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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현실은, 모두 환상이다.

『아웃』, 결국 인간은 고독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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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에 빠진 남편에게 맞고 사는 야요이,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푼 덕에 빚쟁이에게 시달리는 구니코, 병든 시어머니 수발에 지쳐버린 50대의 과부 요시에, 자신만의 고치에 갇혀버린 남편과 아들을 지켜보고 있는 40대의 마사코. 남편의 폭력에 저항하다 남편을 죽여버린 야요이의 전화를 받은 마사코는,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요시에와 함께 시체를 토막 내 유기한다. 우연히 끼어든 구니코도 함께.

『얼굴에 흩날리는 비』로 시작되는, 여성 탐정이 주인공인 하드보일드 ‘무라노 미오 시리즈’가 등장하게 된 것은 ‘도시에서 홀로 살아가는 여성의 얼굴을 그리고 싶’어서라고 기리노 나쓰오는 말했다. 그 말처럼, 하드보일드에는 ’홀로‘라는 단어가 꽤 어울린다. 누군가와 관계를 주고받으면서도, 결국은 혼자임을 뿌리 깊게 자각하는 것. 그것이 단순히 쓸쓸함이나 슬픔으로만 연결되지는 않는다.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자립하기 위한 기반이다. 혼자 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나감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기리노 나쓰오의 세계는 무서울 정도로 고독하다. 『그로테스크』는 대기업을 다니면서 밤에는 몸을 팔았던 한 여성이 살해당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쓴 소설이다. 일류대학을 나오고 대기업을 다니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던 여인, 끊임없이 자신이 갖지 못한 것만을 바라보았던 여인의 이야기를, 기리노 나쓰오는 냉정하게 파헤친다. 그리고 그녀를 살해한 중국 남성의 일대기를 보여준다.

지옥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중국의 오지에서 대도시를 거쳐 일본까지 오기 위해 경험해야 했던, 감수해야만 했던 그 고된 과거를. 『아임 소리 마마』에서도 그랬듯이, 여성을 이토록 잔인하게 폭로하고 고발하기는 작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니 반대로 여성이기 때문에, 이토록 적나라했을 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번역되어 에드가상 후보로도 올랐던 『아웃』은 심야의 도시락공장에서 일하는 4명의 주부 이야기다. 이런저런 작품들에서 보았던, 우리가 흔히 아는 주부의 얼굴과는 다르다. 기리노 나쓰오는 상식적인 여성, 주부를 보여줄 생각은 전혀 없다.

도박에 빠진 남편에게 맞고 사는 야요이,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푼 덕에 빚쟁이에게 시달리는 구니코, 병든 시어머니 수발에 지쳐버린 50대의 과부 요시에, 자신만의 고치에 갇혀버린 남편과 아들을 지켜보고 있는 40대의 마사코. 남편의 폭력에 저항하다 남편을 죽여버린 야요이의 전화를 받은 마사코는,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요시에와 함께 시체를 토막 내 유기한다. 우연히 끼어든 구니코도 함께.

‘어디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막 나온 집이 아닌 건 확실하다. 어째서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을까. 대체 어디로 돌아간다는 걸까. 길을 잃은 듯한 기분에 마사코는 당혹해한다.’

4명의 공통점은 그것이다. 어딘가로 가고 싶다는 것. 도망치거나 날아오르고 싶다는 것. 하지만 그 방법은, 현실적인 태도는 저마다 다르다. 야요이는 전형적인 주부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회사원 남편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변해버린 남편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 죽이고 난 후에도, 그녀는 현실에 동의하려 하지 않는다.

‘시체가 집에서 없어지자 야요이는 갑자기 사무적으로 변했다. 표정에는 짐을 덜었다는 해방감마저 피어오르고 있다. 진심으로 겐지가 갑자기 저절로 이 세상에서 소멸했다고 믿고 있는 게 아닐까.’ 도망치는 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태도다.

 

구니코는 『아임 소리 마마』의 주인공과 비슷하다. ‘자신이 저지른 짓을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린다. 피해망상이 부푸는 한편, 차라리 길동무로 삼겠다고 관계없는 사람까지 제멋대로 수렁에 끌어들인다.’ 자신의 외모에 불만을 가지고, 자신의 가치를 명품이나 수입 자동차와 동일시하려 한다. 끊임없이 타인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그들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믿는다.

그녀의 현실은, 모두 환상이다. ‘다른 여자가 되어 다른 장소에서 다른 남자와 다른 생활을 보내 보고 싶다. 물론 다르다는 건 몇 등급 위라는 말이다.’ 자신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고 믿으면서, 고고한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시하는 사람들을 괴롭힌다.
요시에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자신이 없으면 안 된다. 이 생각만이 요시에의 사는 보람이다. 공장에서도 마찬가지다…그것이 괴로운 노동을 완수하기 위한 원동력, 다시 말해 요시에의 프라이드인 것이다. 속으로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너무 괴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 하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프라이드가 가혹한 노동을 견디게 도와준다. 그녀는 모든 문제의 본질을 덮어 두고 마음속 깊은 곳에 걸어 잠근 채, 부지런함을 철칙으로 삼았다. 현실을 보지 않는 것이 삶의 기술이다.’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시어머니가 병석에 누워서도 그녀에게 싫은 소리를 할 때에도, 그녀는 받아들였다. 내가 필요한 거야. 이 사람은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렇게 자신을 혹사하고, 조금씩 마모되어 간다. 그 태도를 마사코는 ‘현실을 보는 대신 좋은 쪽으로 만사를 생각하는 요시에의 자기합리화’라고 말한다.

마사코는 그들과 다르다. 물론 그녀 역시 현실을 바꾸지 못한 채, 붕괴된 가정 속에서 연명하기는 했다. 사람들은 마사코에게서 일종의 권태로움, 메마름을 본다. 마사코도 알고 있다. 자신이 많은 것들을 끊어냈음을. 다만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신용금고에서 일하던 마사코는 우연히 한참 아래인 남자 후배의 급여가 자신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알고 항의한다. 남녀를 차별하는 관행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 결과는 왕따였다. 남자직원들만이 아니라, 여직원을 포함한 모두에게서. 마사코는 그 시선을, 폭력을 견뎌낸다.

그 시절 마사코를 보았던 한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마사코의 주위에는 항상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는 방어벽 같은 것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것은 단 혼자서 세계의 모든 것과 싸우고 있다는 증표 같은 것이다….아마도 왕따라는 것은 증표를 가지지 않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던 4명의 여성은, 살인과 사체 절단과 유기라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변한다. 그 일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변함없이 살아갔을 것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견디면서. 하지만 그들은 ‘끝내 선을 넘은 것이다.’

하지만 선을 넘었다고 해서 바로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는다. 아니 그 변화가 반드시 좋은 방향이라고도 할 수 없다. 경계를 넘은 순간 되려 많은 사람들은 무너져 내린다. ‘자신의 인생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일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 자신은 경계를 넘은 건지도 몰랐다. 절망이 또 하나의 세계를 바란 것이다. 마사코는 방금까지 몰랐던 야요이를 도운 자신의 동기를 처음 이해했다. 그러나 경계를 넘은 세계에서 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기다리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마사코만이 유일하게 알고 있다. 경계를 넘어도 기다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변화는 자신이 만들어내야 함을.

단 홀로인 자신. 이제 아무에게도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자신.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은 또 하나의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분노는 자신을 해방시킨다. 그날 아침, 자신은 확실히 변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변수가 생긴다. 한때 야쿠자였고, 지금은 도박장과 클럽의 주인인 사타케. 야요이 남편의 살인사건 용의자로 수사를 받은 사타케는 직접 사건을 파헤치기로 결심한다. 사타케는 야쿠자의 특기인 협박과 염탐으로 4명의 여성들을 압박한다. 그런 사타케에게는 지독한 과거가 있다. 여자를 다른 조직에 몰래 소개하던 여자 중개인을 폭행하다 죽이고 형무소에 갔던 사타케는 알게 된다. 그의 진짜 본성이 무엇인지를.

‘여자를 죽였을 때의 황홀감이 크고 깊어서 그 체험이 자신을 가둬버렸다는 사실…. 자신의 본능을 알았다는 것은 꿈을 봉인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사타케는 그 뒤 봉인을 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 그 고독과 자제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자신을 진실로 이해하고 천국으로도 지옥으로도 홀리는 여자는 자신이 죽인 여자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사타케가, 마사코에게서 뭔가 비슷한 냄새를 느낀다. 그러니까 『아웃』은 어쩌면 서로 다른 궤도를 걸어가야만 하는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일 수도 있다. ‘죽음을 공유’할 수 있는 여성을 비로소 발견한 기쁨. 어쩌면 자신의 본능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여성일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결국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다. 그들은 서로를 죽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고, 공유할 수도 없다. 영원한 엇갈림은 그들의 운명이다. 게다가 그들의 태도는 사실 미묘하게 다르다.

사타케는 공허한 꿈에 살고, 마사코는 현실을 구석구석까지 핥으며 산다. 마사코는 자신이 바랐던 자유가 사타케가 희구하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만의 자유가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것이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면 새로 문을 찾아 열 수밖에 없다.

사타케는 과거에 얽매여 있었다. 단 한 번의 경험, 희열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봉인했다. 그러나 마사코는 새로운 싸움을 원했다. 한 번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자신의 고치 안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새로운 경험을 통해 그녀는 변한다. 『아웃』의 시작에 인용된 플래너리 오코너의 말처럼 ‘절망에 이르는 길이란, 어떤 체험도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녀는 체험을 했고, 절망을 견뎌냈다. 그리고 다시 그녀는, 혼자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받아들인다. 받아들이고 홀로 서서, 다시 누군가와 손을 잡을 것이다.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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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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