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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왜이리 고독을 들먹이셨나요?

고독을 물리친 무기는 바로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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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고독이란 정녕 뭔가요?”“…… 너 뭘 잘못 먹었냐?”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지청구만 들었으리라. 대화의 씨가 마른 부자간에 웬 ‘고독’ 타령이란 말이냐.

“아빠, 고독이란 정녕 뭔가요?”
“……… 너 뭘 잘못 먹었냐?”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지청구만 들었으리라. 대화의 씨가 마른 부자간에 웬 ‘고독’ 타령이란 말이냐. 생전에 아버지를 향해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질문이다. 다음과 같은 궁금증 따위도 마찬가지다. “제 나이 땐 꿈이 뭐였나요?” “인생에서 가장 기쁠 때가 언제였죠?”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이 있기는 했나요?”

병석에서도 그랬다. 나는 소 닭 보듯 아버지의 눈동자를 힐끔거렸다. 형제간에 간병 당번이 돌아올 때도 똥 오줌을 치우고 호스를 갈아끼우는 기계적인 병 수발을 했을 뿐이다. “아버지, 많이 아프시죠”라는 의례적인 인사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식물인간과 다를 바 없이 하루하루 최후를 향해 말라비틀어져가는 육신이 눈물겨웠지만, 그뿐이었다. 대개의 아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멀뚱멀뚱’한 시선에 충실했고, 말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고독했을 당신은 속으로 이렇게 탄식하지는 않았을까. “멋대가리 없는 자식!”

뭐, 그래도 절반은 아버지 탓이다. 부전자전이다. 윗물이 서로 간에 교감하고 공유할 만한 그 어떤 건덕지를 만들어놓지 않았는데, 아랫물이 몽땅 그 책임을 뒤집어쓰기는 불공정하다. 이 참에 한마디 드려야겠다. 아버지, 아버지도 멋대가리 없었답니다. 우리 집 삭막했잖아요.

물론 겉으로 비친 모습이었을 뿐이다. 표면과 이면의 격차는 컸다. 이 땅의 무뚝뚝한 아버지들처럼, 당신은 독백을 즐겼다. 특이한 점이라면, 그 독백을 꼼꼼하게 체계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남긴 스크랩을 들춰보며 그 사실을 확인한다.

아버지가 만든 1960년대 수제 스크랩북. 모두 40년이 넘었다.

아버지는 당신이 만 24살 때인 1959년부터 신문 스크랩을 시작했다. 군대에 입대하기 직전이었다. 16절지(A4용지 크기에 해당하는) 도화지 50~100장씩을 링으로 묶고 나무판을 앞뒤로 대어 만든 수제 스크랩북이었다. 여기에 스스로 취사선택한 주요 신문기사들을 오려붙였다. 사건기사와 사설?칼럼에 만평과 4컷만화, 사진들을 곁들였다. 펜으로 세상사에 대한 코멘트도 끼적거렸다. 시도 적었다.

처음의 결심이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이 스크랩북 작업을 1992년까지 34년간 했다. 처음에 붙였던 ‘墓碑’(묘비)라는 제목이 제25권까지 이어졌다. 제1권엔 하수상하던 50년대 후반의 정치상황이 녹아있고, 마지막 제25권엔 1992년 여름에 열린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의 환호성이 펼쳐져 있다. 아버지는 제26권의 껍데기만 만든 뒤 단 한 장의 신문기사도 채우지 못한 채 1993년 1월 진짜 ‘묘비’ 밑으로 들어가셨다. 환갑을 두 해 앞둔 나이였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이다.

나는 이제 그 아버지의 분신과 같은 흔적을 붙잡고 씨름을 하려고 한다. 덕지덕지 붙은 빛바랜 뉴스의 조각들에서 지난 역사의 디테일들을 뜯어보고, 볼펜 글씨로 남은 시와 낙서의 행간에서 그 손길과 마음의 한 자락을 곱씹어볼 계획이다. 가끔씩 꿈에 나타나는 그와 뒤늦게나마 진지하게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게 되는 셈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공기도 호흡해보고 싶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아빠, 고독이란 정녕 뭔가요?” 이 말을 꺼낸 이유가 있다. 스크랩북 제1권 첫 장에 수록된 시의 제목이 ‘孤獨(고독)한 芝草(지초)’이기 때문이다.

스크랩북 ‘묘비’ 제1권 첫 장을 넘기면 나오는 그림과
시 한편.‘고독’은 20대 청년이었던 아버지의 화두였다.

외로운 芝草(지초)의 靈魂(영혼)은 통곡을 한다
아무도 깃들지 않는 古木(고목)을 사랑하기에
높은 하늘을 구슬프게 노래 부른다

사랑을 못 잊어 목매이게 부르는 추억
새장에 창살은 못 박은 듯 말이 없는데
푸른 軍服(군복) 훈장은 녹슬구만 있구나

짝 잃은 날짐승도 외롭다 우는구나
뉘라서 孤獨(고독)한 것 모른다 할까마는
얼굴 젖은 눈물이 芝草(지초)밥이 되었구나

바람은 黃金(황금)처럼 古木(고목)을 스쳐가고
사랑도 구름처럼 머물다 지나가네
한 세상 살다보면 지난 후에 잊으리라
(1959. 3. 7)

아버지의 아호는 ‘지초’였다. 존경하는 어떤 어른이 지어줬는지, 아니면 스스로 붙였는지는 모른다. 어떤 뜻을 담았는지도 알 수 없다. ‘지초’는 고산지대에서 자생하는 약초 이름이다. 야생 지초는 고질병이나 난치병을 고친다는데, 아마도 세상에서 이런 역할을 하겠다는 과잉(!) 사명감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어쨌거나 시를 읽어본 감상은? 잘 모르겠다. 꽤 센티멘털한 청년이었군^^. 지금의 나보다도 까마득하게 젊을 때니까 후배를 지도 편달하는 마음으로 읽어볼까? 그러고 보니 상투적이고 유치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통곡…고목…짝 잃은 날짐승…고독…눈물. 이런 낱말들 사이로 허무의 냄새도 풍긴다.

스크랩북 1권 곳곳에 적힌 아버지의 글 속엔 유난히 ‘고독’과 ‘공허’란 단어가 많다. 스크랩북 제목을 ‘묘비’라 붙인 것도 인생의 덧없음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제대로 다시 한 번 따져보고 싶다. “아버지, 왜 이토록 고독, 고독, 고독을 들먹이셨습니까. 이십대 중반에 개인적으로 외로움을 껌처럼 씹을만한 번뇌가 많으셨나요? 그저 젊은 날의 관념적 악세사리였나요?”

스크랩북과는 별도로 아버지가 만들었던 풍경사진 앨범 중에서.
‘공허’라는 낱말이 눈에 띈다.

나도 어렸을 적엔 고독과 허무를 즐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쓴 시의 제목이 고3때 교지에 투고한 ‘사형수’였는데, 지금도 그 시 구절을 떠올리면 손발이 오글거린다. 이십대가 넘어서도 늘 혼돈스러운 안개에 휩싸여 서성거렸다. 그 바닥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이 놓여있었다. 거창한 철학적 번민은 아니었지만, 잠재의식은 그 화두로 꿈틀거렸다. 뭔가 확고한 진로가 결정되지 않은 처지였으니 당연했다.

2000년대를 사는 요즘의 젊은이들이라고 다를까. 4년 전 내가 만들던 신문의 인생 상담 코너에서 가장 빈번하게 쏟아지던 질문의 유형도 이것이었다. “정녕 어떻게 살아야 맞는 건가요?” 중심이 완전히 잡히지 않은 이십대 청춘은 누구나 고독한 척 하고 싶다. 요즘같이 대학 등록금이 비싸고 정규직으로 살기 어려운 고용불안 시대엔 더더욱!

결과로 보자면, 아버지가 고독을 물리친 무기는 스크랩이었으리라. 신문더미 에 빠져 보람과 희열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25권의 스크랩북 외에도 풍경사진에 감상적인 메모를 적은 한 권의 사진앨범과 신문에 실린 기획특집기사만을 모은 10권의 스크랩북도 따로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잡지 창간호는 반드시 구입했다.(으악! 10여 년 전 어머니가 창간호 잡지들을 몽땅 내다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 책 구입을 취미로 삼으셨다. 특별히 좋아했던 종교서적 외에도 시집과 소설책은 물론 정치적으로 위험한 사회과학 도서도 가리지 않았다. (나는 집에 책이 많아 질린다는 이유로 책을 읽지 않았다.ㅠㅠ) 그 많은 책을 다 읽기는 읽으셨나? 혹시 멋진 서가에 대한 소유욕 탓은 아니었나 하는 불경스런 의심까지 품어본다.

다음 회부터는 제1권을 시작으로 아버지의 스크랩북을 좀 더 활짝 펼쳐볼 계획이다. 어쩌면 부자간에 벌이는 한판의 게임이기도 하다. 이 게임을 관전하는 독자들이 ‘고독’하지 말고 ‘흥미’를 느꼈으면 하는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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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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