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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새로운 모험과 도전으로 가득한 돈키호테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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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눈에는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란 없었다. 늘 새로운 모험과 도전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리 아름답지는 못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적들을 보았고 거침없이 돌진했다.

네, 5만 원짜리 돈키호테입니다

“제가 맡고 있는 이 갤러리를 일러스트 전문 갤러리로 만들고 싶습니다.”

첫말을 떼고 나서 갤러리 원장은 끝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뭐랄까, 온갖 빛나는 단어들을 갖다 붙인 대통령 후보 출마 수락 연설 같았다. 화려하지만 알맹이는 없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뭘 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큰일을 하려고 큰 계획을 세우는 건 되레 촌스럽다. 높은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콘크리트가 있어야 하고 콘크리트를 만들려면 시멘트와 함께 엄청난 양의 모래가 필요하다. 모래가 없으면 높은 건물은 상상할 수 없다. 깨알 같은 일들 수만 개가 모여 거대한 일이 된다. 구체적인 현실이 모여 커다란 의미가 된다. 그러나 원장의 말에서는 모래알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글 못 쓰는 사람들이 글에 멋을 부린다. 말도 그렇다.

원장은 내가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는 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장 뒤에 서 있던 큐레이터는 달랐다. 꽉 찬 검은 눈망울이 물개처럼 반짝거렸고 뭔가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열정의 온도가 느껴졌다. ‘뜨거우면 하는 거지.’ 그래서 결정했다. <날아라 돈키호테>라는 전시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는 돈키호테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 넓은 통로에는 나무로 만든 벽으로 갈라놓은 공간이 있다. 꽃삽 갤러리로 어린이 예술마당이면서 일러스트 전문 갤러리다. 굳이 여기는 갤러리, 저기는 지하철 역이라고 나눌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차라리 어린이대공원역 전체를 갤러리처럼 꾸민다면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내가 도시철도공사 사장도 아니고 할 수 있는 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포기가 빠르면 고민도 적어진다. 어설프게 나뉜 갤러리에서 벗어나 지하철 역 복도에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전시를 핑계로 어린이대공원역에다 그림을 그렸다.

돈키호테의 눈에는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란 없었다. 늘 새로운 모험과 도전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리 아름답지는 못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적들을 보았고 거침없이 돌진했다. 그러나 그가 싸워야 할 적들은 눈에 보이는 풍차나 쉼 없이 이죽거리는 산초가 아니었다. 바로 그 자신이었다. 영화 <식스 센스>에서 유령은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에 세상을 떠나지 못한다고 했다. 돈키호테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말에 올라탄 돈키호테는 결국 제 심장을 향해 창을 겨눈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보여달라고? 좋아. 이게 돈키호테의 꿈과 희망이다. 맛 좀 봐라.’

때로는 나도 악동이 된다. 어떤 사람은 내가 꿈과 희망에 취한 조증 환자로 보인다고 했다. 일상은 즐겁지 않다. 자잘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걱정을 떨쳐내는 건 마약이나 도박에서 벗어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걱정이 무슨 존재 이유인 것마냥 버젓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심지어 스트레스가 없으면 어쩌나 싶어 애써 만들어내고야 만다.

그런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꿈을 꾼다? 꿈꾸며 사는 일도 그리 만만치 않다. 꿈은 낭만하고는 거리가 멀다. 일상이 지옥이라면 꿈은 천국이라기보다 좀 덜 지겹고 덜 고통스러운 지옥에 가깝다. 꿈은 귀찮은 습관이다. 식스팩을 유지하려면 매일 단백질 파우더와 닭가슴살만 먹고 런닝머신에 올라야 하듯이.


금요일 오후 2시 지하철 통로 담벼락 앞에 섰다. 사다리를 세우고 딸깍딸깍 페인트 마커를 흔들었다. 어떻게 그릴지 잠시 생각하고는 사다리에 올랐다. 잠시 뒤 빨간 꼬리가 달린 <엑스맨>의 악당처럼 펑펑거리며 벽면을 날아다녔다. 페인트 마커로 돈키호테 로봇과 산초 그리고 돈키호테가 뿜어내는 ‘정의의 입김들’을 그렸다. 팔이 빠질 듯 아팠다. 비빔면을 비비듯 양손으로 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크릴 물감으로 회색 점과 녹색 점들을 동그랗게 그려 넣자 그림에 생기가 돌았다.

나중에 그림을 취재하러 나온 신문사 기자는 하얀 바탕에 검은색 그림이 스타일리시하다, 그림에 색을 칠하지 않고 포인트만 줘서 마무리한 게 참 신선하다고 평가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요령이 생긴다. 포인트 찍기는 벽화를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였다. 페인트 마커로 그리면 생각보다 빨리 벽면을 채울 수 있다. 벽의 크기와 관계없이 주어진 일정에 납기를 맞출 수 있다. 일정이 넉넉하고 예산이 충분하면 고층 건물 숲이나 정교한 나무처럼 밀도 높은 장면을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여백을 많이 둔다. 여백이 많다고 결코 나쁜 그림이 아니다. 내 입장에서 보면 빨리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

그림을 완성하고 오른쪽 밑에 제목을 적었다. <돈키호테 :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는>. 6월로 착각해서 날짜를 6월로 적었다가 ‘2011년 6월이 아닌 7월’이라고 마무리하였다. 한번 그리면 웬만해선 지우지 않는다. 한번 지나간 시간은 죽은 시간이듯 한번 그린 선은 죽은 선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이 쓴 원고는 다시 읽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벗어놓은 양말 냄새를 맡는 기분이 들어서라고 하였다. 내 그림은 벗어둔 양말을 모아둔 빨래통에 가깝다.


내 그림을 통해 작은 존중이라도 받고 싶었다

갤러리에서는 5만 원을 입금해주고 재료비 영수증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래야 근거가 남는다고 했다. 나보다, 내 작품보다 아크릴 물감과 페인트 마커 목록이 찍힌 영수증이 더 존재감이 있다는 말로 들렸다. 일러스트 전문 갤러리에서 중요한 건 작품이나 작가가 아니었다. 영수증이었다. 영수증이 있어야 예산도 지급되었다. 어린이대공원역에 그려진 돈키호테는 5만 원짜리 영수증과 같았다. 적어도 서울시 공무원 눈에는 그랬다.

그림으로 재능기부한다고 하면 좋은 일로 여긴다. 좋은 일이라면 그저 아무 조건 없이 해주는 일로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그림을 맡기는 쪽에서는 청소년이라든가 사회 취약 계층, 더 크게는 사회복지를 들먹이며 당당하게 부탁한다. 자신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명분이 곧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도 보상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럴 때는 정중하게 거절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꾸도 안 한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메일을 보내고 내 답장을 기다리다, 답장을 받지 못하면 금세 포기해버린다. 즉, 메일 한 통 보내는 성의만 보인다. 내가 그림을 그려주면 메일 한 통 보내는 성의에 대답하는 꼴밖에 안 된다. 마치 어린이대공원역 돈키호테가 5만 원짜리이듯 말이다.

굳이 기부라고 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돈 안 받고 그림 그리는 일이라고 불러도 괜찮다. 대신 내 조건은 분명하다. 상대방이 내 그림을 존중해주느냐, 돈 안 받고 그릴 만큼 재미있느냐. 둘 중 하나라도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억지 춘향이 되고 만다.

그러려고 그림을 시작한 게 아니었다. 초심은 재미였다. 내 그림을 통해 작은 존중이라도 받고 싶었다. 나는 킨코스가 아니다. 그림을 만드는 기계나 프린터가 아니다. 그림 주고 돈 받는 비즈니스에서 살짝 벗어나 숨통을 트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기부라는 방법을 찾게 된 것뿐이다.


“이러면 한 번 참여한 작가가 또 참여하고 싶을까요?”

전시를 마치고 검은 눈동자의 큐레이터에게 물어보았다. 평소답지 않게 그녀는 머뭇거렸다. 마치 내가 무슨 힘이 있느냐고, 나는 그저 한낱 고용된 큐레이터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녀의 눈에서 다시 뜨거운 열정이 느껴진다면 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갤러리에서는 아니다.

나도 그녀 못지않게 뜨겁다. 그리고 뜨거운 만큼 차갑기도 하다. 뜨거운 물이 냉동실에서 더 빨리 언다. 믿지 못하겠다면 한번 실험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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