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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에서 시작된 완주와의 인연

완주에 오면 왜 늘 여자 마음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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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에 오면 난 여자 마음이 된다. 능이버섯 무침과 적당히 삭힌 홍어를 묵은지에 싸서 오물거리고 나서 완주를 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다음에 그릴 곳은 화산면 작은도서관. 화산면에는 사람보다 한우들이 더 많이 산다.

 
내가 즐거우면 세상도 즐겁다
밥장 장석원 저 | 마음산책
여기 실제로 자신의 작은 재능으로 세상을 바꾸는 그림작가가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대기업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이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밥장, 그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은 물론, 타인, 세상과 소통하는 삶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재능기부란 무엇일까? 그는 어떻게 재능기부를 시작했고, 왜 재능기부를 하게 되었을까? 『내가 즐거우면 세상도 즐겁다』는 재능기부로 자신의 세상을 즐겁게 바꾼 밥장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인연은 혀끝에서 시작되었다

연애를 해본 사람들은 안다. 인연이란 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자꾸 들이대야 확률이 높아진다. 대학 다닐 때 연애의 달인이라 불리던 친구가 비법을 알려주었다. 길거리에서 처음 보는 여성들에게 무작정 말을 걸어보라고, 자기 경험으로 볼 때 약 17퍼센트는 차 한잔 마실 수 있다고. 그러니 일단 말부터 걸어보라며 소심한 날 도닥였다.

완주군과의 인연도 마찬가지다. 2009년 초 작은도서관에 벽화를 그리고 싶다고 온 동네에 떠들었더니 기회가 찾아왔다. 완주군 도서관 담당자가 메일을 보내왔다.

안녕하세요?
우리 완주군은 전라북도 전주시를 둘러싸고 있는 농촌입니다. 상관면 기찻길 작은도서관은 완주군 도서관과 가장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주민들의 문화 욕구는 오히려 가장 큽니다.
작은도서관이 생기는 아파트 옆으로 신리역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물이 맑아 만덕산에는 정수사淨水寺라는 천 년 고찰이 있습니다. 알칼리성 유황 온천수도 유명합니다. 작은도서관을 조성하면서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던, 명필 창암 이삼만 선생의 문화가 이곳에 남아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기찻길 도서관에 그림을 그릴 곳은 유아실 온돌 공간 옆 벽면입니다. 면적은 가로 3미터, 높이 2.4미터입니다. 예쁜 그림을 주시면 널리 자랑하겠습니다.

얼른 붓과 물감, 물통, 팔레트를 챙겨 트렁크에 실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핸들을 잡았다.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완주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완주군 상관면에 이틀 동안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기찻길 작은도서관이란 이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도서관에서 꼬물꼬물 기찻길이 뻗어나가고 아이들 얼굴을 닮은 꿈붕어들이 헤엄치는 모습을 그렸다.


그림을 마치자 도서관 담당자가 아중역 근처의 한정식을 하는 식당에서 저녁을 샀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완주에 푹 빠지게 되리라는 걸 말이다. 터닝 포인트는 늘 과거형이다.

밥상 위에 놓인 음식들이 내 눈과 입을 사로잡았다. 『미스터 초밥왕』처럼 밥알과 반찬이 입속에서 탱고를 추었다. 그 뒤로 서울에서 말도 안 되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울 때마다 나도 모르게 완주를 외쳤다. 파블로프의 개가 따로 없었다. 사랑은 혀끝에서 시작되었다.

2010년 10월 서울의 밥맛에 애써 적응할 무렵 또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완주군 기찻길 작은도서관을 담당했던 분이었다. 날 ‘개’로 만든 바로 그분.

안녕하세요.
밥장 님이 완주군 상관면 기찻길 작은도서관에 벽화를 그려주신 뒤 변변한 문화시설 하나 없던 상관면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2009년 3월 개관한 뒤 인구 오천백여 명 중 천여 명이 독서회원으로 가입하였습니다. 꿈붕어 그림 아래서 책을 읽고, 문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각종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답니다.
이제 꿈붕어 벽화는 기찻길 작은도서관의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이곳을 찾는 분들마다 도서관을 더욱 밝게 해주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그림 덕분인지 몰라도 이용자도 많이 늘었습니다. 그림 속 꿈붕어들처럼 주민들의 꿈과 행복지수가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메일을 다 읽고 ‘그렇게 고마우면 밥이나 한 번 더 사지’라고 말할 뻔했다. 내가 유치한가 싶었지만 완주의 밥맛 앞에서는 별 재간이 없었다. 욱하는 마음을 추스르고 예의를 갖춰 답장을 보냈다. 그래도 허기는 여전했다. 내 뱃속 상태를 알았는지 담당자는 한 달 뒤에 또 메일을 보냈다.

밥장 님.
부탁이 있어요.
완주군 소양면에 철쭉 작은도서관을 조성 중인데 하얀 벽면을 남겨놓았습니다. 철쭉 농사는 완주군 소양면의 생업입니다. 붓글씨와 농약 사용법을 가르치던 주민자치센터 1층에 작은도서관을 만들고 있습니다. 도서관이 생기면 조용하던 소양면에 재잘재잘 이야깃거리가 생기고, 꿈을 꾸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마을 주민들은 아무래도 그림을 볼 기회가 적습니다. 작은도서관에서 밥장 님의 그림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밥장 님께 재능기부를 부탁합니다.

다시 곧바로 붓과 물감, 물통, 팔레트를 챙겨 트렁크에 실었다. ‘이번에는 뭘 또 맛있게 먹을까?’

완주까지 세 시간을 달렸지만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이틀 동안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역시 철쭉 작은도서관이란 이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꽃분홍 철쭉들이 피어 있는 사이로 숲의 요정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번에는 완주군수가 점심을 샀다. ‘골목집’이라는 밥집이었다. 청국장이 끝내줬다. 흔히 청국장 하면 고약한 냄새를 떠올린다. 그래서 나도 거의 먹지 않았다. 하지만 제대로 만든 청국장은 달랐다. 역겨운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솥에 갓 지은 밥을 슥슥 비벼 입안에 넣으니 밥알이 춤을 추었다.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점심을 먹고 하이트 맥주 공장에 들렀다. 공장장이 마중을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색으로 맞춰 입고 견학로를 따라 걸으며 맥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커다란 맥주 저장고를 가리키며 저장고 하나가 “하루에 500cc 한 잔씩 비워도 35년을 마셔야 할 분량”이라고 설명해주었다. 함께 간 군수는 자기는 벌써 한 통 다 비우고 두 통째라고 하였다.

마무리는 시음이었다. 맥주 좀 홀짝거려봤다는 사람들에게 맥주 공장은 성지나 다름없다. 원액이라고 불리는 맥주 탱크에서 갓 짜낸 생맥주를 마셨다. 마셔본 사람은 안다. 목젖을 타고 내려오다가 느닷없이 탕! 하고 가슴을 ?리는 그 느낌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크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림을 핑계로 이틀을 머물렀는데 끼니마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군수는 물론 면장, 도서관장, 지역 주민들까지 돌아가면서 완주의 참맛을 보여주었다. 콩나물국밥, 연잎밥, 다슬기 비빔밥을 차례로 먹고 고종 황제에게 진상했다는 상동면의 명품 곶감 고종시까지 챙겨 먹었다. 구제역 청정지역인 완주군의 한우도 빼놓을 수 없었다. 야들야들한 육질의 고기는 숯불 위에서 금세 익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냄새는 무슨 주문처럼 소주를 불렀다. 완주는 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서울살이에 집 나간 입맛까지 되돌려주었다.


완주에 오면 늘 여자 마음이 된다

지난 1월에 KBS에서 재능기부를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촬영했다. 촬영 나온 피디는 어디서부터 찍을지 물어보았다. 그래서 입맛을 다시며 완주군 작은도서관부터 하자고 추천하였다. 피디와 함께 기찻길 작은도서관과 철쭉 작은도서관에 들렀다. 카메라 앞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 와중에도 주책없이 입안에 침이 고였다. ‘오늘 저녁은 뭘 먹지?’라는 생각뿐이었다. 만약 머릿속을 찍었더라면 재능기부 다큐멘터리보다는 맛집 기행 프로그램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매슬로가 말했던가, 욕구에는 단계가 있다고. 자아실현은 멋있다. 하지만 식욕 앞에서는 언제나 와르르 무너진다. 오늘도 노트 한쪽에 화산면 작은도서관과 홍시 갤러리를 어떻게 꾸밀지 빼곡하게 적어본다.

완주에 오면 난 여자 마음이 된다. 능이버섯 무침과 적당히 삭힌 홍어를 묵은지에 싸서 오물거리고 나서 완주를 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다음에 그릴 곳은 화산면 작은도서관. 화산면에는 사람보다 한우들이 더 많이 산다. 벌써 숯불에 구운 야들야들한 안창살 냄새가 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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