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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상실의 시대>, 야해서 걸작?

영화로 만든 『상실의 시대』, 원작과 어떻게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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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광고에 무리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가 쓰인 적이 있었다. 춘천 가는 기차 속에서 긴 머리의 청순한 여자가 『상실의 시대』를 읽고 있을 때 근사한 남자가 다가가 말을 거는 광고였다

영화 <상실의 시대> 티저 포스터.
극중 와타나베와 미도리

춘천행 기차 안에서 『상실의 시대』 읽던 기억

한 광고에 무리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가 쓰인 적이 있었다. 춘천 가는 기차 속에서 긴 머리의 청순한 여자가 『상실의 시대』를 읽고 있을 때 근사한 남자가 다가가 말을 거는 광고였다.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를 BGM으로 깔았던 이 인상적인 광고는 꽤 히트를 쳤다. 무릇 광고란, 어떤 인물, 어떤 소재를 쓰든 제품 구매를 호소해야 하는 법이거늘, 이 광고는 나에게 춘천 가는 기차 안에서는 『상실의 시대』를 꼭 읽으라는 메시지만을 남겨주었다. (보라, 무엇을 광고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무렵, 혼자 춘천행 기차를 탈 일이 있었고, 기차역 매점에서 마치 춘천역의 상징처럼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던 그 책을 샀다. 그래, 나는 『상실의 시대』를 한 쪽에 끼고, 한쪽 팔엔 고독을 끼고 춘천행 기차에 올라타던, 그런 여고생이었다. 기차는 출발했고, 책도 몇 페이지를 넘겼을 무렵, (이럴 수가!) 근처에 앉아 있던 한 훈남이 다정하게 웃으며 “노르웨이 숲은 찾으셨나요?”라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마는, (그랬다면 내 인생이 한 뼘쯤 바뀌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몇 장 채 읽지도 못하고 코를 박고 졸다 책을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춘천에서 돌아와 내 방에 던져진 『상실의 시대』는 그로부터 어언 몇 년 간 책장 속에 봉인되어버렸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사람들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연호(!)하던 시절이 있었다. 『해변의 카프카』가 나왔을 때, 그리고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 재 발간되었을 무렵이었다. 신문을 펴든, 서점을 가든 항상 “무라카미, 무라카미”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시, 시류에 역행하는 것을 개성이라고(?) 여겼던 나는 남들이 다 읽는 베스트셀러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던 학생이었다. 스스로를 도서 고고학자라고 칭하고는, 남들이 읽지 않는 책을 찾아 읽는 것에 희열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남하당 박영진 말투로) 무~라~카~미? 당연히 손대지 않았다. 이런 책은 나 말고도 봐줄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맞다. 내 책장에 무라카미의 소설이 한 권 있지.’ 그때 『상실의 시대』를 다시 만났다.

이해할 수 없었던 명작, 『상실의 시대』


처음 그 책을 읽었을 때, 그야말로 문화충격이었다. 어째서, 일본의 고등학생들은 온통 머릿속에 섹스 밖에 없는 거야? 어떻게 이런 농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지? 비슷한 나이를 보내고 있던 당시 나의 정서적 성장 부진을 심히 개탄해야 했다. 이게 그렇게들 명작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느 부분을 두고 명작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런 내 고민을 들은 친구 왈,

“야하잖아!”

「메밀꽃 필 무렵」 속 허 생원이 동이가 왼손잡이인 걸 보고, “내가 니 아빠다” 깨닫는 장면에서 감동하고,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속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라는 대사에 담긴 소설과 삶의 아이러니에 감탄하며, 나도 훗날 이런 소설을 써내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어렴풋이 꾸던 학생에게, 『상실의 시대』가 획득한 문학적 성취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말 야한 것들을 거침없이 많이 써야 좋은 작가가 되는 걸까? 그게 솔직한 걸까? 정말 어른 연인들은 그런 대화밖에 하지 않는 걸까? 고민이 끊이지 않는 나날들이었다.

꿈을 저버릴 순 없었으므로, 판단의 대상을 좁혀나갔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일본 사람들, 개중에도 일본 대학생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사는구나, 생각했다. 이건 아마도 와타나베의 성격을 꼭 닮았을 하루키라는 자가 현실 속에서 이루지 못하는 꿈을 소설 속에 투영한 게 분명하다. 자기로서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여자들-애인이 있거나 친구의 여자거나-이 자신에게 마구 달려드는, 그의 내적 욕망의 표출이 분명하다. 평론가들이 감동해 마지않던 ‘일본의 시대상’ 같은 건 도무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내가 그런(!) 것에만 예민한 시기였기 때문일까?)

내 어린 날의 『상실의 시대』는 거기까지였다.

와타나베는 과연 무엇을 기억할까?


그리고 오늘, 영화 <상실의 시대>를 보고 (원작 소설 『상실의 시대』를 읽었다고 할 수 있고, 하지만 읽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는) 나는 예전에 원작을 읽고 느꼈던 당황스러운 질문이 다시금 떠올랐다. 영화 속에서 배우들은 만나기만 하면, 역시 그것(!)에 대한 얘기밖에 하지 않는다. 극중 와타나베의 대사처럼 “제발 때와 장소를 가려 줘”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그들은 솔직하게 지금 하고 싶다고, 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런 얘기만을 나눈다. (어떤 평론가는 ‘에로물’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원작을 제대로 살린 건가.

영화 속에는 소설 속에서 의미 있게 언급되는 운동권, 시위 등의 시대적 배경마저 생략되어 있다. (그때 읽은 그 『상실의 시대』가 된 거다!) 마치 소설 속의 문장이 뚝 끊기듯, 미도리와 와타나베가 대화를 하고 있던 중 영화는 갑자기 암전되고 막을 내린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 위로 흐르는 음악.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

불현듯 내가 나이를 먹었듯 와타나베도 이맘때면 나이를 더 먹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가 훗날 이 상실의 시대를 기억할 때 무엇이 떠오를까? 궁금해졌다. 과연 무엇을 기억할까? 왜냐하면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기억해 달라고 애원했고, 와타나베는 그러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결국 기억의 문제가 아닌가. 나오코를 힘들게 한 건, 사랑하던 카즈오의 죽음보다 그에 대한 기억이었고, 와타나베가 나오코에게 갖고 있는 일종의 ‘책임’ 역시 거기서 기인하고 있다. 어쩌면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의 원제)은 잊으려는 기억과 잊혀지지 않는 기억과의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기억할 수 있고, 원하지 않으면 쉽게 잊을 수 있다면 아마 우리는 삶 속에서 노르웨이의 숲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처는 어떤 것으로도 치유되지 못한다. 그런 일을 겪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 피를 흘리거나, 눈물을 흘리는 일 밖에. 그리고 살을 맞부딪혀가며. 서로가 사랑하는지, 서로가 살아있는지 체험하고 확인하고 기억하는 일 밖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잃고 난 후에는, 앞으로 다시 한 번 사랑할 수 있을지, 살아갈 수 있을지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꼭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다.”

와타나베는 훗날, 그녀들과의 섹스가 떠오를까? 글쎄,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와타나베의 시점으로 구성된 영화를 보고 두 시간 가량 그의 시간을 체험하고 난 이후, 언뜻 언뜻 떠오르는 것이란 이런 것들이었다.

비 오는 집에서 미도리와 두런두런 나누던 이야기. (“알았어, 미도리. 내가 잘못했어. 네가 금방 딸기 쇼트케이크가 곧 안 먹고 싶어지리라는 것쯤은 짐작했어야 했는데.”) 어둠 속에서 나오코와 말없이 눈빛을 맞대던 순간. 수화기 너머로 “아이시떼루”라고 말할 때의 정적. 나오코와 함께 비를 보던 풍경.

“만일 내가 네 마음에 어떤 상처를 남겨 놓았다면, 그것은 너만의 상처가 아니고 나의 상처이기도 해. 그러니까 그 일로 해서 나를 미워하진 말아 줘”라고 쓴 편지글들……. 이런 것들이었다. 막상 영화를 볼 때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장면도 인상 깊게 떠오른다.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기억에 남는 것들은 오히려 이렇게 사소한 것들이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어떻게 잊지 않을 것인가?


“그럼 내 부탁 두 가지만 들어줄래?”
“세 가지라도 들어주지.”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두 가지면 돼. 두 가지면 충분해. 하나는 자기가 이렇게 날 만나러 와줘서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하는 것. 정말 기쁘고, 정말 구제받은 것 같아. 혹시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해도 말이야.”
“또 만나러 올 거야. 다른 하나는 뭐지?”
“나를 꼭 기억해 줬으면 하는 것. 내가 존재했고, 이렇게 와타나베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라도 기억해 줄래?”
“물론 언제까지라도 기억하지” 하고 나는 대답했다.
(…)
“정말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을 거지?”
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상실의 시대』P.23)


사랑하는 사람에게 요구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기억되는 일이라고, 그들은 생각한 게 아닐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서로에게 보인 것이 아닐까.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기억에 남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그들은 섹스를, 혹은 죽음을 ‘저지른’ 것은 아닐까. 적어도 그런 것들은 어떤 액션이고,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머릿속에 내내 잔상이 남았다.

만약 내가 지금의 이 시기를 훌쩍 보내고 난 뒤에, 지금을 되돌아본다면 무엇이 떠오를까? 지난 날 무엇을 하던 내가 떠오를까? 나의 가장 많은 시간은 무엇을 하고 있었다고 기억할까? 혹시, 이런 것들은 아닐까? 그저 어떤 생각들- 내가 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고민. 내가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한 모습에 대한 상상. 이런 것들에 골몰해 있는 풍경은 혹시 아닐는지.

그런 실체 없는 간절함뿐인 것은 아닐는지. 염려, 망상, 손에 잡히지 않는 생각들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닐는지. “오늘 하루 뭘 하고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어.” 푸념하듯, 가장 좋은 때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나오코가 카즈오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듯, 상처 난 기억만 들여다보느라 매일매일 새 밥상처럼 차려지는 시간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건 아닐까. 누군가를 가볍게 안아주는 것만큼도 아름답지 못한. 그런 시간들로 채워버린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이야 말로 청춘의 상실, 젊음의 상실. 시간의 상실. 상실의 시간이 아닌가.


머릿속에서만 되풀이 한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 먼지처럼 사라진다. 말하지 않은 마음, 보여주지 않은 사랑은 흔적도 없이 발화된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무엇을 ‘잊지 못할 것인가’ 『상실의 시대』가 던지는 질문은 이제 이렇게 바뀌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몸으로 새겨야 한다. 그 사람과 만나서 눈빛을 맞대고 이야기하고 함께 겪어야 한다. 망상은 글로 쓰든, 영상으로 찍든 체험화해야 한다.

왜 굳이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공연장에 가서 직접 음악을 들어야 하는지도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잘 모르는 그림 앞에서 왜 서 있어야 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책을 읽고 나서는, 작가를 만나보고 싶고, 같은 책을 읽은 독자들도 만나고 싶어졌다. 사람 많은 곳에 왜 가냐고, 투정부리며 팔짱끼고 지켜봤던 축제 현장에도 꼭 발 도장을 찍어야겠구나 싶다.

굳이 기억하려고 들지 않아도, 그렇게 몸으로 부딪친 순간들은 분명히 언젠가 어떤 기억으로든 출력될 것이다. 좋은 기억이든, 그렇지 못한 기억이든 시간을 통과해 남은 색 바랜 기억들은 또 다른 감흥으로 떠올라, 그때와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들, 붙잡으려고 했으나 손가락 틈새로 우수수 쏟아버린 시간들은 이런 것들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살면서 뭔가 꼭 남기거나 기억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영화 <상실의 시대>를 보고 나니 순간 그런 것들에 욕심이 생겼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를 바라고, 내가 그들을 기억하길 바란다. 『상실의 시대』는 체험하라고 말한다.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 그때야만 비로소 기억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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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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