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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배우보다 인기 많았던 무성영화 목소리 배우

직업으로 본 근대 초기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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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근대 초기 한국의 직업관을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물질적 풍요를 얻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근대적 욕망을 반영하는 직업관의 근대적 변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직업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의 근대 초기를 다루면서도 보편적인 근대성에 관한 문제의식까지 담고 있다.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 이명세 감독)에서 영민(박중훈)이 다니는 출판사는 소박하며 누추해 보이기까지 한다. 반면 2011년 MBC 주말드라마 ‘반짝 반짝 빛나는’에서 주인공들이 다니는 출판사는 대규모 자본력을 갖추고 있다. 지금도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의 출판사들이 다수지만, 출판업과 출판 직종의 변화를 반영한다. 드라마 주인공의 직업은 드라마가 제작되는 시기 대중들의 욕망과 사회 흐름을 보여준다. 같은 직업이라도 바뀐 환경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세상이 변할 때 새로운 직업이 나타나고 오랜 직업이 사라진다. 지금은 사라진 전화교환수는 근대의 새로운 매체, 전화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대한제국 시대에 등장했다. 조선의 첫 전화는 1898년 경운궁에 개설됐다. 고종이 전화를 걸면 신하들은 큰 절을 네 번 하고 수화기를 두 손으로 들었다. 조선의 황태자 의친왕 이강은 61세 때 19살의 궁궐 전화교환수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비둘기 집’으로 유명한 가수 이석 씨가 새로운 매체 발달이 낳은 이 로맨스에서 태어난 분이다. 


국문학자이자 문화연구자 이승원은 라진 직업의 역사』(자음과 모음)에서 근대 초기 신문, 잡지 자료를 바탕으로 전화교환수, 변사(무성영화 목소리 배우), 기생, 전기수(책 읽어주는 사람), 유모, 인력거꾼, 여차장, 물장수, 약장수 등 지금은 사라진 직업 9가지를 다룬다. 대중들이 크게 선호한 오락이었던 영화에서 변사들은 당대 최고 배우들보다 많은 돈을 받으며 스타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줄거리 소개, 대사 더빙은 물론 몸짓 연기까지 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유성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 기술의 출현으로 변사 직업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전기수(傳奇手)는 이야기책을 외워서 낭독해주고 돈을 받았다. 18세기 중반 문헌에도 전기수가 등장하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전기수들이 폭넓게 활동했다. 전기수가 사라진 것은 집단적인 낭독 문화, 구술 문화에서 개인적인 묵독 문화로의 변화를 반영한다. 보편 교육으로 문해(文解) 능력이 보편화되고 서적 보급이 확산된 것도 이 직업의 종말을 재촉했다. 학교나 도서관 같은 근대적인 공적 영역과 공간이 생겨난 것도 전기수가 사라진 원인이다. 개인들을 ‘이야기 공동체’로 묶어주는 전기수의 역할이 끝난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 단골로 나오는 교통수단, 인력거는 특히 말쑥하게 차려 입은 ‘모던 걸, 모던 보이’들이 애용하는 근거리 시내 교통수단이었다. 1924년 당시 서울(경성)에서 운영된 인력거가 1,997대에 달했다. 현진건 단편 ‘운수좋은 날’의 주인공이 인력거꾼인 것에도 알 수 있듯이 인력거꾼은 하층민들이 종사하는 매우 흔한 직업이었지만, 전차 노선이 확장되고 버스와 택시를 싼값에 탈 수 있게 되면서 ‘조선의 택시’ 인력거는 급전직하했다.


 

이 책을 읽는 큰 재미 가운데 하나는 저자의 동서고금 종횡무진을 따라가는 데 있다. 예컨대 전기수를 다룬 부분에서 저자는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2008), 담뱃가게에서 소설 읽어주던 남자가 살해당한 정조 시대 살인 사건, 19세기 쿠바의 시가 제조 노동자들에게 책을 읽어주던 ‘쿠바판 전기수’(지금도 렉토(lector)라는 직업으로 활동하고 있다), 근대 초기 우리 문학 작품에 나타난 낭독 관련 이야기 등을 입담 좋게 들려준다. ‘직업’이라는 주제의식으로 ‘서 말의 구슬을 하나로 꿰어’ 근대 초기 생활사와 문화사의 풍경을 재현해내면서 그 의미까지 추적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소리의 네트워커, 전화교환수’, ‘모던 엔터테이너, 변사’, ‘문화계의 이슈 메이커, 기생’, ‘이야기의 메신저, 전기수’, ‘트랜스 마더, 유모’, ‘바닥 민심의 바로비터, 인력거꾼’, ‘러시아워의 스피드 메이커, 여차장’, ‘토털 헬스 케어, 물장수’, ‘메디컬 트릭스터, 약장수.’ 각 장의 제목들이 전하는 울림과 느낌부터 범상치 않다.


 

저자는 근대 초기 한국의 직업관을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물질적 풍요를 얻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근대적 욕망을 반영하는 직업관의 근대적 변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직업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의 근대 초기를 다루면서도 보편적인 근대성에 관한 문제의식까지 담고 있다.

 

 

사라진 직업의 역사 글 이승원 | 자음과모음

자음과모음의 하이브리드총서 『사라진 직업의 역사』는 직업을 통해 근대 조선의 문화적?일상적 풍경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이 책에서 소개된 9개의 직업은 조선 근대 초기에 생성되어 현대에 들어와 사라졌는데, 저자는 그 흥망성쇠의 흐름을 따라 현재 삶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사라진 직업, 새롭게 등장한 직업의 역사는 우리네 근대식 삶의 흔적과 무늬를 더듬으며 현재는 물론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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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표정훈(출판 칼럼니스트)

출판 칼럼니스트, 번역가, 작가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쓴 책으로는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 『탐서주의자의 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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