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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리플리> 장미리는 왜 김인숙이 되지 못했나

드라마가 실패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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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미스 리플리>는 학력 위조에 휩쓸렸던 2007년의 대한민국, 그리고 정확히는 신정아의 스캔들로부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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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대한민국은 한바탕 '학력 위조'의 홍역을 앓았다. 아름다운 외모와 지성으로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었던 한 큐레이터로부터 시작된 학력 위조 스캔들은 정계로까지 번졌고, 결국 한국 사회 전반을 뒤흔들었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미스 리플리>는 학력 위조에 휩쓸렸던 2007년의 대한민국, 그리고 정확히는 신정아의 스캔들로부터 시작됐다. 아름답고 똑똑하(다고 평가받았)던 한 여자가 어떻게 자신의 학력을 위조하고, 이를 통해 성공하며, 몰락해 나가는가는 수많은 픽션이 탐낼 수밖에 없을 만한 매력적인 소재였고, <미스 리플리>에 대한 대중의 기대 또한 클 수밖에 없었다.

<미스 리플리>, 그리고 장미리의 의도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시작된 드라마인 만큼 <미스 리플리>의 의도는 명확해 보였다. 드라마는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한 여자의 거짓말이 불러오는 파장, 그리고 그 이면에 담겨있는 우리 사회의 속물주의. 학력 한 줄에 모든 인생을 바꿔버릴 수 있을 만큼 허술한 세상에 대한 증거를 내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진실이 반드시 진실로 보상받을 수 없는 세상에서, 이러한 드라마의 의도는 온당해 보였다.

장미리의 삶은 고단했지만, 오로지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 만으로 버텼다.
하지만 그 '건전한 희망'은 거짓말 한마디에 부질없이 버림받는다. ⓒMBC

그래서 <미스 리플리> 속 장미리의 운명은 처참하게 그려졌다. 친어머니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으로 흘러들어 가 말도 통하지 않는 일본의 지옥 같은 곳으로 입양가게 된 장미리의 운명은 그녀의 거짓말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절망적이었다.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한국으로 온 장미리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뒤바꿀 만한 거짓말에 대한 명분을 만들었다. 게다가 장미리는 애초부터 누군가를 작정하고 기만하려는 의도를 품지 않았다. 다만 우연한 기회에 시작된 거짓말이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금기지만 달콤한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그녀는 자신의 운명처럼 시작된 거짓말에 스스로 빠져들었다.

분명히 여기까지 <미스 리플리>의 세계는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장미리는 대중들의 공감과 연민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주어지지 않는 기회 앞에서, 우연히 시작된 거짓말이 열어준 기회를 부정하기란 그 누구라 해도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미리에 대한 연민과 공감은 딱 거기까지였다.

<미스 리플리>는 왜 '장미리와 호구들'이 되었나

장미리는 '동경대 출신'이라는 꼬리표 하나로 술집 접대부에서 특급 호텔의 객실 매니저로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한다. 꿈에서라도 갖고 싶었던 번듯한 인생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그녀는 자신이 위태로이 이룩해 놓은 세계를 지켜줄 누군가를 찾게 된다. 장미리가 자신을 선택한 고용주인 호텔 A의 대표 장명훈과 글로벌 그룹의 후계자인 송유현을 오가는 위험한 줄타기를 시작한 이유는 오로지 그들만이 그녀가 이룩해 놓은 세계를 무너지지 않게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장미리가 세계의 주변인으로서 겪는 좌절을 다루어야 했던 <미스 리플리>의 세계는 <신기생뎐>의 부용각이 그러했던 것 처럼, 아름다운 장미리를 중심으로 돌아가기에도 바쁘다. ⓒMBC

문제는 이처럼 전개되는 과정에서 장미리와 <미스 리플리>의 의도가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는 사실이다. 장미리는 애초에 세상의 속물주의 때문에 자신의 거짓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새 <미스 리플리>의 세계는 장미리의 속물주의적 욕망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살아남기 위한 욕망이라기보다는 자신이 거짓말을 통해 구축한 세계를 지키기 위한 허황한 욕망에 가까웠던 장미리의 요구들은 <미스 리플리>의 인물들에게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고, 반대로 시청자들은 그 인물들에게 거부감을 갖기 시작했다.

장미리는 자신을 괴물로 만든 것이 '사회'라고 말하지만, 정작 <미스 리플리>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속물적 욕망을 너무 쉽게 지지한다. ⓒMBC

특히 장미리가 구축한 세계를 아무런 의심도 없이 오로지 지켜주는 데에만 급급한 장명훈과 송유현은 특별한 이유나 계기도 없이 장미리의 매력에 빠져들고, 장미리의 일이란 주로 이들을 통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지키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기회를 받지 못했다기보다는 애초에 기회를 받을 만한 충분한 능력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장미리는 <미스 리플리>에서 그렇게 '호구들'을 다루는 데 자신의 매력을 활용함으로써 스스로 명분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장미리가 자신의 거짓말에 대한 명분을 잃는 순간, 이 드라마는 <미스 리플리>가 아니라 아름다운 한 여인에 이유도 없이 빠져든 두 남자를 장미리가 휘두르는 되는 '장미리와 호구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장미리는 왜, 김인숙이 되지 못했나

<미스 리플리>의 장미리의 운명은 얼핏 현실의 신정아보다는 <로열패밀리>의 김인숙과 닮았다. 하지만 고아로 시작해 항상 최악의 운명을 맞닥뜨리며 살았던 두 여자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갖게 됐다.

김인숙은 절망 끝에서 시작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장미리와 닮아있지만, 끊임 없이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공순호 회장과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쟁을 치뤄야했다는 점에서 지지받을 수 있었다. ⓒMBC

<로열패밀리>의 김인숙은 철저히 '살아남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남편의 사망 이후 금치산자로 자신을 몰아내려는 시어머니 JK의 공순호 회장 앞에서, 김인숙은 오로지 인간으로 살기 위해 복수를 다짐한다. 머무르면 곧장 추락할 수밖에 없던 그녀의 운명은 친아들의 죽음을 방조하고, JK클럽의 사장에 취임하고, 그리고 급기야 공순호 회장을 무너뜨리기까지 김인숙이 행하는 모든 행동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모든 행동들은 치밀하게 계산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끊임없이 장미리를 위협하는 역할이었던 히라야마 조차도, 뜬금없이 그녀를 사랑하는 '순정마초'가 되어 버렸다. ⓒMBC

<미스 리플리>에서 장미리의 거짓말은 믿을 수 없이 허술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고, 오로지 그녀에게 반해 이성을 잃어버린 두 '호구'들에 의해 지켜진다. 장미리에게는 거짓말을 진실처럼 믿어지게 할 만큼의 능력도, 의도도, 생각도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녀의 거짓말을 어떻게든 무너뜨리려는 적수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드라마 내내 그녀를 위협하던 히라야마조차도 결국 장미리의 매력에 빠져버린 꼴이 되었으니, 장미리에겐 절박하게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수도 치밀하게 계산된 앞으로의 인생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 너무나 손쉽게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손에 넣는다.

장미리의 마음이 부질없이 변해버린 상황에서 순식간에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 버린 장명훈의 캐릭터는 그저 장미리의 세계를 조금 더 유예하는 도움만을 줬을 뿐이었다 ⓒMBC

어느 순간 세계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한 장미리는 어떤 것도 스스로 싸워 쟁취하지 않았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보다는 어렵사리 구축한 허상을 지키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았고, 차라리 그저 이용만 하는 편이 좋았던 두 남자를 어설픈 '진심'으로 엮어 넣으면서 설득력을 잃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일본어 실력 외에는 어떠한 것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이 과정들은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지켜야 했던 그 많은 기회'에 대한 정당성을 잃었다.

'최악의 상황과 그를 타개하는 미션'만 존재했던 김인숙이 저지른 수많은 잘못에도 그 누구의 비난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과 비교해, 장미리는 허황한 욕망을 타인의 손으로 손쉽게 이루고 망침으로써 모두의 지지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속물주의와 욕망의 정체를 묻고 싶었던 <미스 리플리>의 실패

우리는 모두 살아남기 위해 많은 잘못을 저지른다. 그리고 모두가 '더 나은 삶'을 향한 욕망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들이 어떠한 종류이건 간에 '속물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설득력을 얻고 싶어 한다. 자신의 잘못이나 거짓말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믿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 절박한 것이었음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미스 리플리>를 통해 보고 싶었던 건 장미리의 욕망에 대한 증명을 통해 자신의 욕망 또한 정당한 것임을 위안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후반부, 송유현을 사랑했다는 장미리의 고백이 무색하게도 장미리는 오로지 이 남자를 자신이 이룩한 세계를 다치지 않게 보호해 줄 사람으로만 생각했었다 ⓒMBC

그러한 상황에서 <미스 리플리>가 보여준 속물주의와 욕망은 실체를 보여주기는커녕 그 어떠한 절박함도 증명해 내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장미리의 욕망과 속물주의는 비난받았고, 드라마는 체면을 지킨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장미리의 매력에 빠져 허덕거리고 있을 때, 그녀는 손쉽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쥐었고 사람들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사실들을 어설프게 '진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려 들었다. 치열하게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하며 살아야 했던 김인숙에 비하자면, 장미리의 삶은 아름다운 외모를 통해 '거저' 얻어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신나게 거짓말로 사람들과 스스로를 기만하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한 뒤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줘 해피엔딩을 찾아가는 장미리의 삶은 누구에게도 공감 받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스 리플리>의 세계는 그렇게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 채 등장 인물 모두가 스스로에 대해 면죄부를 내리고 끝이 났다. 그리고 그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까지도 끝까지 그들을 연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미스 리플리>는 장미리가 누군가를 기만한 것이 아니라, 그 드라마 자체가 시청자를 기만한 실패한 드라마로 남게 됐다. 그리고 결국 누구도 이 드라마를 오래도록 기억하지는 못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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