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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마이 슬립>으로 살펴 본 기억장애에 관한 영화들

주인공을 믿지 않는 관객과의 두뇌 싸움 살인범으로 몰린 몽유병 환자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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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로 판명나진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젊은 배우 히스 레저가 수면장애를 겪어왔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자살로 판명나진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젊은 배우 히스 레저가 수면장애를 겪어왔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젊은 시절의 열병을 앓아온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겪었을 수면장애는 직접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고통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독한 질병이다. 국내에는 뒤늦게 개봉한 < 인 마이 슬립 >의 주인공 마커스는 수면장애, 그것도 몽유병 환자이다.

당연하게도 마커스는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자신이 한 행동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 날 마커스는 피투성이가 된 채 잠에서 깨어나고, 친구의 아내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살인용의자로 몰린 마커스는 기억하지 못하는 전날 밤을 필사적으로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마커스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러 영화의 잔상을 읽게 된다. 기억상실과 수면장애, 살인의 흔적……. 딱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 메멘토 >이지 않은가. 하지만, 알렌 울프 감독은 치밀한 두뇌 게임보다는 주인공이 내몰린 상황이 주는 공포와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의 스릴러적 감수성에 보다 치중한다.


< 인 마이 슬립 >의 공포는 자기 자신이 정말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없는 불신, 점점 자신을 조여 오는 경찰의 수사망, 그리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몽유병 환자의 불안함에서 온다.

큰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진 못했지만 오마하 영화제에서 작품상, 호놀룰루 영화제 골드 카후나 상, 포트데일 필름 페스티벌 관객상, 베가스 필름 페스티벌의 각본상, 심사위원 특별상 등 인디 영화제에서 수상한 < 인 마이 슬립 >은 < 식스 센스 >와 < 메멘토 > 이후 주인공을 완전히 믿지 않게 된 관객과 두뇌싸움을 벌여야 하는 스릴러 장르가 가져야 하는 치밀한 계산과 섬세한 연출력에 있어서 메이저 영화와 비교해 조금도 뒤쳐짐이 없다.

오히려 인디 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비주류의 감수성을 빼곡히 담아낸 인디 스릴러의 모범 사례로 읽을 수 있다. 일부 평론가는 거장 히치콕의 감수성을 계승했다는 극찬을 보낸 바 있다. 스릴러 영화의 판도를 바꿀 만큼의 충격적이진 않지만, 이제는 너무 스마트해진 관객과 마지막까지 진실을 숨겨주는 전략은 성공한 셈이다. 결국 믿음과 진실이라는 두 가지 화두는 한 쌍으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 인 마이 슬립 >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수면장애, 기억상실, 자신을 불신하는 두려움을 말하는 영화들
< 이터널 선샤인 >

< 머시니스트 >

1991년 해리슨 포드가 주연을 맡았던 < 헨리 이야기 >라는 영화가 있다. 사고로 구사일생으로 다시 살아난 저명한 변호사가 기억을 찾아나가는 영화였다. 다정한 아내, 긴밀한 친구들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한 헨리는 결국 이 모든 위선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기억을 되찾은 헨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다. 멜로 중심의 영화였지만, 헨리가 처한 상황을 스릴러의 형태로 풀어가는 흥미로운 영화였다.

최근 맷 데이먼의 < 본 시리즈 > 역시 기억상실의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데 이야기의 중심축이 담겨있다. 미셀 공드리의 < 이터널 선샤인 >의 주인공 역시 상실된 기억 사이에서 고군분투한다. 이제는 자신의 기억조차도 믿을 수 없게 된 현실이 주는 공포는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영화 속에서 치밀하게 표현된다. 또한 비밀과 반전이라는 극적 효과도 뛰어나기 때문에 스릴러 장르에서 수면장애와 기억상실은 흔하면서도 독특한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엉성해서는 반전의 효과를 줄 수 없기 때문에 켜켜이 비밀을 숨겨야 하는 과학적 시나리오가 필요한 장르이기도 하다.

뼈의 골격만 남은 크리스천 베일의 모습에서 충격을 준 < 머시니스트 >는 수면장애를 겪는 환자 역할을 위해 실제로 20kg 이상을 감량했다고 한다. 장기 불면에 시달리는 기계공 트레버 레즈닉은 1년 동안 잠을 자지 못한 남자다. 트레버는 똑똑하고 예민한 사람이지만, 불면증 때문에 기억과 감각을 잃어간다. 우연한 사고의 주범으로 지목받은 트레버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범인과 공모의 동기를 찾아 헤맨다.

구체적인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사건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의 그림자를 쫓아야 하는 고단한 작업이다. 크리스천 베일의 몸을 내던진 호연에도 불구하고 < 머시니스트 >의 공포와 스릴은 아쉽게도 그다지 밀도가 있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데이비드 핀처와 로만 폴란스키를 읽을 수 있다. 주인공의 고단한 몸처럼 검푸른 멍이 맺힌 듯한 색감은 독특하다기 보다 이미 언젠가는 읽었던 적 있는 재미있는 책 같아서 아쉽지만, 수면장애라는 질병을 스릴러의 틀 안에 잘 녹여냈다.
< 메멘토 >

기억상실과 불면, 그 사이의 불신과 진실, 믿음 사이에서 생기는 공포와 스릴이라면 < 메멘토 >, < 인썸니아 >, < 인셉션 >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이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인 반향을 낳았던 < 메멘토 >는 기억을 10분밖에 지속시키지 못하는 사내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10분의 기억을 연결시켜 아내의 살인범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그는 10분 안에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만난 사람, 마주친 물건을 사진으로 찍고, 그 사진 속에 담긴 피사체와 관련된 사항을 기록한다.

그는 특히 중요한 일은 분실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 안에 새겨둔다. 관객은 레너드와 함께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두뇌싸움을 벌인다. 10분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에게 시간은 어쩌면 정지된 것과 같다. 우리가 흔히 현재라고 말하는 현실은 과거의 기억을 딛고 서 있지만, 레너드에게 현실은 모호함 그 자체이다. 시간과 기억의 싸움 속에서 어쩌면 시간이 승리한다는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지만, 영화 속 결말도 명쾌하지 않다. 오히려 10분만 지나면 이 모든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란 희망도 담고 있다. 주인공 레너드는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
< 인썸니아 >

< 나이트메어 시리즈 >

놀란 감독은 < 메멘토 >의 성공에 이어 알 파치노와 로빈 윌리엄스를 내세운 < 인썸니아 >를 만들었다. 살인범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형사 사이의 두뇌 싸움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 메멘토 >의 충격을 기대하는 관객에게 놀란 감독은 충격적인 스릴러 대신 불면증의 그 나른하고 권태로운 고통을 내세운다. 스릴러의 감수성보다는 알찬 두 배우의 심리극으로 이끌어간 < 인썸니아 >는 수면장애와 그 영향력에 대한 놀란 감독의 두 번째 관찰이라 할 수 있다. 일기와 메모를 매개로 역전된 시간구조를 실험한 < 프레스티지 >에 이어 최근의 < 인셉션 >은 꿈과 현실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논문에 가까운 영화이다.

놀란 감독은 실제와 가상이 혼재된 가운데, 사람들의 기억이 꿈과 현실 사이에서 표류하면서 만들어내는 충돌을 담아내면서 새로운 내러티브와 패러다임을 구축해 낸다. 이 사이에는 주인공인 내레이터를 절대 신뢰하지 않은 감독의 시선과 < 메멘토 > 이후 주인공을 진실하다고 믿지 않은 관객의 불신이 있다. 이러한 정신분석학적 내러티브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 의한 독자적인 발견은 아니다.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허문 구로사와 아키라의 < 라쇼몽 >이나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한 데이비드 린치와 찰리 카우프먼이 그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스릴러 장르에 대해 언급을 하자면 언제나 그 최고 선봉에 선 알프레드 히치콕이 이런 매혹적인 소재를 놓쳤을 리가 없다.

잉그리드 버그먼과 그레고리 펙이 주연을 맡은 1954년 작 < 스펠바운드 >에는 기억상실증과 편집증에 시달리는 주인공을 내세워 기억상실증 환자가 갖는 고통과 그 사이의 미스터리를 풀어간다. 이외에도 꿈과 연관된 영화라면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 나이트메어 > 시리즈가 있다. 잠이 들면 끔찍하게 살인을 당한다는 영화의 기조는, 불면증의 고통이 아니라 잠을 잘 수 없는 고통을 보다 강하게 그려낸다. 주인공의 꿈이 현실이 되는 기발한 소재는 이후 수많은 아류작을 낳았지만, 공포영화에서 보기 드문 꿈의 상상력과 그 몽환적 표현은 웨스 크레이븐을 뛰어넘은 사람이 없다. 최면과 기억상실에 대한 한국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 올드 보이 >, 김지운 감독이 그려낸 다중인격의 공포 < 장화홍련 > 등의 호러, 스릴러 장르에서 짜임새 있게 그려지면서 두 감독은 한국영화의 새로운 이야기꾼으로 자리 잡았다.

다시 < 인 마이 슬립 >으로 돌아와 보면 기억상실과 꿈, 은폐된 진실과 현실 사이의 두뇌싸움은 그 짜임새로 승부를 걸자면 신인감독이 저예산으로 도전해 볼 수 있는 매혹적인 소재인 것처럼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창조적인 플롯과 내러티브의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이미 벌어진 사건,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주인공 사이에서 관객은 시간을 되돌려 과거의 현장을 찾아야 한다. 죽인 사람이 있으니 살해당한 사람이 있다는 인과율 사이에서 은폐된 살인자를 찾아야 하는 것도 관객의 몫이다. 주인공이 완전히 결백하지는 않을 거란 불신이 이러한 장르 영화의 관객들이 가지는 당연한 의심이 되어버린 지금, 영화는 점점 더 명민해져야 한다. 시간과 인과관계 사이의 뒤엉킨 끈을 계속 이어가며 미로의 출구를 찾아주는 놀라운 이야기를 숨겨둬야 한다.

이미 어지간한 결말에서 충격을 받지 않는 관객과 싸우려면 어지간한 이야기로는 승부를 낼 수 없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 승부수를 띄운 < 인 마이 슬립 >. 간만에 만나는 인디 영화의 거칠면서도 짜임새 있는 스릴러의 서사 뒤에 숨겨둔 다층적 플롯을 발견해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글/ 최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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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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