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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에서 출세하지 않고 살아남는 두 가지 방법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 인물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엔터테인먼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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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에서 살아남는 것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좀 냉소적으로 말하면 능력보다는 연줄이 우월하다. 조직이 조금만 커지면 파벌이 생기니까, 잘 판단해서 자기를 의탁할 파벌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출세할 수 있다.

조직에서 살아남는 것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좀 냉소적으로 말하면 능력보다는 연줄이 우월하다. 조직이 조금만 커지면 파벌이 생기니까, 잘 판단해서 자기를 의탁할 파벌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출세할 수 있다. 능력이 없어도 출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나 쉽게 택하는 방법이다. 반면 긍정적으로 말하면, 능력이 뛰어나면 파벌 없이 살아남는 것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세상을 살다 보면, 능력 있는 사람이 반드시 출세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지 않음을 알게 된다. 즉 능력도 있고 사람들과 관계도 잘 푸는 경우라면 가능하지만 오로지 능력만으로 조직에서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잘해봐야 토사구팽 당하기 일쑤다.

 

가이도 다케루의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에는 대단히 특이한 방법으로 조직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먼저 도조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의 의사인 다구치. 국내에서도 드라마로 각색했던 소설 『하얀 거탑』이라던가 만화 『의룡』, 『헬로우 블랙잭』 등을 보면 일본 의학계에서 의국(醫局)의 힘은 거의 절대적이다. 의국의 눈에 한 번 나거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시골 개인병원 말고는 그 의사가 살아남을 길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다구치는 의국의 경쟁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은 정도를 넘어, 굳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만 한직에서.

다구치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병원의 출세 경쟁에서는 벗어나 있으면서도 대학에 계속 남아있는 터프한 분’이지만 스스로는 ‘잘못된 평가입니다. 하고 싶은 일은 하고, 하기 싫은 일은 꽁무니를 뺀다. 그렇게 멋대로 지내는 게으름뱅이’라고 말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다구치는 피에 대해 생리적인 혐오를 느껴 신경내과학 교실로 자원했다가, 다시 실험에서 손을 떼고 임상과 잡일에 헌신했다. 남의 당직도 대신 서 주고, 강사 자리가 들어왔을 때는 실력 부족을 이유로 거절하기도 했다. 요컨대 출세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이 있을 자리만 지키는 타입인 것이다. 의대를 다닐 때부터, 건물 한구석에 박힌 빈 사무실에 들어가서 ‘언젠가는 여기서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꿈꾸던’ 사람이기에 가능한 생존법이다. 이렇듯 무위한 인간이 되면, 굳이 시비를 거는 사람도 없는 법이다.


다만 다구치가 능력이 없었다면, 그렇듯 순하게 살아가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다구치가 맡은 곳은 ‘부정수소외래’다. ‘부정수소’란 경미하지만 끈덕지게 환자에게 달라붙어 검사를 해도 기질적인 원인이 발견되지 않는 사소한 증세 전반을 말한다. 즉 정확한 이유는 없지만, 환자가 호소하는 고통이나 문제 같은 것들. 부정수소를 호소하는 환자들을 기존 조직에서는 다루기 힘들기에, 다구치에게 보낸다. 그러면 다구치는 환자의 하소연을 흘려듣거나 내버려두는 것으로 치료한다.

즉 부정수소의 대부분은 환자의 스트레스나 불만 혹은 심리적 이유에서 나온 증상인 것이다. 그러니 환자의 말을 잘 들어주고 맞장구를 치다 보면 대개는 해결된다. 부정수소의 진짜 이유는 ‘의사가 지닌 퍼스널리티와 커뮤니케이션 능력, 즉 의사로서의 종합적인 자질이 문제’인 것이다. 다구치는 부정수소를 만들어내는 의사들의 그런 오만을 꿰뚫어보는 동시에 그들의 과오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리고 상대방의 진심을 듣기 위해서는 내 입을 다물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뿐이다. 물론 그게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기술이기는 하지만.’ 다구치가 의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그 능력 덕이고, 결국 위험한 임무까지도 맡게 된다.

도조 병원에는 미국의 심장병 전문병원에서 초빙되어 온 의사 기류 고이치가 있다. 그의 전문분야는 확장형 심근증의 치료방법으로, 비대해진 심장을 잘라 작게 만드는 바티스타 수술. 워낙 어려운 수술이라 성공률은 60%이지만 기류는 뛰어난 실력으로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 하지만 최근 3번의 수술이 연속으로 실패하자 다카시나 병원장은 다구치에게 내부 조사를 명령한다. 단순한 수술 실패인지, 의료 사고인지, 아니면 의도적인 뭔가가 있는지를 밝혀내라는 것이다.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
은 제4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현직의사인 가이도 다케루는 2006년 데뷔작인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을 발표했고 이후 1년에 3, 4편씩의 기세로 『나이팅게일의 침묵』 『제너럴 루주의 개선』 등 의학과 의료현장을 다룬 소설을 연속으로 발표했다. 본격 미스터리의 시각으로 본다면 가이도 다케루의 소설은 미스터리가 중심에 놓인 작품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수수께끼와 범인이 있다 해도, 사건 해결이 소설의 결말을 짓긴 해도 가이도 다케루의 작품은 캐릭터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엔터테인먼트 소설에 더욱 가깝다.

그러면서 ‘의료시스템과 의료인이 만들어낸 밀실’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그 의문을 추적한다. 의료현장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경험 그리고 통찰력으로 현대 일본 의료계의 모순을 예리하게 짚어내면서, 매력적인 인물들로 재미를 더한다. 각 인물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그들의 충돌이 빚어내는 다양한 화학변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수수께끼를 푼다기보다 마구 끌려 들어가는 것 같다고 할까. 데뷔하자마자 가이도 다케루가 인기작가로 떠오른 이유는, 선명하면서도 인간적인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필력 덕분이었다.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에는 다구치와 함께 또 하나 최강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여유만만한 다구치를 꼼짝 못하게 하는 인물은 후생노동성의 공무원 시라토리다. 지나간 곳은 풀도 나지 않는 황무지가 된다는 의미인 화식조를 별명으로 가진, 안하무인에 모든 것이 자기페이스인 괴짜. 시라토리에게는 또 하나의 별명이 있다. 로지컬 몬스터. ‘중요한 것은 사실인가 아닌가를 증명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사물과 현상을 움직여 갔을 때, 마지막까지 모순 없이 성립하느냐 아니냐를 확인 할 것.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모든 것을 의심할 것.’ 멋진 논리와 설득력을 지닌 시라토리는 모든 전제를 철저하게 의심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본심을 숨기거나 맨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인물들의 거대한 벽을 효과적으로 허물어버린다.

‘어정쩡하고 모호한 입장은 진실 규명의 최대 적입니다. 그 어정쩡함이 진실을 파헤치는 실마리를 놓치게 만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살인을 전제로 조사하는 게 낫죠. 그러면 의료 과실도 놓치지 않을 수 있고. 그 반대일 경우에는 놓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애당초 범인이 의도한 것이겠지만요.’


다구치와 마찬가지로, 시라토리 역시 철저하게 자신의 길을 고집하는 인물이다. 다만 다구치가 유유자적하는 타입이라면 시라토리는 부딪치고 부숴버리는 타입이다. 후자의 경우 대개는 그러면서 함께 부서지거나 둥글둥글해지는 경우가 많다. 시라토리는 절대 아니다. 시라토리는 그런 투쟁을 통해서, 더욱 더 ‘몬스터’가 되어버린다. 그의 이력을 한 번 보자. 후생노동성의 문제점에 대해 바른 소리를 했다가 직위에서 밀려나고, 어느 날 출근해보니 책상도 사라진다.

보통 사람이라면 전전긍긍하겠지만 시라토리는 불안도 관심도 없이, 심지어 종합청사에 있는 레스토랑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희희낙락한다. 보다 못한 상사가 장관 직속의, 일반적으로는 사고 친 인물을 처박아두는 자리에 보내버린다. 아무런 업무도 주어지지 않던 시라토리는 법의학 교실을 다니면서 관련 자격증을 모두 습득한다. 해부의, 사체검안인정의, 법의 인정의 등등을 무려 5년간 따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혼자서도 잘 노는 인간이라고나 할까? 시라토리는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가는 일체 신경 쓰지 않는다. 혼자서 놀다가, 결국은 그 자격증들이 실력발휘를 시켜줘 다시 업무를 시작하게 되고, 마침내 다구치까지 만나게 되는 것이다.

공격적이고 안하무인인 시라토리와 ‘하늘에서 온 지장보살님’이라고도 불리는 다구치는 상극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조화가 잘 맞는다. 일단 조직의 논리대로 움직이는 인간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 같고, 이런저런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시선이 명징한 점도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유머감각이 있다. ‘나는 애당초 외과에 대해서는 깡통이기 때문에 사소한 경멸은 마음에 두지 않는다. 알고 싶은 것은 이해될 때까지 묻는다.’라던가 ‘하층계급인 나는 권력과 얼마나 거리를 두어야 할지 몰라 버거워하고 있다. 다가갈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고, 권력이란 까다로운 손님 같은 것이다.’라는 말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통찰력과 유머감각이 있기에 다구치와 시라토리는 가장 완고하고 폐쇄적인 의국과 관료 틈에서 생존해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구치와 시라토리의 조직 생존법을 아무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라토리와 다구치처럼 살아가려면 어떤 사건이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과 모든 질시와 경멸에도 견뎌낼 수 있는 강철 같은 신경줄이 필요하다. 다카시나 병원장은 ‘룰은 깨기 위해 있는 겁니다. 다만 보다 나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이 있을 때만 깰 수 있는 거죠.’라고 말한다. 조직에 있으면서도 괴짜가 되고 싶다면, 일단 강해져야 한다. 겉으로는 지장보살처럼 보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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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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