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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월급 모아 유럽 온 이유가 명품 가방 하나 사려고?

밀라노에서 한눈에 알아본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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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해서 아침 일찍 「최후의 만찬」을 보러 갔다. 예약이 취소되면 남는 티켓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역시 티켓은 없었다. 괜히 간 모양이다.

 
아빠의 자격: 고씨 부자의 유럽 42일 생존기
고형욱,고창빈 공저 | 사월의책
아빠와 아들, 절친이 되다!
대책불가 사춘기 아들을 변하게 한 아빠의 고군분투기

요즘 아빠는 돈 버느라, 아들은 학원 다니느라 바쁘다. 일주일에 한두 번 얼굴 보는 게 전부이고, 가족 간의 대화도 사라진 지 오래다. 이대로 괜찮을까? 아빠는 결심한다. 사춘기 아들을 위해 선물을 해주기로! 바로 아빠와 함께하는 유럽 여행이었다. 그것도 42일간의 긴 서유럽 일주. 1,000시간 동안 아들과 단둘이 지내다 보면 아들도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혹시나 해서 아침 일찍 「최후의 만찬」을 보러 갔다. 예약이 취소되면 남는 티켓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역시 티켓은 없었다. 괜히 간 모양이다. 막상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앞까지 갔는데 볼 수 없다니 섭섭했다. 미련을 가지는 게 아니었는데….
평소보다 너무 일찍 나온 것 같다. 하품이 나온다. 뭘 해야 하나. 별다른 목적이 없었다. 그냥 앞을 향해 걸어가는데 눈앞에 나타나는 게 개선문이다. 셈피오네 개선문. 맞아, 밀라노에도 개선문이 있었지. 창빈이랑 세 번째 보는 개선문이다.

“아들, 또 개선문이다!”
“웬 개선문이 이렇게 많대?”
“야, 왕이나 공작이나 전쟁에서 이기면 기념 삼아 지은 게 개선문이야.”
“그냥 아무나 막 짓는 거야? 파리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너무 많네.”


개선문에 대한 환상이 깨진 표정이다. 개선문만 보면 사진을 찍고 싶던 욕망도 사라져버린 것 같다. 셔터에 손이 가지 않는다. 원래는 개선문을 좋아하지 않았느냐고 부추겨가면서 사진을 찍게 하는 신세라니. 바르셀로나에 이어 오랑주, 밀라노에서까지 개선문을 만나니 값어치가 떨어져 보인다. 개선문도 어쩌다 한 번 보여줘야 가치가 있지. 따져봐야겠다. 앞으로 남은 개선문이 몇 개나 되나?

쉬엄쉬엄 브레라 미술관을 향해서 걸었다. 밀라노에서는 브레라 미술관까지 이탈리아 3대 미술관이라고 부른다. 양대 미술관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우피치 미술관과 바티칸 미술관이다. 브레라는 영원한 ‘넘버 쓰리’ 미술관이다. 우피치와 바티칸은 서로 자기네가 최고라고 과시하지만 최고라고 내세울 수 없는 브레라는 3대라는 단어를 쓴다. 어찌 보면 열등감을 둘러친 표현이다.

브레라 미술관 전경

티켓을 사는데 창빈이도 어른 티켓을 끊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11유로를 다 내라고? 국제 학생증으로도 할인이 되지 않는단다. 한참을 따졌다. 왜 다른 나라는 다 할인이 되는데 이탈리아만 이러냐. 어른까지 할인해달라는 얘기가 아니지 않느냐. 애한테 당신 나라 문화를 소개해주는데 격려해주진 못할망정 이게 뭐냐.

혼자 다닐 때는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어른이야 의당 입장료를 내는 거니까. 그런데 애들 경우는 다르지 않은가. 자기 문화를 알리려면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아이들한테는 투자를 해야 한다. 아이들의 어릴 적 기억은 오래 남는다. 아이들이 가야 할 곳이라면 어른들은 빚을 내서라도 데려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투자는 못할지언정 어른이랑 똑같은 가격을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이건 눈앞의 욕심만 챙기는 일이다. 이탈리아, 마음이 가난한 나라다. 장사꾼들 같으니라고….

패션의 도시 밀라노. 패션 관계자들은 일 때문에 오겠지만 관광객들에게는 불친절한 도시다. 쇼핑이 아니면 별로 할 일이 없다. 볼거리라고 해봐야 사실 두 가지다. 「최후의 만찬」과 두오모. 그 외의 장소까지 찾아다녔다는 사람은 거의 만난 적이 없다.

브레라 미술관에서 내려오는 길에 라 스칼라 극장도 훑어보았고 명품 숍들이 몰려 있는 웅장한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갤러리도 둘러보았다. 브레라의 만행으로 큰 관심 없는 밀라노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에 대한 인상을 초장부터 구기고 말았지만, 그래도 보여줄 건 보여줘야지. 두오모나 올라가자.

웅장한 밀라노의 두오모

두오모에서 내려다본 풍경

점심시간에는 두오모 꼭대기까지 계단으로 못 올라간다고 한다. 출출해서 밥부터 먹기로 했다. 그런데 물가는 비싸고 식당은 전부 관광객용 식당뿐이다. 잘못하면 맛은 맛대로 없고 바가지까지 옴팡지게 뒤집어쓸 판이다. 그때부터 골목이란 골목은 다 뒤지면서 식당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겨우 발견한 허름한 식당 하나. 손님은 전부 현지인들이고 값도 싸고 분위기도 무난했다. 다행이다. 음식이라도 괜찮아서. 기대하지 않은 횡재를 한 기분이다.

두오모 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은 길고 가파르다. 중세 사람들이 오르던 길을 현대인이 똑같이 오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영차, 영차. 명동성당도 이렇게 개방하면 어떨까. 유럽의 성당들은 그 도시를 대표하는 관광지인데 우리나라 성당들은 경건하기만 하다.

바깥이 보였다. 정상까지 올라가려면 약간 남았지만 잠시 숨을 돌리기로 했다. 규모도 거대하고 외관도 화려하다. 장식탑들도 많고 조각상들도 많다. 두오모를 둘러싸고 솟아 있는 탑 꼭대기마다 성인의 조각상들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늘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젊은 아가씨 셋이서 명품 백을 하나씩 매고 등장했다.


“우리나라 여자들이다.”
뒷모습만 보고 얘기했더니 창빈이가 물어본다.
“어떻게 알아?”
“저게 바로 악명 높은 쇼핑 여행이야. 전부 명품 백 하나씩 맸잖아.”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해주었다.
“아, 그래?”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를 들어보니 우리나라 아가씨들이다.
“너 사진 좀 찍고 일기에도 좀 써라. 완전 꼴불견 아니니?”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이 쇼핑에만 눈이 먼 관광객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전혀 예상 밖의 대답을 들었다.

“그래? 난 그런 거 같지 않은데. 돈 모아서 유럽까지 여행 와서 구경 실컷 하고, 먹을 거 안 먹고 아껴가면서 명품 백 하나 사면 본전 뽑는데, 나 같아도 그럴 것 같은데. 아마 내 친구들도 그럴걸. 얼마나 갖고 싶었으면 그렇게 고생하면서 가방 하나 사? 목적이 뚜렷하잖아.”

땡! 충격! 골이 울린다. 처음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사실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88만원 세대도 여행은 해야지. 그런데 몇 달 모은 월급을 톡톡 털어서 유럽 온 이유가 가방 하나를 사기 위한 거라면? 두오모 지붕 위에서 나의 편견이 흔들렸다. 여전히 가방을 사는 게 잘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전혀 다른 관점이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밀라노 하늘 위에서의 묘한 깨달음이다.

날씨는 쾌청했다. 햇살은 뜨거웠지만 높은 곳에 올라갔더니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창빈이는 건물 벽에 기대고 아예 드러누웠다. 그렇게 쉬고 있으니 어느새 뜨거운 여름 태양도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보고 싶은 곳도 갈 데도 없었다. 숙소로 향했다. 어제와 오늘은 거의 쉬지도 못했다. 내일도 베네치아로 이동해야 한다. 일찍 들어가서 느긋하게 자빠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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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자격

<고형욱>,<고창빈> 공저13,320원(10% + 5%)

아빠는 한탄한다. "도대체 요새 애들은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이 소중한 시기를 왜 저렇게 보낼까?" 주말에 외식하고 영화 구경이나 가는 것으로 아빠의 소임을 다했다고 믿는 주제에! 비단 이 책의 저자 고형욱, 고창빈 부자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아빠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대한민국의 모든 아빠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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