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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여자의 일상을 누군가 훔쳐보고 있다?

<레지던트>로 살펴 본 대중문화의 관음주의 숨겨져야 할 욕망이 가시화되었을 때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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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건너 편 아파트에 비치는 야릇한 실루엣 혹은 타인의 싸움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문득 건너 편 아파트에 비치는 야릇한 실루엣 혹은 타인의 싸움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현장이 잘 보이는 곳에 서서 커튼 뒤에 몸을 숨기고 혹시라도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불까지 껐던 기억은 없는가? 그리고 그 모든 볼거리가 별다른 사건 없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렸을 때의 그 서운했던 기억은? 돌이켜 보면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는 관음의 욕망은 놀라울 것도 없이 기회만 주어진다면 우리의 생활 속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익명의 타인을 훔쳐보고 싶은 은밀한 욕망은 단순한 훔쳐보기의 행위에서 시작해, 비디오테이프와 영화, 그리고 매체의 발전과 함께 온라인으로까지 급속도로 퍼져간다. 급기야 유명 연예인의 사생활 폭로, X 파일, 몰래 카메라, 최근에는 리얼리티 TV, SNS 등으로 진화되어 온 관음증은 집단 무의식을 파고들어 결국 상대방은 나를 보지 못한다는 안도감과 함께 더욱 은밀하고 뜨거운 훔쳐보기의 욕망을 부추긴다. 그리고 익명성의 날개를 달고 마음 한켠에 숨어있는 인간의 욕망 속으로 날아든다.


새 영화 <레지던트>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공포를 느끼게 된다는 스릴러 영화이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한 줄리엣(힐러리 스웽크)은 홀로 서기를 시작한다. 여기서 ‘레지던트’는 거주자를 의미하는데, 줄리엣의 주변을 수상하게 맴도는 거주자들은 불안의 요소 중 하나이다.

밤마다 기괴한 소음과 진동이 울려대고 은밀한 시선이 느껴지면서 거주자 줄리엣은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낀다. 혼자 사는 여자의 일상을 훔쳐보는 관음의 시선을 다룬 <레지던트>는 뮤직 비디오 감독으로 유명한 안티 조키넨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데, 특유의 감각적이면서도 자극적인 영상을 만들어 낸다.

가장 안락하고 사적이어야 할 개인의 공간이 누군가에게 침입되었을 때 오는 불안과 공포는 영화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줄리엣의 주위를 맴도는 알 수 없는 은밀한 시선의 정체는 무엇일까?

결론이 뻔히 보이는 줄거리에도 쉽게 마음을 뺏기게 만드는 것이 히치콕의 <이창>과 같은 고전적 훔쳐보기 영화의 매력이라는 점에서 <레지던트>는 이미 절반 이상 관객의 마음을 훔쳤다.

리얼리티 TV를 통해 사적인 공간을 공적인 시선으로 훔쳐보기에 익숙해진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으려면, 어지간한 자극으로는 힘들기에 영화는 플롯과 공감할 수 있는 연기로 승부를 걸어야 할 것이다. 관객들의 공감과 감정이입을 책임질 힐러리 스웽크의 캐스팅은 그런 점에서 훌륭하다.

관건은 늘 강인한 여성의 캐릭터를 선보인 힐러리 스웽크가 얼마나 피해자의 역할에 몰입할지, 일방적인 피해자에서 악인과 싸우기 시작할 때 얼마나 강인하게 변모할지에 달렸다. 그것에 앞서 관객들이 줄리엣의 상황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줄리엣의 사생활을 얼마나 깊숙이 파고들어 날 것 그대로 내어놓을지가 최우선임은 감독도 관객도 알고 있다.

전혀 모르는 타인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정보가 쌓이는 순간 우리는 상대방을 친숙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나도 모르게 쌓인 상대방의 정보를 통해, 상대방을 친구라고 느끼게 되는 그 혼돈은 최근 미친 듯이 늘어나고 있는 리얼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전략이기도 하다.

전 국민 훔쳐보기 프로젝트 - 리얼리티 TV로 확산된 관음의 욕망


영화와 관음에 대한 화두는 1970년대 할리우드에서 시작되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영화라는 메커니즘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는 페미니즘과 결합하면서, 카메라가 가지고 있는 남성 중심의 질서와 가치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냈고, 이때 도래된 개념이 ‘관음증’이다.

‘관음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훔쳐보는 자의 안전한 위치이며 훔쳐보는 그 대상이 지금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라야 한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관음증’의 쾌락을 안전하게 보장한다. 이처럼 ‘관음증’이란 사전적 의미로 자신의 관찰행위가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어떤 대상의 행동을 엿봄으로써 성적 보상을 얻는 행위를 말한다.

동시에 ‘관음증’은 사회적인 행위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오늘날처럼 미디어가 편재된 사회에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사적이고 은밀한 행위를 훔쳐보는 것은 ‘관음증’의 사회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아주 다양한 형태로 이것을 경험한다. 연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형태라고 속기 쉽지만, 드라마 보다 훨씬 더 극적으로 가공된 쇼를 우리는 ‘리얼리티 쇼’라고 부르며 케이블을 통해 급격히 확산된 리얼리티 쇼는 공중파로 까지 급속도로 파고들었다.

<위대한 탄생>

‘도슈코’, ‘프런코’, ‘슈스케’ 라는 암호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케이블 리얼리티 프로그램(도전 슈퍼모델 코리아,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슈퍼스타 케이)은 외국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사 오거나 벤치마킹하면서 그 이름을 떨치고 있고, 최근에는 MBC를 통해 ‘나가수’, ‘위탄’(나는 가수다, 위대한 탄생)이 붐을 일으키더니 케이블 TV는 온갖 외국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제작권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대사 하나, 포맷 하나까지 따라하는 한국판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사람만 바뀐 오리지널의 복제판이지만, 늘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 덕분에 모두에게 개방된 오디션과 모두에게 개방된 투표권 때문에 온 국민이 연예인이고, 온 국민이 심사위원이 되는 기이한 현상 속에 살게 되었다.

카메라와 소통하기 시작한 순간 피사체는 날 것 그대로의 삶 속에서 자신을 연기하기 시작한다. 또한 교묘한 편집술을 통해 가공된 화면에 내레이션까지 더해지면 리얼리티를 표방한 하나의 감동 드라마로 변화한다. 진실한 순간과 가공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폭발적인 감정은 다큐멘터리 필름 자체가 주말 드라마 보다 더 감동적이고 재미있는 것으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트위터 류의 소셜 네트워크가 연예인 기사 통신망이 되고, 급속도로 확산되는 파급력 때문에 SNS로 인한 자살 사건까지 발생하기 시작한 지금, 더 이상 개인적인 정보라는 것은 없는 기이한 시대에 살게 되었다.

구글 검색을 통하면, 지극힌 평범한 개인의 신상정보를 털어낼 수 있는 현재, 그 지독한 선정주의는 끝날 줄을 모르고 개인의 영역 속으로 파고 들어온다. 그리고 이 끝이 없는 순환 속의 핵심은 지극히 사적인 욕망으로부터 시작된다. 바로 타인의 삶을 훔쳐보고 싶은 ‘관음’의 욕망이 그것이다.

포스트 히치콕, 그 현대적 트렌드

시각적 쾌락인 관음증은 그 욕망의 순도로만 보자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순수 욕망이다. 기본적으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하는 문화와 예술행위, 연극 및 영화는 모두 훔쳐보기의 욕망을 그 기반으로 하는 예술 장르이다.

욕망의 주체로서의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는 관음의 대상, 자신은 숨겨진 관음의 주체가 된다. 안전한 기분으로 훔쳐보기에 몰두할 수 있게 영화관은 영화가 시작되면 불을 꺼준다.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도록, 그리고 잘 훔쳐볼 수 있도록 영화는 관객을 배려한다.

연극에서도 ‘제 4의 벽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객석을 향한 방향이 벽인 양, 배우들이 마치 자신들이 누군가에게 보여 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 꺼진 객석의 관객들은 관음증을 유발하고 몰입에 의한 편안한 쾌락을 제공받게 되는 것이다.

<이창>

<디스터비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는 관음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거론된다.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한 엿보기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사이코〉나 대상화된 여성에 대한 훔쳐보기가 나오는 〈현기증〉, 영화에 대한 은유로서 훔쳐보기를 통해 이야기가 진행되는 <이창>등, 히치콕은 노골적으로 관음의 욕망을 가시화했다.

관음증의 이데올로기를 논하기에 앞서 카메라가 ‘구멍을 통한 엿보기’라는 관음주의적 기계 장치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훔쳐보기의 주체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달라졌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은 24시간 방영되는 다양한 채널도, TV를 통해 즐길 수 있는 비디오 게임도, 컴퓨터로 즐기는 인터넷 세상도 없던 시절에 만들어졌다. 모든 행위가 훔쳐보기에 집중될 수밖에 없기에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디스터비아>에 이르러 확연하게 변화한 모습을 보인다.

<디스터비아>는 훔쳐보기를 단순한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10대 소년의 엔터테인먼트로 만들어 버린다. 훔쳐보기에 대한 은밀한 죄책감이 영화전반에 깔려있던 <이창>과 달리 이 영화에서 훔쳐보기는 즐거운 오락이며 가벼운 트렌드이며, 10대들의 놀이문화가 된다.

그래서 <디스터비아>는 커피와 도넛, 고성능 망원경과 디지털 캠코더, 자칫 지루할 수 있는 훔쳐보기에 탄력을 더해줄 아이팟과 Xbox, 그리고 훔쳐보기에 동참하는 친구들까지 달라진 시대와 달라진 10대 문화의 트렌드를 이야기의 배열 속에 제법 세심하게 재배치했다. 훔쳐보기의 방법도 세대에 따라 달라져가고 있다는 반증이며, 그 트렌드를 충실하게 재배치한 <디스터비아>는 훔쳐보기 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트루먼쇼>

응시의 방향은 권력의 위치를 결정짓는다. 영화 내의 어떤 인물이 관음자의 입장에 놓여 있다면, 당연히 관객도 그 관음자의 시선에 동화하게 되며 그 동화의 강약을 조절하는 연출력에 따라 영화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나눠지게 된다.

시대에 따라, 권력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훔쳐보기 영화는 ‘관음증’이라는 소재를 다양한 방법으로 변주해 왔다. 포스트 히치콕의 세대는 그렇게 영화 속에 시대상을 담아낸다.

히치콕 이후 가장 주목 받은 관음증 스릴러의 대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보디 더블>을 통해 폐쇄공포증과 훔쳐보기라는 히치콕 영화의 모티브를 그대로 빌려와, 인간의 훔쳐보기 욕망이 역으로 이용당하는 순간,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이 영화 자체가 히치콕 감독에 대한 존경과 오마주를 바치는 것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고 훔쳐보기가 스릴러 장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나 <라빠르망>처럼 관음이 관심으로, 그 관심이 애정으로 변하는 영화까지 관음증에 관한 그 변용은 수많은 영화에서 이루어져왔다.

아파트 공간에서의 감시 카메라의 위협 <슬리버>와 리얼리티 쇼라는 현대 미디어 상업주의의 희생자를 보여준 <트루먼 쇼>는 미디어의 발달이 개인의 사생활을 어떻게 위협하는지를 보여준 작품이었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의 온몸에 셀프 카메라를 부착할 수밖에 없는 <프리즈 프레임>의 극단적 상황은 현대 사회의 집단적 훔쳐보기 시스템이 개인의 생활에 미치는 파급력에 대해서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전체주의 국가의 사회통제 수단으로서의 감시 <브이 포 벤데타>를 비롯하여 미래 도시의 극단적인 관리 시스템 <아일랜드>는 훔쳐보기가 관음의 쾌락이 아니라 관찰과 통제의 폭력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라빠르망>

하지만, 역시 훔쳐보기 장르의 영화? 대부분 스릴러의 외피를 입고 있다. 그것은 훔쳐보기라는 욕망이 가진 죄의식과 두려움에 기인한다. 훔쳐보기의 욕망은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은밀한 것이다. 하지만 안전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위치가 변하는 순간, 관객은 공포를 느끼게 된다. 더 이상 느긋한 관찰자의 역할은 없다.

관찰의 주체에서 대상으로 떨어지는 순간 <이창>의 주인공은 멀쩡한 다리마저 부러지는 단죄를 거치며, 타인의 삶에 고정된 관객의 시선 역시 단죄되어야 할 죄가 된다. 하지만 이미 영화의 이야기가 거짓말이라는 사실, 그래도 내가 앉아있는 좌석은 여전히 안전한 공간이란 무의식은 공포영화를 볼 때처럼 관객들에게 아무리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이라도 슬쩍 보아 넘길 수 있는 참을 수 있는 자극이 된다.

하지만 주인공과 동화되어 타인의 삶을 침투했던 시선, 은밀한 사생활을 넘보는 것을 즐기는 자신의 시선은 도덕적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관객들은 관음증의 죄의식과 그럼에도 보아야 하는 탐식성 앞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죄책감으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날 수만 있다면 훔쳐보기의 행위 자체는 시시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바디 더블>에서 주인공은 살인사건에 얽혀 자신의 생명에 위험을 느낀다.

<라빠르망>의 훔쳐보기 주인공은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과 타인의 삶에 생채기를 내고야 만다. 이렇듯 훔쳐보기는 도덕적 잣대로 지켜볼 때 단죄의 대상이 된다. 히치콕의 영화는 관객의 관음적인 욕망을 자극하지만, 그 욕망에 대한 도덕적 단죄를 가함으로써 훔쳐보기의 동참자였던 관객에게서 죄의식을 거두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모두가 관찰자이며, 방관자가 되어버린 최신 트렌드 앞에서 죄의식은 조금 더 강도가 낮아졌다. 사생활을 파헤치고 SNS를 기사화하고, 그 기사를 다시 SNS를 통해 퍼트리는 매체와 SNS 사이의 지독한 공생관계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개인의 정보는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시키고, 심한 경우 자살에 까지 이르게 한다.

어디를 가든 따라 붙는 몰래 카메라, 누구든 소지하는 카메라 기능이 탑재된 핸드폰, 적외선 카메라가 숨겨진 호텔, 심지어 화장실까지 누군가를 훔쳐보고 그것을 즐기려는 욕망은 개인적 욕망에서, 개인의 사유재산과 안위를 지키려는 공공적 폭력으로까지 발전한다.

테러 동영상을 비롯하여 끔찍한 현실을 담은 영상까지도 관음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지금, 여전히 훔쳐보기는 화두이며 개인의 사생활은 여전히 존중되어야 할 지극히 내밀한 일상이다. 그 균열 사이에 2011년 다시 <레지던트>라는 영화가 관객을 찾았다.

끔찍한 다툼의 소리가 들리면 여전히 그것을 지켜보기 위해 창문으로 달려들겠지만 불 켜진 내 방 창문을 누군가가, 그것도 내 이웃이 은밀하게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은 끔찍한 경험으로 변해 내 뒷목을 서늘하게 만들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보고 있는 그 시점에, 누군가의 시선은 또 나를 향해 있을 지도 모른다. 모든 이가 관찰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이며, 모든 화두의 주체가 되어가는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에 ‘관음증’이라는 은밀해야 할 욕망은 대놓고 그 욕망을 드러내고, 날카로운 이빨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 사실이 끔찍한 공포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그것이 어쩌면 노골적인 미디어의 전략이며 숨겨진 공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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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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