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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능가하는 영화, 뭐가 있을까?

『탄착점』, 원작 파괴는 최대한 심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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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 해야만 하는 것들이 가정이나 조직과 상충된다면 언제든지 떠나갈 수 있는 남자. 전쟁에서 돌아온 후, 스왜거는 그렇게 살아왔다. 조용하게, 평온하게. 하지만 스왜거의 그런 삶이 비관적이거나 서글픈 것은 아니다. 스왜거는 해야만 하는 것,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것들에는 언제나 동의한다.

소설이나 만화를 영화로, 혹은 소설을 만화로 각색한 작품들은 대체로 원작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 단지 각색한 이의 역량 때문만은 아니다. 소설, 만화, 영화 등이 만들어질 때 창작자는 매체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기 마련이다. 소설의 심리 묘사, 만화의 컷 구성과 편집, 영화의 영상 같은 것들. 독자들은 각 매체의 특성을 잘 살린 작품들에 매료되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작품이 다른 매체로 각색될 때에는 대개 새로운 매체의 특성에 맞게 변형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소설의 세밀한 심리 묘사는 영화로 각색될 때 나레이션이나 영상의 구도, 미장센, 뉘앙스 등으로 대체된다. 또한 장편인 만화와 소설을 2시간 남짓의 영화로 만들려면 이야기와 인물의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당연히 원작의 팬은 분노한다. 그들이 흥미롭게 느꼈던 인물이나 매력적인 세부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원작을 능가하는 각색물, 리메이크는 그래서 너무나도 힘든 과정이다.

그래도 몇 가지 방법은 있다. 원작의 아쉬움을 달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최대한 원작을 살리면서, 소설의 팬들도 만족시킬 수 있도록 ‘환상 세계’를 실사로 구현한 <반지의 제왕>이 그렇다. <반지의 제왕>은 그 자체로도 완벽한 작품이지만,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세계를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어설프게 그 장면을 재현한다면 욕을 먹겠지만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은 거의 완벽하게 팬들이 상상했던 세계를 구현하여 찬사를 들었다.


스탠리 큐브릭처럼, 원작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롤리타> <클락워크 오렌지> <샤이닝> 등 문제적 소설을 탁월한 걸작으로 만들어낸 스탠리 큐브릭은 원작의 스토리나 주제 등을 자신의 시각으로 완전히 변형시키는 경우가 많아 ‘원작 파괴자’라고도 불렸다. <샤이닝> 원작자인 스티븐 킹은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너무나 싫어했고, 급기야는 자신이 각본을 써서 TV시리즈로 다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은 영원한 걸작으로 남았고, TV시리즈는 기억하는 사람조차 드물다.

반드시 걸작으로 각색하지 않아도 좋다.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 경우에는, 원작의 복잡한 플롯이나 다층적인 인물을 단순화시켜 흥미를 자극하는 경우가 많다. 엽기적인 만화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를 각색한 실사 영화는 원작을 꽤나 순화시켰고, 꿈과 희망 같은 낯간지러운 주제가 전면을 장식한다. 당연히 원작의 팬은 싫어했지만, 원작을 모르는 일반 관객들은 기발하고 유쾌한 코미디 영화로서의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를 좋아했다.

 

스티븐 헌터의 걸작 스릴러 『탄착점』을 각색한 영화 <더블 타겟>의 경우도 그렇다. 블록버스터로 만들기 위해서, 주인공을 비롯한 인물들의 성격을 단순화시켰고 플롯도 아주 심플해졌다. 너무 말끔하게 흘러가서 액션영화로서 즐기기에는 좋지만, 원작의 탁월한 점 중 하나였던 주인공의 복합적인 매력이 확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름 성공적이다.

『탄착점』을 읽기 전에 <더블 타겟>을 먼저 봤다. 나는 <더블 타겟>이 아주 재미있었다. 특수부대 스나이퍼였던 밥 리 스왜거. 마지막 임무에서 동료를 잃고, 숲속에서 개 한 마리와 함께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남자. 대통령의 암살 기도를 막기 위해 도와달라는 정부기관의 요청으로 나섰다가 난데없이 암살범으로 몰려 총상을 입고 쫓기게 된다.

원래 스나이퍼는 적진에 혼자 혹은 두 명이 팀을 이뤄 침투하여 목표물을 사살한 후 깜쪽 같이 빠져나와야 한다. 사격 솜씨만이 아니라 잠입술과 격투술 그리고 체력과 정신력까지 모두 출중해야 완수할 수 있는 일이다. 함정에서 도망친 밥 리 스왜거는 몸을 추스린 후 복수에 나선다. 타겟이 시야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망설임 없이 타격하는 스나이퍼답게, 전혀 흔들리지 않고 화끈하게 적을 공격해 들어간다. <더블 타겟>이 재미있었던 이유는 역시 스왜거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냉소적이지도 않고, 열혈도 아닌, 이것이 자신의 임무라면 철저하게 완수하겠다는 철혈의 스나이퍼에게 강하게 끌렸다. 『탄착점』이 출간되자마자 읽은 것도, 밥리 스왜거가 원작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가 너무나 궁금해서였다.

남부 촌놈…저런 놈들은 제대로 총을 쏠 준 알지만,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명예란 걸 꽤나 중시하거든요. 속았다는 걸 알면, 기를 쓰고 보복하려 들 겁니다...저 녀석들은 진정한 사내이고, 뭔가 머릿속에 박히면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조금 더 세밀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이렇게 된다.

이 자는 노새처럼 자존심이 강한 남부인이고, 그들은 전통적으로 고집불통이지. 남에게 떠밀리지도 않으려 하고, 모욕을 그냥 참아내지도 않아. 또한 해병대 특유의 겅호도 여전히 품고 있단 말이야.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는 않는 놈이지.

악당들은 스왜거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하여, 심리학 권위자를 불러다가 스왜거를 분석한다. 어떻게 하면 그를 음모에 끌어들일 수 있고, 그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 것인지 알기 위해서다. 그들은 스왜거를 이렇게 부른다. ‘남부 촌놈.’ 미국의 남부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딘가 보수적이고 거친 촌놈이다. 북부지역, 도시지역의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것을 지켜가는 고집 센 사람들. 뭐, 미국 남부에 살아본 적도 없으니 그저 그 정도였다.

그런데 『탄착점』을 읽으면서 그 고집 센 사람들의 긍정적인 면을 보게 되었다. 밥 리 스왜거는 전형적인 남부 남자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오점이 있었다. 베트남전에 참가하여 저격수로서 탁월한 명성을 쌓았지만, 절친한 동료를 소련의 저격수에게 잃은 것이다. 스왜거 역시 부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저격수가 하는 일은 대체로 비밀 임무, 즉 더러운 임무가 많다. 그는 전쟁영웅이 되어야 했지만, 오히려 그의 영웅적인 행위가 그를 나락에 빠트렸다.

밥 리 스웨거는 조국을 위해 모든 걸 바쳤지만, 그 결과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의 영웅적인 행위는 많은 미국인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그는 비상하게 뛰어난 킬러일 뿐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라고 보입니다만, 당연히 그의 것이 되었어야 할 훈장과 찬사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스왜거는 누군가에게, 국가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흥미를 가진 것은, 자신이 해야 하는 임무뿐이다. 전쟁 이후 살생이 의미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냥을 나서도 죽이지는 않는다. 자신의 소총이 얼마나 완벽한 것인지, 숲 속의 신과도 같은 존재인 거대한 사슴을 자신이 잡을 수 있다는 것만을 확인할 뿐이다. 누군가를 복종시킬 생각도 없고, 누군가의 존경을 받을 생각도 없다. 그가 속임수에 넘어간 이유는, 악당들이 그의 유일한 약점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에서 스왜거가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좀 치졸하다. 단지 국가를 위해서라니. 그건 스왜거 같은 인물에게는 전혀 합당하지 않은 유치한 수작이다. 원작에서는, 그의 동료를 죽이고 그를 부상시킨 소련 저격수 T. 솔라라토프를 끌어들인다. 그가 개입되었고, 당신만이 그를 대적할 수 있다고. ‘놈들에게 빚을 갚지 않고 살아가는 게 어떤 느낌일지 난 잘 알고 있어. 어쨌든 이번에는 빚을 몽땅 다 갚아줄 거야’ 그것만이 스왜거의 유일한 신조다. 그래서 뛰어들었고, 다시 그를 속인 악당들을 완전히 짓밟아버린다. 물러서지 않고, 확실하게.

스왜거는 단순한 인간이다. ‘혼탁한 현실세계에 뛰어드는 바람에 너무나 복잡해져버린 자신의 인생이 안타까웠다.’ 영화에서처럼 단선적인 인간이 아니라, 삶의 원칙과 필요한 것들이 너무나도 심플하다는 의미다. 오히려 그렇기에 가정의, 조직의 일부가 될 수 없는 남자.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 해야만 하는 것들이 가정이나 조직과 상충된다면 언제든지 떠나갈 수 있는 남자. 전쟁에서 돌아온 후, 스왜거는 그렇게 살아왔다. 조용하게, 평온하게. 하지만 스왜거의 그런 삶이 비관적이거나 서글픈 것은 아니다. 스왜거는 해야만 하는 것,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것들에는 언제나 동의한다.

영화에서 송두리째 빠진 것 중 하나는 악당들이 죽인 개의 시체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FBI 요원들이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건물 안으로, 스왜거는 기꺼이 들어간다. 억울하게 죽고, 부검을 당하고 무덤도 없이 사라져갈 개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한때를 같이 하며, 서로에게 믿음을 가졌던 동료를 위해, 스왜거는 자신의 목숨을 건다. 그것이야말로 고집 센 남부인의 자긍심인 것이다. 우리들이 눈여겨 보아야 할, 지켜야할 삶의 신조.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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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탄착점

<스티븐 헌터> 저/<하현길> 역14,400원(10% + 5%)

거대한 음모와 맞서 싸우는 저격수 밥 리 스왜거 영화 〈더블 타겟〉 원작소설 천재 스나이퍼가 대통령 암살미수범이라는 누명을 쓰면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거대한 세력과 맞서 싸우는 활약상을 그린 소설. 영화 〈더블 타겟〉의 원작인 이 작품은 〈밥 리 스왜거〉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이다. 천재적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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