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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성’ 하면 떠오르는 그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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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화가는 꽃을 잘 그립니다. 미술시장에서 그의 꽃그림은 인기가 높아 그리는 족족 비싸게 팔려요.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그림이죠.



제가 아는 화가는 꽃을 잘 그립니다. 미술시장에서 그의 꽃그림은 인기가 높아 그리는 족족 비싸게 팔려요.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그림이죠. 이 화가가 동료에게 욕먹은 일이 있는데, 꽃그림 때문에 트집이 잡혔대요. 워낙 잘 팔리니까 딴죽을 걸었겠죠. 대놓고 성토하기를, “현실의 고통이라곤 눈곱만큼도 뵈지 않는 그림이 대체 무슨 가치가 있냐. 네 그림은 싸구려 카드나 다를 바 없어.”라고 했대요. 화가는 대꾸하지 않았답니다. 나중에 제가 전해 듣고는 속상하지 않았냐고 물었죠. 그의 대답이 웅숭깊어요. “그 사람은 아마 평생 카드 한 장 받아본 적이 없을 겁니다.”

이 화가는 닥터 지바고를 좋아합니다. 이유도 그답습니다. “포탄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지바고는 꽃을 심었잖아요.” 꽃 심는 사람치고 나쁜 이 없다고 그는 믿지요. 꽃보다 나은 선물이 없고, 선물 받고 행복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도 했어요. 그의 꽃그림은 세상 사람들에게 돌리는 선물이래요. 이 화가가 이 선생을 만나면 생각을 혹 바꿀지 모르겠습니다. 이 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지을 줄 알잖아요. 웃음은 동석한 사람에게 사정없이 전염되는 행복 바이러스입니다. 낫기로는 꽃보다 웃음입니다. 장담컨대 그 화가가 이 선생을 보면 꽃 대신 이 선생의 웃는 표정을 그리고 싶을 겁니다. 그는 행복을 그리는 화가니까요. 립 서비스가 과했나요.

청나라 화가 낭세령(郎世寧, Giuseppe Castilglione)을 기억하시죠. 선교사로 중국에 왔다가 강희, 옹정, 건륭 3대에 걸쳐 황제를 모신 궁정화가인데 서양화 기법으로 전통화단에 충격을 준 이탈리아인이죠. 그가 그린 꽃그림입니다.

낭세령, 「취서도」, 비단에 채색, 1725년
109.3x58.7cm, 상하이박물관

한눈에도 이게 동양화냐 싶죠. 명암이나 질감, 양감에서 늘 보던 전통화와 차이가 확 납니다. 같은 재료로 그려도 기법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네요. 제목이 ‘취서도(聚瑞圖)’인데 ‘좋은 것 다 모아놓은 그림’이란 뜻이죠. 청자 꽃병에 꽂은 식물들이 정치한 묘사 덕에 눈에 가득 찹니다. 푸릇하게 오그라든 연잎 사이로 홍련이 수줍게 물들었습니다. 중국인은 연꽃을 신성한 아름다움으로 꼽지요. 고대 그리스에서 연꽃을 님프에게 바친 뒤로 ‘님페아(Nymphea, 백수련)'라는 말이 나왔다는데, 동양에서도 이 꽃은 순수와 고결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꽃의 몸뚱어리가 탐스럽고 원만해서 보기 좋네요.

나머지 ‘좋은 것’을 볼까요. 연밥과 조가 함께 꽂혀있군요. 연밥은 ‘연과(蓮顆)’로 표기하고, 그 음이 연이어 과거에 나아간다는 뜻의 ‘연과(連科)’와 닮아 옛 그림에선 급제로 비유됩니다. 조는 이삭에 좁쌀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풍요와 다산을 의미하죠. 그러니 연밥과 조도 상서로운 것이 분명합니다. 예쁜 꽃이라면 모란이나 장미를 넣어도 될 텐데, 시시해 보이는 연밥과 조를 굳이 소재로 택한 까닭은 뭘까요.

화가는 여기서 상서로운 행복의 조건을 에둘러 제시합니다. 연밥과 조는 관상용 이전에 식용이죠. 기원 전 까마득한 시기부터 이 식물들은 인간의 먹을거리였습니다. 먹을 수 있기에 좋았습니다. 행복이 구름 위에 있나요. 먹고 마시는 일상의 물적 토대가 마련돼야 행복을 누릴 수 있지요. 배고픈 즐거움은 씨알도 안 먹힐 소리고, 꽃잎만 뜯어먹고 사는 사람은 이승에 없습니다. 좋은 것 다 모았다는 낭세령의 꽃그림이 속 깊은 까닭은 거기에 있지요.

꽃을 보면 행복합니다. 안 보고도 행복한 경지가 있대요. 청나라 시인 원매는 본디 고수라서 이렇게 읊었지요.

복사꽃 휘날려 찾기 어려우니
뒤늦게 온 사람들 애석해 하네
나는 늦게 오는 게 낫다고 말하지
꽃 그리운 마음 꽃 보는 마음보다 깊으니
桃花吹落杳難尋
人爲來遲惜不禁
我道此來遲更好
想花心比見花深

봐야 믿는 사람은 단수가 낮답니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보고 만지는 마음보다 곡진하다는 얘깁니다. 상상만으로 행복해지는 경우가 있지요. 행복은 마음에 있는 게 맞나 봅니다. 'Happiness'란 영어가 'Happen'에서 비롯됐다면서요. 자신에게서 일어난 일이란 거죠, 행복은. 밖에서 온 것은 행복이 아니라 행운입니다. 굴러온 호박이 행운이고, 가지 나무에 열린 수박이 행운이죠. 행복은 바랄 바를 바라는 겁니다. 바라되 분수껏 바라면 행복은 자기 마음의 작용이라 언제든 얻을 수 있지요.

싱거운 사람이 남녀의 행복을 구분하더군요. 니체가 싱겁진 않지만,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괘다리적은 소릴 했습디다. “남자의 행복은 ‘내가 하고 싶다’에 있고, 여자의 행복은 ‘그가 하고 싶어 한다’에 있다.” 말을 좀 요상하게 옮겼습니다만, 요는 남자의 행복은 내가 원한다는 데 있고 여자의 행복은 그가 원한다는 데 있다는 것 같습니다. 여자의 의지를 추수적으로 규정해서 탈인데, 옛 여인들의 순종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 선생이 알다시피 저는 마초가 아닙니다. 하지만 여인의 수동성이 버릇처럼 그려진 옛 그림을 하도 많이 본 터라 ‘행복한 여성’ 하면 이 그림이 겉따라 떠오릅니다. 18세기 조선 화가 이방운이 그렸지요. ‘시경’에 나오는 노래를 소재로 한 ‘빈풍도첩’ 중에 하나인데, 그림 속에 그 노래가 적혀 있어요.

이방운, 『빈풍도첩』 중에서, 종이에 담채, 18세기
25.6x20.1cm, 국립중앙박물관

답청에 나선 여인의 설레는 마음이 아지랑이처럼 꼼지락거립니다. 평화로운 들판, 그것도 화창한 한낮의 봄, 새의 지저귐과 시냇물의 아우성이 밖으로 번져 마음이 화사해집니다. 아래쪽 여인들은 갓 올라온 뽕잎을 따느라 바쁘고 뒤편 여인은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쑥을 뜯네요. 분홍빛 저고리가 꽃물 들인 듯 곱습니다. 광주리를 든 여인들은 나물을 캐다 처음 알았다는 듯이 버드나무에 날아든 새로 눈을 돌리는데, 시냇가 철쭉이 부끄러운 빛깔로 피어나고 버들이 욜랑욜랑 봄바람에 흔들거립니다. 이게 여성의 행복과 무슨 상관일까요. 안동 사대부가의 여종으로 시 잘 짓던 설죽이 봄맞이 시로 화답합니다.

푸른 나무에 노란 앵무새 우짖고
청루에 자줏빛 제비가 분주해요
향기로운 바람은 숲에서 흔들리고
꽃잎은 비단 치마에 떨어지네요
綠樹黃鸚喚
靑樓紫燕忙
香風動林木
花落撲羅裳

설죽은 이 그림을 앞에 두고 본 듯이 읊었습니다. 행복하단 말 한 마디 없이 보이는 풍경 그대로 심심하게 노래한 이 시가 저는 오히려 사무치는 행복처럼 들립니다. 행복이 멀리가 아닌 바로 여기에 있다는 얘기지요. 새들이 지저귀고 바람이 흔들리고 꽃잎이 떨어지는 이 느꺼운 한 순간에 자족하는 그 마음,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면 어디서 행복을 찾나요. 그림 속 여자들은 가녀린 자족만으로 행복합니다. 옛날 여자라고 남자 품속에서만 행복한 건 아니었지요.

자족이 행복입니다. 지금껏 기록된 동서양의 수많은 인생론은 거의 행복론으로 귀착되는데, 그 요지는 행복해서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족해서 행복하다는 데 있더군요. 서양속담인 ‘Contentment is happiness(만족이 행복이다)'는 동양에서도 만고불변입니다. 그러니 가난하건 부유하건 행복은 귀천을 따지지 않겠지요. 자, 이제 가족의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 마지막으로 봅니다. 조선 풍속화의 차진 맛을 잘 그려낸 김득신의 작품입니다.

김득신, 「성하직리」, 종이에 담채, 18세기
22.4x27cm, 간송미술관


‘성하직리(盛夏織履)’, 곧 ‘여름날의 짚신 삼기’란 제목이 붙었습니다. 우리 옛 그림에서 삼대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드물지요. 이 그림만큼 화목하고 행복한 가족의 모습은 찾기 어려워요.

시골집 바자울에 박꽃이 피고 박이 여뭅니다. 검둥개 옆에 삿자리를 깔고 앉은 아들이 짚신을 삼습니다. 몸꼴이 사내다워 장년의 기세가 근골에서 꿈틀거리지요. 손아귀와 허벅다?, 장딴지는 노동으로 가사를 일군 자의 이력입니다. 노인은 아들이 하는 일을 미덥게 지켜보는데, 골골한 늙은이가 아닙니다. 등에 매달린 손자의 응석을 받고 쌈지에서 동전 한 닢을 꺼내줄 자애로움이 그에게 있습니다. 이 집안의 가장은 엄연히 그입니다. 곳간이 허술해도 식구의 끼니를 거르지 않고, 비단옷이 아니라도 철 따라 입을 옷을 해 입히며, 더위와 추위를 피할 집채를 장만하기 위해 모진 애를 자청하는 자가 가장입니다. 불고 쓴 듯한 가난 속에서도 육친에 대한 신뢰가 깃든 그림이지요. 사립문 사이로 독 하나가 보이네요. 당나라 두보가 민촌의 독을 보고 읊은 시가 있죠.

시골집 낡은 질동이 보고 비웃지 마소
거기에 술 거르며 아들 손자 다 길렀네
은주전자에 술 따를 때 부럽겠지만
취한 뒤 대 뿌리에 자빠지기는 마찬가지
莫笑田家老瓦盆
自從盛酒長兒孫
傾銀注子驚人眼
共醉終同臥竹根

거친 탁주에도 사랑은 넘칩니다. 문간에 놓인 막걸리 병은 박채 안주와 더불어 이들 조부손(祖父孫)의 정을 도탑게 합니다. 가난한 문턱에 도리어 행복이 그득하지요.

자족해서 행복합니다. 족(足)하다는 게 무엇입니까. 한비자가 말했지요. 족함을 아는 것이 족이라고. 도덕경에도 나옵니다.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오래도록 누릴 것이니라.’ 이런 말은 석가도, 묵자도 다 한 얘기입니다. 다함없는 행복은 없습니다. 모자라는 데서 족해야 행복해집니다. 넘쳐서 행복한 것은 이 선생 웃음 밖에 없어요. 괜히 저도 따라 웃는데, 이것이 행복해서 웃는지 웃어서 행복한 건지 따지고 싶지 않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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