
8일까지 고지면 불문, 지사 등 요청 있을 땐 병력출동


이 긴급조치는 또 문교부장관이 긴급조치를 위반한 학생에 대한 퇴학 또는 정학의 처분이나 학생의 조직결사 기타 학생단체의 해산 또는 이 조치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의 폐교처분을 할수 있도록 했으며 이같은 문교장관의 처분에 위반한자도 같은형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또 이조치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방법으로 타인에게 알리는 일절의 행위도 같은 형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한편 이조치 선포전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관련된 행위를 한 자는 오는 8일까지 그 행위 내용의 전부를 수사, 정보기관에 출석하여 숨김없이 고지하면 처벌하지 아니하기로 했다.
이 긴급조치는 또 이조치를 위반한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하며 군지역사령관은 서울특별시장, 부산시장 또는 도지사로부터 치안질서유지를 위한 병력출동의 요청을 받을때에는 이에 응해 지원하도록 규정했다. 3일 하오 10시부터 발효, 시행된 이 긴급조치는 이날 하오10시 청와대에서 긴급히 소집된 임시국무회의에서 헌법제53조에 의거 이봉성법무장관의 제안으로 가결되었다.

반국가활동 확인포착
박 대통령담화
학생은 내일 위한 지식연마를


박정희대통령은 3일 대통령 긴급조치를 선포하면서 다음과 같은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작금 우리사회의 일각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상투적으로 전개하는 적화통일 위한 이른바 통일전선의 초기단계적 불법활동양상이 대두되고 있음에 감하여 이같은 불순요인을 발본색원함으로써 국가의 안전보장을 공고히 다지고자 오늘 헌법절차에 따라서 긴급조치를 선포하게 되었음을 국민여러분에게 알려드리면서 국민여러분의 협조를 당부하고자 한다.
이제 새삼스러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국가적 현실은 시련과 도전의 연속이라 하지않을 수 없다.
북한공산주의자들은 우리에게 부단한 군사적 도발과 간접침략의 위협을 가해오고 있으며 또한 이처럼 불리한 여건하에서 우리는 선진제국들과 더불어 발전을 위한 치열한 경쟁을 해야만 하는 지극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 하겠다.
(중략)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우리 사회일각에서는 이같은 중차대한 싯점에 처해서도 국민총화를 저해하고 국론을 분열시킴으로써 국력배양을 훼방하려는 책동이 아직도 자취를 감추지 않고 있어왔다.
정부당국은 이러한 책동이 최근에 가일층 격화되고 노골화 되고 있는 북한공산집단의 우리에 대한 공개적인 모략과 중상비방에도 불구하고 계속 추진되어 왔다는 사실에 예의 주목하고 이를 국가의 안전보장이라는 차원에서 다각적으로 비밀리에 조사해왔던 것이다.
그 결과 이른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조종하에 그들과 결탁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이른바 그들의 ‘인민혁명’을 수행하기위한 상투적 방편으로 으레 조직하는 소위 통일전선의 초기단계적 지하조직을 우리사회 일각에 형성하고 반국가적 불순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확증을 포착하기에 이르렀다.
(중략)
그리하여 특히 최근에 이르러서는 소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인민혁명’의 수행을 기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국가의 안전보장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이같은 불법활동이 비록 초기단계에 있다 하더라도 이를 신속하고도 강력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단하고 오늘 헌법제53조에 의하여 대통령에게 부여되고 있는 긴급조치권을 불가피하게 발동하게된 것이다.
나는 오늘 헌법절차에 따라 국무회의에서 의결, 발표된 대통령긴급조치제4호가 우리 대한민국내에 침투하고 있는 반국가적 불순분자들을 문자 그대로 발본색원함으로써 굳건한 국민해온 학부모들의 피땀어린 노고에 보답하는 길이 과연 무엇인가, 냉철히 판단하여 행동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여러분과 동일한 연배요 동일한 자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가정사정이 여의치 못하기 때문에 대학보다는 직장을 택하고 산업전선에서 땀흘려 활약하고 있는 수많은 노동청소년들이 선망의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국민여러분과 더불어 나는 이번 긴급조치가 우리국가의 안전보장과 내일의 무궁한 발전을 보장할것을 확신하면서 국민 여러분의 협조를 다시한번 당부하고자 한다.
1974년 4월3일 대통령 박정희


(1974년4월5일치 <한국일보>)

시위하려고 어깨동무하면 죽는다. 스크럼 짜고 친구들과 교정을 돌면 최고 사형이다. 소름이 끼치는 담화문인데, 왠지 웃기려고 작정한 개그프로의 대사 같이 느껴진다. ‘정당한 사유없이 결석이나 시험거부 행위’를 해도 사형이란 말이다. 이 긴급조치의 빌미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었다. 민청학련이란 1974년4월3일에 총궐기시위를 기획했다가 무산된 학생들이 유인물에 편의상 붙인 호칭이었다.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4월25일 민청학련에 무시무시한 배후가 있는 양 발표했다.


시위를 전하는 1단 기사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해 4월은 봄이었으되, 겨울이었다. 6월28일엔 해경경비정 863정이 북한 함정 3척의 공격을 받고 침몰되었다. 함정에는 28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8월15일엔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에서 저격당해 운명했다. 각계의 ‘북괴 만행 규탄운동’이 연이어 조직되면서, 개헌운동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여름이 끝나가던 8월22일에야 판이 벌어질 기회가 생겼다. 김영삼씨가 새 신민당 총재에 선출됐다. 4월28일 유진산 총재 별세 후 4개월 만에 열린 전당대회였다.


신민당 총재에 김영삼씨-
신민전당대회 김의택씨 사퇴로 확정
최연소 야당당수???김영삼씨


“제1야당의 당수는 당의 얼굴이요 힘입니다. 당권에 안주하지 않고 대권에 야망을 품은 사람이 당수가 돼야합니다.”
40대기수론의 제창자였던 김영삼총재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정권을 담당할 선명한 야당으로 신민당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당생활 20년 만에 제1야당의 당수가 된 김총재는 금년나이 47세로서 야당사상 가장 연소한 당수가된 셈이다. 경남고교와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한 김총재는 약관 26세때 3대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래 3, 5, 6, 7, 8, 9대국회에 진출, 6선의원으로 화려한 정치생활을 했다.
그는 민중당과 민정당대변인을 거쳐 민중당 원내총무를 두 번, 신민당 원내총무를 세 번, 도합 다섯 번이나 원내총무직을 역임하여 제1야당의 야전군사령관으로 정치수완을 발휘했다.
뭐니뭐니 해도 김당수의 정치생활 가운데 백미는 69년 11월 40대기수론의 제창. 3선개헌뒤 침체된 야당에 이로써 새바람을 일으켰으나 70년 9월 대통령후보지명대회에서 1차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었지만 2차투표에서 김대중씨에게 역전패당하기도 했다. 그는 “야당의 갈길이 좁아졌다고 하여 좌절할수도 없으며 좌절되어서도 안된다. 국민이 정권을 안심하고 맏길수 있는 야당으로 가꿔나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대권에 야망이 없는 사람은 결코 야당 당수가 될수가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당수는 해공 신익희선생과 유석 조병옥박사, 그리고 존?F?케네디 미대통령을 존경, 자신의 정치노선 결정에 지표로 삼아왔다.
그는 스포츠만능의 정치인으로서 그중에서도 수영과 승마를 즐긴다. 미국을 방문했을때 애리조너평원도 말을 타고 달려봤는데 지금부터 3년전 호주산 애마 스와니를 친구에게 넘겨주고 20년간 계속했던 승마를 아예 끊었다.
요즈음은 새벽6시에 일어나 상도동뒷산까지 구보하거나 1천여번의 줄넘기를 하며 1?67m의 키에 체중 71kg. 그의 부인 손명순여사와의 사이에 2남3녀를 두었으며 장녀 혜영양은 출가. (1974년8월23일치 <한국일보>)

김영삼의 공약 중 하나는 유신을 해체하는 ‘개헌투쟁’이었다. 김영삼 총재가 선출된 다음날 긴급조치 1호(개헌 언동 관계), 4호(민청학련 관계)가 해제됐다. 9월24일엔 원주 원동성당에서 지학순 주교의 구속에 항의하는 3백여 명의 신부들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발족했다. 지학순 주교는 두 달 전인 7월 민청학련 사건 관계자에게 자금을 지원했다는 명목으로 구속 기소된 바 있다. ‘지학순 주교 석방’의 소망이 묻은 1단 기사 제목들이 신문 지상에 서서히 떠오르며 다시 스크럼을 짰다.


기독교회관 기도회

공동기도문 발표

함석헌?천관우씨
한때 연행됐다 귀가
2명 추가연행
법대생 낙산제 관련

천주교신도등
천여 가두행진
지 주교 석방 등 결의

(1974년9월28일치)

한국신학대 교수
공개결의문 마련

홍대생 3개항 결의

(1974년9월29일치)

성직자 석방촉구
가톨릭 제4차
전국 울트레야


(1974년10월4일치)

시위대들의 결의문은 대략 1. 민주헌정회복 2. 긴급조치 무효화, 구속중인 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교수?학생 등의 즉각 석방 3. 언론?보도?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4. 서민대중의 최소한 생활복지 보장 등이었다. 결국 가장 근본적인 화두는 민주헌정회복, 즉 개헌을 통한 유신헌법 철폐였다.
11월15일엔 신민당 의원총회를 마치고 나온 김영삼 총재 등이 의사당 정문밖을 나와 개헌시위를 벌이려다가 미수에 그쳤다.


같은 날 광주일고생 7백 명은 1교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스크럼을 짜고 “구속학생 석방”등을 외치며 교문을 박차고 나가 충장로까지 가서 데모를 벌였다. 18일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 30여명 등 문인들이 “유신헌법 철폐”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데모를 하려다가 제지당했다. 1단 시위기사는 쉼없이 계속된다.

수감자 가족
금식기도회

구국기도회
마산 5백여 신도

전주서도 기도회

한때 침묵행진
광주교구 6백신도

대전서도 천명참가

인권회복 기도회
수원3백여 신도

인천서도 5백여명

김 총리 발언
취소를 요구

구속자 위한 기도회
서울기독교회관서

(1974년11월13, 15일치 <한국일보>)

성년기도회
연희동성당에서
4백여 신도 참석

가톨릭신대생
가두시위?기도

이대, 한때 가두로
개강등 6개항 결의

서울대 가정대생
5개항 결의 후 농성

성대생 5백여명
한때 경찰과 대치

신대생 36명
구류 20일씩
8명은 영장신청

고대생 5명에 5일(구류)

원광대 오늘 개강

성직자 1백여명
세미나후 시위

연대생 천여명
가두진출기도


(1974년10월27일, 31일치 <한국일보>)

더 큼지막하게, 아예 1면 톱으로 유신에 대한 저항 소식을 장식할 수는 없었던 걸까. 귀퉁이에 작은 크기로만 처박아야 하는 걸까. 아니다. 욕심이었다. 이조차도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이 작은 1단 기사를 지켜내기 위해 기자들은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시위기사 한 줄 넣기도 아슬아슬했다. 기관원이 신문사 편집국 안에 무시로 드나들던 때였다. 신문제작과 관련해 트집을 잡힌 신문사 간부들이 중앙정보부에 끌려다니던 시절이었다. 기자들은 절망스러웠다. ‘유신체제’ 아래서는 공정한 언론이 불가능했다. 신문기자들도 머리띠를 묶었다.


한국일보 기자일동
민주언론수호 결의
외부간섭 배제 등 4개지침 채택


한국일보사 기자 1백50여명은 25일 새벽 본사 편집국에서 민주언론수호를 위한 결의문과 행동지침을 다음과 같이 채택했다.
“한국일보 기자 일동은 언론부재의 현실 앞에서 진실을 전달하는 사명을 다하지 못했음을 국민 앞에 부끄럽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의 방관이나 주저는 우리의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 되고 있음을 통탄한다. 지난 22일부터 철야로 진통해온 우리는 여기 굳게 서서 민주언론을 사수할 것을 결연히 선언한다.
우리는 또한 언론에 대한 통제와 억압이 국가의 안보와 발전에 하등의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천명한다.
자유는 스스로 쟁취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 앞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행동지침을 채택, 이를 확인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한다.
①지난 22,23일 이틀에 걸쳐 신문제작과 관련 발행인, 편집국장, 편집부장이 중앙정보부에 출두, 조사를 받은 사태를 언론자유에 관한 중대한 침해로 단정한다.
②우리 사회의 종교인, 지식인, 학생들이 주장하고 있는 사실을 외부간섭 없이 자유롭게 보도할 것과 자유언론에 대한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③앞으로 신문제작에 관련되어 언론인 누구라도 부당하게 연행, 구금될 경우 이를 사실대로 보도함은 물론 그들이 귀사할 때가지 편집국에서 기다리며 투쟁한다.
④중앙정보부원을 비롯한 기관원의 신문사 출입을 일체 거부한다.”

본사 사장 등 3명
조사 받은 후 귀사


한국일보사 장강재 발행인, 김강환 편집국장, 이상우 종합편집부장 등 편집간부 2명은 22일과 23일 각각 중앙정보부에 출두, 지면제작과 관련된 조사를 받은 뒤 23일 밤 11시께 모두 귀사했다.
장 발행인은 23일 낮 이 편집부장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출두, 이날 밤 귀사했고 김 편집국장은 22일 정오께 출두했다가 23일 밤 귀사했다.
김 편집국장은 중앙정보부에서 한국일보 22일자 3면에 보도된 월남사태에 관한 홍순일 특파원의 취재, 송고 및 편집경위에 관해 조사를 받았다고 밝혔다.
중앙정보부는 이 기사와 관련, 홍 특파원이 보낸 영문기사 원본과 번역문을 참고자료로 제출토록 요구했었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장 사장과 편집국 간부들의 소환은 신문편집권의 자유와 관련된 중요한 사항이라고 보고 22, 23일밤 등 연3일동안 철야기자총회를 열고 이번 사태로 제기된 여러 문제점을 심각하게 논의, 신문사 간부들의 연행사실을 보도하기로 결의했었다.

동아일보

동아일보사 기자 1백80여명은 24일 상오 9시 반 동사 편집국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대회를 열고 ①언론기관에 대한 외부간섭 배제 ②기관원 출입 거부 ③언론인 불법연행 거부 등 3개항을 결의했다.
기자들은 이같은 결의내용을 24일자 지면에 보도할 것을 요구하면서 신문제작 참여를 보류, 신묹작 및 동아방송 뉴스보도가 한때 중단됐다가 밤11시께 재개되어 24일자 신문을 25일 아침에 서울시내에 배달했다.
한편 동사 송건호 편집국장 등 편집국장 3명이 23일 하오 서울대 농대생 데모기사와 관련, 중앙정보부에 가서 조사를 받았었다.

조선일보

조선일보사 기자 1백20여명은 24일 밤9시20분 편집국에서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문을 채택하고 ①자유언론의 수호를 위해 어떤 부당압력도 배제한다 ②언론인들의 보도활동과 관련 부당히 연행구금될 경우 철야농성 등 투쟁을 전개한다 ③학생종교인 등 각계의 정당한 의사표시는 반드시 게재한다는 등 3개항을 결의했다.

중앙매스컴

중앙매스컴에 소속한 중앙일보 동양방송기자 2백여명은 25일 상오 9시10분 편집국에 모여 언론자유수호 제2선언문을 채택하고 ①학원 및 종교계 동향을 보도할 책무를 재확인한다 ②언론자유에 관련된 모든 움직임을 사실대로 보도한다. ③기관원의 회사 출입?제작간섭과 언론인 붑법연행을 단호히 배격한다는 등 4개항을 결의했다.(하략)


(1974년10월26일치 <한국일보>)

박정희는 언론계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언론은 개헌투쟁의 숨통을 끊는 데 효과적인 급소 중 하나였다. 제1표적은 <동아일보>. <동아일보>는 편집국?출판국?방송국(동아방송) 기자결의를 통해 가장 먼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채택한 언론사였다. 1974년12월16일부터 1975년1월23일까지 <동아일보> 광고의 98%가 이유 없이 떨어져나갔다. 동아일보 광고국장 김인호는 주거래 광고 기업체 간부들과 면담한 자리에서 광고탄압이 중앙정보부 지시에 따른 것이었음을 알게 됐다. 아버지의 스크랩 맨 마지막 장은 다음과 같은 광고로 장식돼 있다. 그 유명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의 서막이다.


대광고주들의 큰 광고가 중단됨으로 인하여 광고인으로서 직책에 충실하기 위하여 부득이 아래와 같은 개인 정당 사회단체의 의견광고, 그리고 본보를 격려하는 협찬광고와 연하광고를 전국적으로 모집하오니 전 국민의 적극적인 성원을 바랍니다. 동아일보사 광고국장 김인호

1975년 새해와 함께, 아버지는 스크랩 제10권을 새로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 즈음까지 <한국일보>만 정기구독했는데, 이때부터 <동아일보>를 함께 구독한 것으로 보인다. 스크랩엔 <동아일보>의 백지광고가 등장한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85년 4월, 나는 한 대학의 학보사에 수습기자로 들어갔다. 2학년 선배들로부터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에 관해 알아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아버지의 스크랩에 붙은 백지광고는 까맣게 몰랐다. 인터넷 검색도 없을 때였다. 서울 세종로 동아일보사까지 찾아갔다. 고향에 있는 아버지한테 전화만 했어도 쉽게 알았을 텐데. 1975년 1~2월간 동아일보 광고란을 채운 독자들의 자발적 ‘격려 카피’를 뒤늦게 다시 읽는다.


민족의 횃불은 외롭지 않다. 정의의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1975년1월7일 로스앤젤레스 동아돕기회

운명

뱀이 개구리를 씹으며 스스로 ‘대적할 놈이 없다’하며 지네가 부닥치는 것을 알지 못하더니 뱀이 죽음에 지네 또한 교만하여 거미가 그 목을 젖담는 줄 알지 못하더라
독한놈은 반드시 독한 것에 상하나니
네게서 나온 것이 네게로 돌아가느니라
74.1.14
寒山居士 외 9명


악한 사람은 악의 길을 쫒아갑니다.
의 있는 사람은 옳은 길을 위하여는 칼날을 밟습니다.
- 만해 한용운의 ‘나의길’에서
한 애독자


먼 훗날 내 아들이 나에게 1975년도에 무엇을 했냐고 묻는다면 새마을 운동보다 자유언론수호운동에 앞장섰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겠다. 자유국민 아현동 조씨 정씨 부부

“독한 놈은 반드시 독한 것에 상하느니”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민심은 역류하는 듯 했다. 박정희는 반전을 시도했다.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라는 승부수를 급조했다. 실시일을 2월12일로 발표했는데, 투표 일주일 전이었다. 신민당의 김대중과 김영삼 총재, 통일당의 양일동 당수는 투표거부를 호소했다. 1974년11월27일 결성된 민주회복국민회의 등 14개 단체 역시 투표를 거부한다는 공동성명을 냈다. 정부는 국제여론을 만회하고 전세를 역전시켜야 했다. 투표를 밀어붙였다.


“자유분위기 없인 무의미”
민주회복국민회의 성명


민주회복국민회의 대변인 함세웅 신부는 22일 국민투표 실시에 대해 “자유토론의 보장이 없는 현행 국민투표법에 의한 국민투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함 대변인은 “무엇보다 투표전에 구속인사 석방 등 인권회복과 자유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며 정부가 임명한 선거관리위원들에 의해 투?개표가 이뤄지는 국민투표는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빠른 시일 안에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 및 운영위원연석회의를 열어 국민투표에 대한 공식입장을 결정짓겠다”고 밝혔다.

정부사고방식
환멸을 느낀다
김대중씨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씨는 22일 국민투표 실시에 대해 “이러한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부의 사고방식에 환멸을 금할 수 없다”고 말하고(하략)


(1975년1월23일치 신문)

아버지는 과연 투표를 했을까? 야당과 재야단체들은 보이콧 운동을 했다. 아버지는 평소 박정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 글을 쓰면서 엄청난 궁금증이 일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위 기사 옆에 적힌 시는 중요한 단서다.

국민투표의 진의

유신헌법을 소경이 읽는다
유신체제를 새로운 색시가
웃으며 좋아한다

역사의 회전-
슬픈 기록들이 춤을 춘다
눈감고 박수를 쳐라

세월과 인생-
거부와 찬성
네 양심대로 죽어라

세상과 영웅-
역설적인 진리
무조건 대답하지 말라




“무조건 대답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 거부가 답이다. 근데 아버지는 거부를 실천했을까? 에이, 그러지 않았다는 쪽에 걸겠다. 투표 불참 사실은 기록이 남는다. 아버지는 당시 타향의 한 작은 공동체에 의지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찍혀서 요시찰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위험했다. 투표장에 100% 갔으리라 추정한다. 그럼 투표소에선 은밀하게 ‘반대’란에 찍었을까. 알 수 없다.

2월12일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결과는 투표율 79.84%에 찬성 73.1%, 반대 25.1%였다. 각종 부정선거 의혹은 묻혔다. 김대중은 “국민투표 과정을 통한 부정과 불법의 실태를 너무도 생생하게 목도한 우리국민은 결단코 발표된 결과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세계의 여론도 같은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투표 이후에도 더 한층 강력한 국민적 민주전선의 대열을 강화, 전진해 나가자”고도 말했다.
박정희는 기분이 좋았으리라. 2월15일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를 석방했다. 재야세력은 끈기를 발휘했다. 민주회복국민회의는 3.1절 56주년을 맞아 ‘민주국민헌장’을 발표하며 투쟁을 이어갈 것을 천명했다. 아버지는 이런 글을 적었다.


입을 모아 웨치며 발을 둥둥 굴러라
손을 모아 웨치며 발을 흔들며 뛰어라
눈을 모아 웨치며 발을 크게 넓게 나가라
민주의 행열-생명의 행열-승리의 행열
대행진의 물결은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바람이 거궺면 거셀수록 노성(怒聲)은 운다



예전에도 밝혔지만, 아버지는 ‘보수’였다. 이른바 ‘국공합작’이나 ‘통일전선연대’을 한다고 할 때 맨 오른쪽에 위치할 사람이다. 그런 분에게 위와 같은 ‘격문’을 쓰게 한 것은 박정희였다. “바람이 거세면 거셀수록 노성은 운다.” 그렇다. 바람은 더욱 거세어졌다. 한 달 뒤인 4월8일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1) 관련자 8명의 사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이 날 고려대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하자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됐다. 다음날인 9일 상오 서울구치소에서 인혁당 관련자들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됐다. 대한민국 사법사에 치욕으로 길이 남을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이 사실을 전하는 신문은 4월11일치다. 그날 수원의 서울농대 교정에서는 김상진 군이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을 낭독한 뒤 등산용 칼로 배를 그어 자결했다. 5월13일엔 헌법에 대한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가 공표됐다. 그럼에도 5월22일, 서울대생 1천여 명은 김상진 추도식을 거행한 뒤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일명 ‘오둘둘 사건’이다. 경찰병력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관악캠퍼스 안까지 쳐들어갔다. 언론 현장에선 3월부터 5월까지 <동아일보> 기자 113명과 <조선일보>기자 32명이 거리로 쫓겨났다.

고독한 길

아득하게 멀리 뻗은 길
사랑과 미움의 갈림길
피흘린 자국마다 섭섭하구나

흘러간 역사의 증인도 걷고
통곡하며 몸부림치며 뒷걸으치는 길
못내 역겨워 섭섭하구나

정도 없고 미움만 돌작밭처럼 힘든 길
돈도 없고 옷도 없고 여자도 없이 걷는 길
그나마도 총잡이가 가로막으니 섭섭하구나

비정한 곡예는 더욱 박수가 요란한 법
표정도 없는 얼굴들이 핏기 없이 아우성친다
차라리 나는 소경 되여 길도 없이 걷고 싶구나
1975년 원단에 지초




스크랩 10권 맨 앞에 놓인 시다. 고독한 길, 어깨동무를 하면 덜 고독하다. 동무들과 스크럼을 짜면 용기가 솟는다. 언제 처음 해봤던가. 어린 시절 사진첩을 꺼내본다. 흑백사진 속에서 초등학생인 나는 친구들과 어깨를 걸고 촌스런 차렷 자세로 어색한 웃음을 흘린다. 이건 어깨동무인가, 스크럼인가.

‘어깨동무’는 1967년 창간해 1987년 종간한 어린이 종합잡지의 이름이기도 하다. 재단법인 육영재단이 중간에 흡수하여 발행했던 매체로,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비명에 스러진 다음부터 맏딸 박근혜가 발행인이 되었다. 이 글을 쓰며 안 사실이다. 그랬구나, 그래서 70년대에 <소년중앙>보다 <어깨동무>가 재미가 없었나? 상상 속에서 <어깨동무>란 잡지 이름을 <스크럼>으로 개명해본다. 오잉, 데모 잡지? 유신과 긴급조치 1~9호 아래서 ‘건전한 어깨동무’는 얼마든지 해도 됐다. ‘불온한 스크럼’을 짜면 경찰이 달려들었다. ‘어깨동무’와 ‘스크럼’의 하늘땅 어감 차이가 당시의 모순을 우스꽝스럽게 보여주는 지도 모르겠다.




1) 1964년 ‘대한민국을 전복하라는 북한의 노선에 따르는 반국가단체’로 체포되어 한차례 유죄를 선고받았던 이들은 1974년 민청학련의 배후로 다시 지목돼 23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중 8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나머지 15명은 무기징역에서 징역 15년까지 선고받았다.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을 고문에 의한 조작된 것으로 발표하였고, 같은 해 12월 인혁당재건위사건의 유족들이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청구하였다. 2005년 12월 재심이 시작되었고 2007년 1월 23일 선고 공판에서 사형이 집행된 우홍선 등 8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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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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