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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감 표면에 새하얀 천연당분이 가득!

벽화를 그리는 순간… 완주, 내 안으로 들어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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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완주에 벽화를 그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상주나 장수처럼 완주도 기껏해야 고속도로에서 스쳐가는 이정표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기찻길 작은도서관에 벽화를 그리기 전까지는 완주에 아는 사람 한 명 없었다.

 
내가 즐거우면 세상도 즐겁다
밥장 장석원 저 | 마음산책
여기 실제로 자신의 작은 재능으로 세상을 바꾸는 그림작가가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대기업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이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밥장, 그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은 물론, 타인, 세상과 소통하는 삶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재능기부란 무엇일까? 그는 어떻게 재능기부를 시작했고, 왜 재능기부를 하게 되었을까? 『내가 즐거우면 세상도 즐겁다』는 재능기부로 자신의 세상을 즐겁게 바꾼 밥장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사철 철쭉이 피어나는 도서관

7월 초 완주를 다시 찾았다. 자전거도 차 트렁크에 싣고 고산 자연휴양림에다 방을 잡았다. 이번에는 그림 때문에 온 건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왔다. 화살을 쏘지 않을 때는 활시위를 풀어두어야 탄성을 잃지 않는다. 스트레스란 활시위를 늘 팽팽하게 당겨놓은 활과 같다.

좋아서 그림을 그린다고는 하지만 슬럼프가 찾아오면 어떻게 이겨내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슬럼프는 피곤하면 찾아온다. 사흘 밤을 새우면 실크 감촉의 빅토리아 시크릿보다 홀아비 냄새 나는 이불이 더 사랑스럽다. 피로는 간 때문이 아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간이 상하는 것이다. 딱 일주일만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쉬어보자. 어김없이 손이 근질근질해진다.

창문을 여니 초록이 창문 가득 쏟아졌다. 길 건너 계곡에는 물이 넉넉했다. 이불을 펴고 누워 창밖을 보았다. 빡빡한 초록 위로 하늘은 부드러운 회색을 띠었다. 한 방울만 새면 빗물이 주르륵 흐를 것 같았다. 방충망이 피톤치드와 음이온을 곱게 걸러주었다. 수련 모임을 왔는지 남자들과 여자들 웃음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빗방울이 떨어졌는지, 아니면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다. 청바지를 입은 채로 잠이 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잘 잔 게 얼마 만이야.”

혼자 여행을 다니면 혼잣말이 부쩍 는다. 혼잣말은 호기심과 놀람, 감탄으로 채워진다. 썩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지만 닳아빠진 비누한테 말을 거는 것보단 낫다. 엄지발가락까지 힘을 주며 실컷 기지개를 켰다. 남쪽에서 장마와 태풍이 한꺼번에 올라오고 있었지만 아직 하늘은 태풍에 반항이라도 하듯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푸르고 깨끗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구름도 한몫 거들었다. 새벽 구름은 완주에서도 여전히 섬세했다.

“비 온다고 해서 너 못 볼 줄 알았다.”

노란색 자전거를 트렁크에서 꺼냈다. 삼단으로 접힌 자전거를 익숙한 솜씨로 펼쳐서 골반 높이에 맞춰 안장을 높이고 페달을 밟았다. 새벽이라 아무도 없었다. 숲 속 공기는 갓 구운 페이스트리처럼 여러 켜로 쌓여 있었다.

차르륵차르륵 체인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휴양림을 빠져나와 찻길을 따라 고산읍으로 갔다. 작은 다리를 건너며 만경강을 바라보았다. 고산에서 자란 친구는 고향이라면 만경강부터 아른거린다고 하였다.


만경강은 한강과 많이 달랐다. 둔치와 오미에는 풀과 물과 흙이 자연스럽게 넘나들었고 강물과 물풀은 바람 부는 대로 넘실거렸다.


철쭉 꽃밭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

소양면에서는 우리나라 조경에 쓰이는 철쭉의 절반을 재배한다. 중앙 분리대 화단이나 길가에 심은 철쭉 두 그루 중 하나는 소양면 출신인 셈이다. 봄이 오면 소양면은 온통 철쭉 꽃밭이다. 철쭉이 활짝 필수록 주민들의 지갑은 두둑해진다. 소양면 작은도서관의 이름은 예상대로 ‘철쭉 작은도서관’이었다. 작년에 겨울이 다가올 무렵 여기에 벽화를 그렸다.

“봄이 되면 온통 철쭉으로 덮여요.”

하지만 11월에 찾은 철쭉 꽃밭은 그저 말뿐이었다. 거무스름한 흙더미를 보고 분홍색 꽃밭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옷깃을 여미고 손바닥을 비비며 마을을 둘러보았다. 철쭉의 고장인데도 철쭉 그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우리 집에 내 그림이 한 점도 걸려 있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철쭉이 피지 않는 계절을 위해 진부하지만 철쭉을 그려보기로 하였다. 단 내 방식대로 살을 붙여서.

몇 년 전 피카소 전시를 보았다. 좋아서라기보다는 의무에 가까웠다. 필기시험을 치러야 운전면허를 딸 수 있는 것처럼 전시회 티켓을 샀다. 별 생각 없이 작품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다 출구에 거의 다 왔을 무렵 눈이 번쩍 뜨였다. 에칭 작품들이었다. 가느다란 철심으로 그린 선은 춤을 추듯 경쾌했다. 홀린 듯 한참 바라보았다. 그림을 보는데 음악을 듣는 기분이었다. 반은 사람, 반은 동물인 목신들이 숲속에서 피리를 불며 뛰어놀았다.


페인트 마커로 벽에다 철쭉을 그렸다. 피카소가 보여준 목신들이 떠올랐다. 나뭇잎 왕관을 쓴 목신들이 철쭉 사이를 뛰어다녔다. 철쭉과 목신들이 늘어날수록 세 박자, 네 박자, 다섯 박자로 그림에 리듬이 더해졌다. 간간이 작업을 지켜보던 소양면장과 면사무소 직원들이 백비트로 끼어들었다. 분홍색 아크릴 물감으로 철쭉에 색을 입히고 철쭉 주변에 노랑으로 동그란 점을 그렸다. 분홍은 노랑을 만나면 섹시해진다. 철쭉을 칠하면서 지워진 선들은 깨끗하게 다시 그렸다. 그림을 마무리하면서, 돌아오는 봄에는 꼭 철쭉 꽃밭을 보겠다고 다짐했다.

『책여행책』의 작가는 고흐의 작품을 보고 직접 아를의 밀밭까지 갔지만 실제로 보니 유럽의 다른 밀밭과 다를 게 없었다 했다. “그때 고흐가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그는 오렌지 빛 석양이 프로방스의 대지를 ‘파랗게’ 물들이는 모습을 발견하고 아를을 재창조했다.” 그는 고흐의 눈으로 아름다워진 아를을 보았다고 자랑했다. 내가 그린 철쭉 꽃밭을 보고 밥장의 눈으로 아름다워진 소양면을 보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을까.

초여름에 소양면을 다시 찾았다. 소양면은 철쭉 꽃밭만큼은 아니지만 벚꽃 길로도 꽤 유명하다. 어머니는 벚꽃이 한창일 무렵 왔었는데 얼마나 좋았는지 내가 소양면에 간다고 하니까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도 벚꽃 길을 달려보았다. 벚꽃 대신 나뭇잎만 빽빽했고 길바닥에는 버찌가 까맣게 떨어져 있었다. 달리다 보니 차 앞바퀴와 옆문이 금세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버찌를 떼어 먹었다. 생각보다 훨씬 달고 맛있었다.

올해는 봄이 너무 추워서 철쭉이 제대로 피지 못했다고 했다. 게다가 제철을 살짝 넘긴 뒤였다. 결국 벚꽃도, 철쭉도 보지 못하고 철쭉 꽃밭은 다시 내년 봄으로 미뤄야 했다.


맛보셨습니까? 동자개와 고종시

활짝 핀 꽃은 아름답고, 막 시든 꽃은 섹시하다. 대아 수목원에는 장미가 한창 시들시들했고 검은 흙 위에 산딸나무 꽃잎이 떨어져 있었다. 마치 클럽 VJ가 만드는 스크린샷처럼 보였다. 사진을 찍으며 언덕 위로 올라갔다. 꽃창포와 붓꽃이 묵직하게 피어올랐다.

끼니를 거르면서 여행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난 반대다. 그런 사람은 여행 파트너로도 최악이다. 셋이서 2인분 시켜 나눠 먹자는 사람 못지않다. 다행히 동상면장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약속을 잡았다. 식당에서 만나자고 해서 알려준 대로 찾아갔다. 수목원 입구 근처였다. 식당은 식당인데 간판이 없었다. 식당 주인은 동상면 부녀회장이었다. 식탁 위에선 이미 동자개탕이 푸짐하게 끓고 있었다. 동자개는 보통 ‘빠가사리’라고 부르는데 이곳 저수지에서 잡히는 자연산 민물고기다. 금낭화무침, 다래순무침, 개망초나물이 하나씩 식탁 위에 놓였다.

동상면장은 멀리서 온 손님이라며 건더기로만 떠주었다. “이건 왁대라고도 하고 질름지라고도 해요.” 동자개탕에서 민물 새우를 건져 올리며 설명해주었다. 직접 잡은 질름지와 동자개라 그런지 흙냄새가 나지 않았다. 데친 호박잎 위에 밥 한술 얹고 강된장을 발라 입에 넣었다. 동자개탕 국물 한 숟가락에 민물 새우는 껍질째 씹었다. 금낭화무침과 개망초나물도 곁들였다.

후식으로는 동상면의 명물 고종시를 내왔다. 산에서 자라는 감나무에서 딴 감을 바람에 말렸다. 특이하게 씨가 없고 겉은 밀가루처럼 하얗다. 천연 당분이었다. 조금 지나면 찐득해질 정도로 달았다.


동상면 사람들은 10월 초순부터 25일 사이에 감을 따고 11월 초부터 중순까지는 곶감을 만들기 위해 감을 깎는다. 곶감은 바람으로 만든다. 햇볕에 말리면 속이 완전히 마르지 않아서 금세 상한다.

만약 완주에 벽화를 그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상주나 장수처럼 완주도 기껏해야 고속도로에서 스쳐가는 이정표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기찻길 작은도서관에 벽화를 그리기 전까지는 완주에 아는 사람 한 명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주 와일드 푸드 축제’나 ‘책 읽는 지식 도시 완주 Book Festival’에 초대받는 사람이 되었다. 하긴 따지고 보면 세상에 원래 아는 사람이라고는 어머니밖에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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