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아내의 꾸밈에 남편 “제발 그렇게 떡칠하지 마요”

인정받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합격자 이름이 빼곡하게 쓰인 하얀 벽보 위에서 내 이름 세 글자를 확인하던 그 날 어떤 기분이었냐고 물으셨지요. 그 날 불어오던 바람을 기억해요. 차가움이 얼굴에 닿아서 촉촉하고 상큼하게 느껴졌어요.

합격자 이름이 빼곡하게 쓰인 하얀 벽보 위에서 내 이름 세 글자를 확인하던 그 날 어떤 기분이었냐고 물으셨지요. 그 날 불어오던 바람을 기억해요. 차가움이 얼굴에 닿아서 촉촉하고 상큼하게 느껴졌어요. 아주 잠시 내가 무슨 새일까 스치듯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비둘기나 까치, 이런 평범한 새는 분명 아니었어요. 푸드덕푸드덕 어렵사리 안쓰러운 날갯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법 커다란 날개를 우아하게 펼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앤드류 와이어스, 「비상 (Soaring)」, 패널에 템페라
1942-1950, 122x221cm, 버몬트, 셸번 미술관

미국의 와이어스(Andrew Wyeth, 1917-2009)가 그린 작품 「비상」이 생각나네요. 기품 있게 날개를 편 독수리들의 포즈 속에 자유로움이 느껴집니다. 드디어 애처로운 날갯짓을 멈추고 수평으로 한껏, 두 날개를 거침없이 쫙 벌린 채 기류를 타는 저 기분이 바로 성취의 기쁨 아닐까요. 그래요. 오래도록 끙끙대던 긴 글쓰기를 마치고 책상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을 때의 그 뿌듯함일 거예요. 아시죠? 공기가 벌써 다르잖아요. 이런 공기의 맛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직 하나의 과정을 끝내고 스스로 한 단계 올라선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지요.

하지만, 그 공기 속에 마냥 머물 수는 없어요. 하얀 벽보 위에 씌어있던 그 이름 석 자를 세상에 알리려면 다시 웅성웅성 시끄러운 곳으로 내려가서 무언가 보여주어야 하거든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세상이 내게 원하는 것은 또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성공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다수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단 한 사람에게서조차도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펄 벅(Pearl S. Buck, 1892-1973)의 소설 『동풍서풍』에서는 오래도록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서양의학을 전공한 겉만 중국인인 신랑과, 그와 정혼한 뼛속부터 중국인인 신부가 나오는데요. 서양식의 시각을 갖게 된 신랑은 전통적인 미인인 신부의 아름다움을 도통 발견하지 못합니다. 신부 퀘이란은 그런 무관심한 신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지만 통하지 않지요. 일찍 일어나 향유를 떨어트린 미지근한 물에 세수를 하고, 고운 쌀가루 분을 새하얗게 펴 바르고 수줍게 기다려보아도, 신랑으로부터 듣는 말은 “제발 그렇게 떡칠하지 마요”였거든요.

짧은 대답 이외에는 하지 않던 신랑이 어느 날 공후를 연주하는 신부의 분위기에 약간 반했는지 처음으로 말을 겁니다. “퀘이란, 난 당신이 전족을 풀었으면 하오. 아름답지 않고, 건강에도 해로워요. 난 의사요. 뼈가 얼마나 흉측하게 오그라들어 있는지 이걸 보시오.” 그는 끔찍하게 틀어진 뼈를 종이에 그려서 신부에게 내밉니다.

“아름답지 않다고요?” 퀘이란은 전족을 하느라 밤에는 잠을 설치고 낮에는 놀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수많은 나날들을 생각했어요. 어린 시절 내내 어머니는 퀘이란의 발을 더운 물에 담그고 매일 붕대를 점점 더 단단하게 감아주시며 이렇게 말해주곤 했어요. “좀만 참으렴, 네 남편이 매일 너의 발을 보며 사랑스럽다고 칭찬할 걸. 그런 날이 곧 올 거다.” 하지만, 이게 뭔가요? 그녀가 어렵게 성취한 그 아름다움의 결실을, 그 발을, 지금 남편은 추하다고 말해버렸습니다. 성취와 성공은 확실히 다른 종류의 것이군요. 퀘이란은 울음을 참지 못해 밖으로 뛰쳐나오지요.

그림을 보세요. 프랑스 대혁명 시대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가엾은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이에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혁명기에 입었던 것』 판화 중에서, 1778년 6월.

‘가엾은’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그녀도 나름 프랑스 시민의 사랑을 받기 위해, 진정 국모로 인정받기 위해 별의별 노력을 다 기울였기 때문이에요. 이 그림 속 앙투아네트의 머리장식을 좀 봐주세요. 궁정 미용사에게 프랑스가 영국해군에게 승리했던 함선의 모양으로 만들어달라고 하고는, 새벽부터 일어나 반나절을 줄곧 화장대 앞에 앉아 버티고 있었겠지요.

그림 왼쪽 위에 “독립 그리고 자유의 승리를 위한 머리장식”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한창 독립운동 중이던 미국을 응원하며, 여왕 스스로도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적극 지지한다는 의미로 만든 머리장식이에요. 앙투아네트는 이런 머리를 하고 우아하게 손을 흔들면 시민들이 환호성을 치리라는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무거운 머리에 목줄이 뻣뻣이 아프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다리가 후들거리고 몸이 휘청거렸지만 시민들의 호감과 신임을 얻으리라는 생각에 꾹 참고 견뎌냈습니다.

그런데 이게 또 어찌된 일이란 말입니까. 여왕의 행렬을 보던 시민들은 기뻐하기는커녕 “빵을 달라, 우리는 배고프다”하고 외치는 것이었어요. 한 사람의 목소리는 둘이 되고 셋이 되고… 이 때 아마 여왕의 그 유명한 대사가 등장하지 않나 싶습니다. “빵이 없으면 쿠키를 먹으면 되지 않나.” 굶어본 적이 없는 여왕이었으니까요. 군중도 어이가 없지만 여왕도 속이 상합니다. 공들인 머리에는 눈길도 한번 주지 않는 그들이 야속할 뿐입니다.

세상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늪에 빠지기 쉽습니다. 손 선생님은 무슨 늪을 겪어보셨나요? 제가 만나 본 것은 성실성의 늪이에요. 성실함만으로는 답이 찾아지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성실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상황이지요. 슬럼프인데도 쉬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자신을 채찍질해가며 끝없이 노력해요. 성실 외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예전엔 즐거워서 하던 일이었는데, 점점 스스로를 잠식하는 고통이 되고 맙니다.

자기기만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도 많이 봅니다. 성공에 눈이 멀어 표절이나 위조 등 정당하지 않은 방식까지 몽땅 끌어오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은 주로 신문에 이름이 나게 되요. 하얀 벽보에 올랐던 그 순결한 이름이 안타깝게도 ‘쯧쯧’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남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것이지요.

다음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은 천재 시인 채터튼(Thomas Chatterton, 1752-70)의 최후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헨리 월리스, 「채터튼」, 캔버스에 유채, 1855-6, 60.2x91.2cm, 테이트 갤러리

채터튼은 중세의 어투를 흉내 내어 롤리(Thomas Rowley)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는데, 그것이 문제시 되면서 갖은 혹평과 표절시비에 휘말리게 되고, 견디지 못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지요. 열일곱이라는 피지도 못한 나이에 말입니다. 약 백 년쯤 흐른 후에 월리스(Henry Wallis, 1830-1916)라는 영국의 화가가 그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어요. 파랗게 변한 창백한 얼굴 아래로 그의 글귀들이 찢긴 종이 위에 보이는군요. 이제 이어붙일 수도 없게 흩어진 저 글귀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이루지 못한 허영심의 조각들인가요.

그의 발끝, 화면의 오른쪽에는 생명이 끝났다는 것을 암시하듯 막 불이 꺼져 연기가 나는 초가 보입니다. 채터튼의 영혼은 그 연기를 따라 열린 창으로 향하고 있네요. 하늘만이 자신을 평가해주길 바란다는 말을 그가 유서에 써놓았거든요. 유서에 있는 글귀 일부가 묘비에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독자들이여,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를 판단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절대자 뿐, 그는 지금에서야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창을 열어놓은 것을 보니, 화가는 아마 채터튼의 묘비를 읽은 모양입니다. 죽은 이의 영혼이 저 하늘을 향해 날아가기를 빌어준 것이지요.

세상의 평가는 거부하고 하늘의 평가에 스스로를 내맡겨버린 사람의 이야기로 이 글을 맺고 싶지는 않군요. 좌절하지 않고 사는 묘책은 없을까요? 지난주에 저는 좌절하지 않는 학교가 있다기에 읽어봤습니다. 『벤야멘타 하인학교』라는 책 속에 나오는 학교에요. 제겐 좀 익숙하지 않은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1878-1956)가 썼는데, 주인공인 야곱의 목?는 하인이 되는 것이라는군요. 그래서 하인을 양성하는 벤야멘타 학교에 입학해요.

이곳에서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며, 늘 같은 것을 반복하는 훈련을 주로 합니다. 동경을 가슴 속에 품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고, 지나친 성취욕도 죄악입니다. 왜냐하면 하인의 규범은 오직 주인이 원하는 딱 그만큼만 해드리는 것이지, 과하게 하면 오히려 주인을 짜증나게 할 뿐이거든요. 이 학교 최고의 모범생인 크라우스는 열망, 증오, 권태의 감정을 일절 배우지 못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상실감도 전혀 느끼지 않지요. 과연 그를 진정한 무위(無爲)를 수행하는 자라고 할 수 있을지…

요컨대 세상에 대해 알려고 들지 않는 자, 도전하지 않는 자, 감수성을 철저히 소멸시킨 자만이 좌절을 모르고 살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냥 늪을 들락거리며 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오늘의 책

수학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는 엄마표 유아수학 공부

국내 최대 유아수학 커뮤니티 '달콤수학 프로젝트'를 이끄는 꿀쌤의 첫 책! '보고 만지는 경험'과 '엄마의 발문'을 통해 체계적인 유아수학 로드맵을 제시한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수학 활동을 따라하다보면 어느새 우리 아이도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랄 것이다.

나를 바꾸는 사소함의 힘

멈추면 뒤처질 것 같고 열심히 살아도 제자리인 시대. 불안과 번아웃이 일상인 이들에게 사소한 습관으로 회복하는 21가지 방법을 담았다. 100미터 구간을 2-3분 이내로 걷는 마이크로 산책부터 하루 한 장 필사, 독서 등 간단한 습관으로 조금씩 변화하는 내 모습을 느끼시길.

지금이 바로, 경제 교육 골든타임

80만 독자들이 선택한 『돈의 속성』이 어린이들을 위한 경제 금융 동화로 돌아왔다. 돈의 기본적인 ‘쓰임’과 ‘역할’부터 책상 서랍 정리하기, 용돈 기입장 쓰기까지, 어린이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로 자연스럽게 올바른 경제관념을 키울 수 있다.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야

저마다 삶의 궤적이 조금씩 다르지만 인간은 비슷한 생애 주기를 거친다. 미숙한 유아동기와 질풍노동의 청년기를 거쳐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하고 늙어간다. 이를 관장하는 건 호르몬. 이 책은 시기별 중요한 호르몬을 설명하고 비만과 우울, 노화에 맞서는 법도 함께 공개한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