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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보기 부끄러우니 밤에 오시구려" 아내의 구박에 남편은…

성공과 좌절, 성취와 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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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出仕)’는 벼슬길로 나아간다는 뜻이죠. 옛 선비들이 입신양명하려면 출사가 직방입니다. 출사는 곧 출세니까요. 과거 급제에 목매다는 게 당연했지요.

‘출사(出仕)’는 벼슬길로 나아간다는 뜻이죠. 옛 선비들이 입신양명하려면 출사가 직방입니다. 출사는 곧 출세니까요. 과거 급제에 목매다는 게 당연했지요. 안타까운 것이, 장원은 단 한 명인데 낙방은 셀 수가 없다는 겁니다. 공부 잘한 이 선생이 그 심정 알까요. 낙방한 사람은 그날로 상갓집 개 꼬락서닙니다. 여북하면 아내조차 손가락질하겠습니까. 사례가 있습니다. 과거에 미끄러진 남편을 두고 아내가 구박하는 시를 지었는데, 이렇습니다.

낭군은 빛나는 재주를 가지고도
어찌 해마다 낙방하고 돌아오나요
이제 임의 얼굴 보기가 부끄러우니
오시려거든 밤중에나 오시구려

良人的的有奇才
何事年年被放廻
如今妾面羞君面
君到來時近夜來


벌건 대낮에 낯짝 마주치는 게 창피하다는 얘기지요. 아내의 냉대도 얄밉지만 죄지은 듯이 고개 떨어뜨린 남편이 더 딱하게 보이네요.

남편은 입술을 깨뭅니다. 떨어지고 떨어지다 진이 빠질 즈음, 드디어 급제합니다. 사기가 하늘을 찌른 그는 냉큼 달음박질합니다. 아내에게 뻐기고 싶은 마음에 댓바람부터 고향으로 갈까요. 아니올시다. 냉갈령 같은 아내를 떠올리면 시쁜 마음이 불쑥 일어납니다. 남편은 두고 보란 듯이 시 한 수를 날립니다.

지난날 애쓴 것 과시할 건 없어도
오늘 아침 마음이 들떠 거침이 없네
봄바람에 신이 나 말발굽 내달리며
하루 내내 장안의 꽃이란 꽃 다 봐야지

昔日齷齪不足誇
今朝放蕩思無涯
春風得意馬蹄疾
一日看盡長安花


철부지 사내의 앞가림이 기껏 요 모양입니다. 지난날 아내가 야속하게 굴었기로서니 방이 붙자마자 날름 기방으로 달려가는 건 또 뭡니까. 하지만 너그러이 봐줍시다. 출세의 지름길이 과거 급제라 했지요. 급제한 날은 세상을 다 끌어안을 배포가 생깁니다. 이 선생이 그 좋은 대학에 합격한 날을 돌이켜보세요. 청운의 꿈이 바야흐로 다가오는, 황홀한 성취의 순간을 한손에 거머쥔 거지요. 기방에 간 사내도 성취감에 못 이겨 깜냥껏 자축하고 싶었겠지요. 남들 눈에 좀 민망한 뒤풀이긴 해도 말입니다. 이 선생은 그날 어디로 달려갔나요.

벼슬이 좋기는 하나 봅니다. 부국과 민생에 헌신할 기회를 잡은 거야 말할 나위 없지만, 벼슬자리란 뭣보다 가문의 명예와 일신의 영광입니다. 등과(登科)와 출사로 개인적 성공과 사회적 성취, 둘 다 움켜쥔 셈이지요. 남부러운 성공에는 화려한 보상이 따릅니다. 마침 높은 벼슬에 오른 이가 떵떵거리며 호사를 누리는 그림이 있습니다. 18세기 화원 출신 김희겸이 그린 「석천한유도(石泉閒遊圖)」입니다.

김희겸, 「석천한유도」, 종이에 담채
119.5x87.5cm, 전용국 소장

석천은 무과 급제 후 전라우수사와 경상좌병사에 오른 전일상(田日祥)의 호입니다. 그는 5대에 걸쳐 무관을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나 종2품 당상 요직을 지낸 분이죠. 멋들어진 누각에 올라 한가로이 여름 한철을 보내는 석천이 그림의 주인공입니다. 그의 위용을 보여주는 요소들이 그림에 등장합니다. 무골답게 키가 팔 척인 그가 적삼 위에 마고자를 걸쳤는데 앉은 품새가 자못 듬직합니다. 험상궂은 아랫사람이 못가에서 말을 씻고 있죠. 석천이 타는 저 말은 적토마나 천리마에 견줄 수 없어도 흰 바탕에 검은 반점이 예사롭지 않은 종자입니다. 수박을 소반에 받치고 술병을 든 채 누각을 오르는 여인들의 치맛자락이 버들가지처럼 나부낍니다. 누마루에 앉은 여인들은 거문고를 타고 연초를 장죽에 쟁여 석천에게 권합니다. 손등에 올려놓은 매와 기둥에 걸린 칼은 무인의 호기와 어울리는 소재입니다. 무릎 앞에 놓인 붓과 벼루와 서책은 문무겸전한 그의 국량을 과시합니다. 으스댈 만한 고관대작의 망중한입니다.

잠깐, 퀴즈 하나 낼까요. 문인의 네 벗은 문방사우라 하죠. 종이, 붓, 먹, 벼루입니다. 무인에게도 ‘무인사호(武人四豪)’가 있어요. 벗 대신 호걸로 부른 게 문인과 다른데, 그 네 가지가 뭔지 아시나요. 이 그림이 힌트입니다. 말과 매와 칼은 쉽게 짐작되지요. 나머지 하나가 뜻밖입니다. 답은 관기(官妓)입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저 여인들이지요. 영웅호색이라 하더니 무인이 노는 가락은, 이 선생이 언짢게 생각할지 몰라도, 제 눈에 참 호방하게 보이는군요. ?도 덜도 아닌 호시절입니다. 젊은 날 애쓴 덕분에 석천은 놀 만한 자격을 갖췄지요. 그림에서 시조 가락이 절로 나옵니다.

오늘도 좋은 날이, 이곳도 좋은 곳이
좋은 날 좋은 곳에, 좋은 사람 만나이셔
좋은 술 좋은 안주에 좋이 놂이 좋아라.


물려받은 가재로 음주가무에 탕진하는 파락호라면 저런 장면이 당치 않겠지만, 오로지 제 힘으로 각고면려한 끝에 번듯한 벼슬에 오르고 그 자리의 정당한 권위로 공평무사한 선정을 베푼 관리라면 저 혼자 가욋날 풍류를 즐긴다 한들 누가 함부로 찧고 까부는 입살에 올리겠습니까. 일 잘 하는 이가 잘 놀고 잘 노는 이가 일 잘 한다지요. ‘성공도 버릇이다’고 하던데 한번 성취해본 사람이 다시 도전할 줄 안답니다.

자, 이제 성공 대신 좌절을, 성취 대신 쇠락을 볼 차롑니다. 열흘 붉은 꽃 없다지요. 양지가 음지 되고 꽃 지면 봄날은 갑니다. 성공에 들뜬 나날도 지나면 아침나절 이슬입니다. 이 그림 보면 가슴이 아립니다.

이인상, 「병국도」, 종이에 수묵
28.x15cm, 국립중앙박물관

낙목한천에 홀로 피는 꽃이 국화이고 삭풍조차 꽃잎을 지게 할 수 없어 국화는 오롯이 오상고절입니다. 하지만 보세요, 이 국화가 얼마나 가여운가를. 바윗돌 앞에 국화가 힘에 부친 꼴로 서있습니다. 모가지는 꺾이고 잎사귀는 오그라들었지요. 두 그루 가지는 곁에 선 대나무에 기대 겨우 버팁니다. 말라비틀어진 국화에 향기인들 고스란할까요. 처연하기 짝이 없습니다. 청신한 모습 다 제쳐두고 시거에 시들어 빠진 꽃을 그린 이가 궁금해집니다.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인화가 이인상이랍니다. 화면 귀퉁이에 ‘남계(南溪)에서 겨울날 우연히 병든 국화를 그리다’라고 써놨습니다. 이인상은 함양에서 찰방 벼슬을 그만둘 무렵, 명품 국화로 알려진 조홍(鳥紅)을 심었대요. 그가 바깥 일로 자리를 비우고 돌아왔더니 잔향마저 맡을 수 없을 정도로 그 국화가 애처로이 시들어버렸답니다. 그는 「병국도(病菊圖)」를 그리고 시를 지었습니다.

시든 꽃 떨어지진 않아도
새로 꽃핀들 또 시름겨울 뿐
뒤늦게 바람 다시 불어오니
가을을 못 이겨 고개 떨구네

衰花猶不落
新花又嚬愁
晩來風更急
顚倒不勝秋


이인상의 생애는 저 병든 국화마냥 눈물겹습니다. 그의 초상화를 보면, 골상이 수척하고 눈빛이 차가운데 입은 다물었고 눈두덩이 깊습니다. 그는 가난했지요. 서른 넘어 친구들이 남산 위에 마련해준 초가 한 채를 얻었는데, 문설주가 낮아 드나들 때 머리를 숙여야 했지만 집에 이름 붙이기를 ‘능호지관(凌壺之觀)’이라 했지요. 삼신산 중 하나인 방호산을 능가하는 경관이란 뜻인데, 이인상의 호도 ‘능호관’입니다. 그는 서출이었습니다. 학문은 높아도 벼슬이 미관말직에 머물러 배운 자의 한이 뼈골에 사무쳤으니 그의 뜻을 펼 수 없는 세상은 한탄과 좌절의 연속이었답니다. 추상 같은 몸가짐으로 일관한 이인상은 벼슬살이 하면서 겪는 아랫것들의 사소한 다툼에 염증을 냈고, 사대부들의 고약한 행패를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대요.

그의 국화 그림을 다시 볼까요. 바짝 마른 붓질로 사위어가는 국화를 그린 그는 ‘목숨을 아끼려는 구실로 천성을 바꿔야 하는가’라고 토로했습니다. 국화는 살아남고자 욕심 부리지 않습니다. 그러하되 좌절을 곱씹은 이인상의 처지가 ‘병국도’에 은연중 스며든 듯합니다. 이인상의 말년작인 ‘송하독좌(松下獨坐)’입니다.

이인상, 「송하독좌」, 종이에 수묵
80.0x40cm,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원령취사 갑술제야(元靈醉寫 甲戌除夜)’라는 글씨가 보이지요. 풀이하면 ‘원령이 취해서 그리다. 갑술년 섣달 그믐날 밤’입니다. 원령은 이인상의 자이고, 갑술년은 1754년, 그가 45세 되던 해입니다. 음력으로 쇠던 시절이니 제야는 설을 하루 앞둔 날이죠. 새해를 코앞에 두고 화가는 무슨 회포로 이런 적막한 그림을 남겼을까요.

노인의 발치 아래가 절벽입니다. 노인은 얼굴을 바짝 치켜들고 저 멀리 내다봅니다. 표정에 외로움 따위는 뵈지 않지요. 예부터 이런 포즈를 일컬어 ‘백안간타세상인(白眼看他世上人)’이라 했습니다. ‘시답잖은 눈빛으로 세상 사람들을 본다’는 뜻입니다. 깨끗한 도덕군자이자 비타협적 원칙주의자로 살아온 이인상은 말년에 들어 세속의 교제를 끊고 외따로 지냈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부나비처럼 날뛰는 사람들이 그의 눈에 하찮았지요. 그는 좌우명을 새로 붙였습니다. ‘꾸밈은 실질보다 헛되지 않고 소행은 명예를 좇지 않는다.’ 그림 속 소나무는 겨울 시린 세상에서 홀로 푸른 존재입니다. 매서운 풍상을 견디고 세상의 더러움에 등돌린 노인의 다짐과 닮았지요. 모름지기 안분지족이 마땅합니다. 한 때의 성공과 성취가 평생의 안락을 보전해주는 것이 아니듯 기나긴 좌절과 쇠락일망정 깨어있는 정신에 좀먹을 일은 없습니다. 청산 곳곳이 우리가 묻힐 흙인데, 죽어서 명리(名利)가 딴 데로 가겠습니까. 저 노인이 불렀을 노랫가락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벼슬을 매양하랴, 옛 산에 돌아오니
구릉에 솔바람, 더러운 내 입 다 씻었다
솔바람아, 세상 기별 오거든 불어 도로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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