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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문장에 마침표까지 찍어내는 배우

<이층의 악당> 김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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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참 많이 달라졌다. 당대 최고의 인기 여배우였던 김혜수와 이제 막 연기를 시작한 배우 한석규는 <닥터 봉>을 통해 참 많은 것을 얻었다.


15년, 참 많이 달라졌다. 당대 최고의 인기 여배우였던 김혜수와 이제 막 연기를 시작한 배우 한석규는 <닥터 봉>을 통해 참 많은 것을 얻었다. 영화로 데뷔했지만 TV 드라마를 통해 인기스타가 된 김혜수에겐 영화 대표작을 만들어 주었고, 젠틀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막 사랑받기 시작한 한석규는 충무로의 기대주로 화려한 신고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5년 뒤 <이층의 악당>을 통해 한석규와 김혜수가 만났다. 이제 더 이상 파릇파릇한 청춘의 매력은 없지만, 그것을 넘어서 한석규와 김혜수는 원숙한 배우의 노련함으로 과장과 현실 사이를 매끄럽게 오간다. 15년, 두 배우의 입지도 많이 달라졌다. 그 사이 슬럼프도 있었고, 당연하게도 맡을 수 있는 캐릭터의 영역도 달라졌다. 하지만, 최고 인기 배우의 자리는 후배들에게 넘겨주고도 조급해 하지 않는 뚝심과 여유가 맴도는 그들에게 지금의 존재 이유는 스타로서가 아니라 표현하고 보여줄 것이 더 많은 진정한 배우에 더욱 비중이 실렸다.

멋진 중년이 되어 꾸준히 노력하는 한석규도 멋지지만, 지금 우리는 1986년 데뷔 이래 단 한 번도 인기 스타가 아닌 적이 없었던 김혜수를 여전히 주목한다. 강하고 아름답고 당당하고 엣지있는 김혜수는 참 드물게도 스타와 배우 사이의 외줄 위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떨어지지 않고 자유롭게 놀 줄 안다.


<달콤, 살벌한 연인> 이후 5년 만에 돌아온 손재곤 감독의 <이층의 악당>은 일상성에 깊이 뿌리를 두고 그 사이에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로 사춘기 딸과 함께 살면서 우울증 때문에 밤마다 술을 찾는 연주(김혜수)의 집에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 2층 방에 사기꾼 창인(한석규)이 입주하면서 벌어지는 소동극이다.

손재곤 감독의 전작처럼 <이층의 악당>은 코미디, 범죄, 로맨스라는 융화되지 않는 장르를 자연스럽게 섞어내는 탁월한 재주를 부린 작품이다. 기본 바탕은 코미디이지만, 배우들에게 필요한 것은 코믹한 상황을 끌어내는 자연스러움이다. 때론 과장도 있지만 대부분 군더더기를 걷어낸 연기는 일상생활에서 코믹 감각이 있어 보이지 않는 두 배우를 자연스럽게 극 속으로 녹아들게 만든다.

소재로만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 빈약해 보이는 소재를 기름진 이야기로 꾸려낼 줄 아는 손재곤 감독이 노련한 배우들과 어우러져 하나의 완벽한 상황극을 만들어낸 <이층의 악당>은 박중훈이 웃음과 찡한 감동을 주는 여전한 현역 배우라는 것을 확인시켜준 <내 깡패 같은 애인> 이후, 여전히 우리들의 중견 배우들이 매력적인 주인공일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영화라서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건강 미녀, 드레스 여왕, 그리고…….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외모로 데뷔한 김혜수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하이틴 스타 그룹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채시라, 이상아 등 당시 최고의 인기를 나눠가졌던 동시대 배우들이 인형같이 예쁜 얼굴과 마른 몸매로 남학생들의 우상이 되었다면, 김혜수는 성숙한 외모와 당시로서는 다소 살집이 있어 보이는 몸매와 태권튼녀라는 강인한 이미지까지 더해, 여학생들에게 더욱 인기 있는 하이틴 스타였다.

1986년 <깜보>로 데뷔한 이후 김혜수는 <사모곡>이란 TV 드라마를 통해 폭넓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당시 16세였던 김혜수는 당시 32살인 길용우와 부부가 되어 16세부터 40세까지의 폭 넓은 연기를 선보였다. 16세 소녀가 감당하기에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배역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김혜수의 이미지는 나이 보다 훨씬 더 성숙했다.

아직 소녀여야 할 어린 여자가, 너무 일찍 자라 숙녀가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녀의 의지였다기 보다 그녀의 이미지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캐릭터의 문제였다. 귀엽고 앙증맞아 보일 수 없게 크고 성숙한 그녀의 몸은 그녀의 나이를 앞서는 것이었다. 게다가 다소 살집이 있어 보이는 그녀의 몸을 김혜수는 절대 감추지 않았다. 본래의 입술보다 훨씬 더 크게 그려 섹시해 보이는 입술과 몸의 곡선이 드러나는 타이트한 옷을 즐겨 입는 김혜수는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다소 빈틈없어 보이는 도시 여자의 이미지로 최고의 스타 자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너무 강인한 이미지 때문인지, 그 당당함 때문인지 김혜수는 배우로서의 이미지보다는 CF 스타나 화보 모델의 이미지가 더욱 강했다. 그녀를 특징지을 만한 폭발적인 대표작 없이 김혜수는 계속 성숙해갔다.

작품보다 그녀의 화장법, 그녀의 비키니, 그녀의 옷이 더욱 주목받는 세월 속에 김혜수의 이미지를 폭발시킨 것은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제 드레스였다. 1999년 제20회 청룡영화상 시상식 MC로 나타난 김혜수는 가슴골이 훤히 드러난 드레스를 입고도 단 한 번도 주눅 들어 손으로 가슴을 가린다거나 어색해 하는 법 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노출이 심한 그녀의 몸을 보면서 겸연쩍어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당당한 그녀의 모습은 최고의 화제가 되었다. 지금은 너무 많은 여자 스타들이 파격적인 드레스를 선보이고 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당시 김혜수 만큼 화제를 일으킨 스타는 없었다.

아무도 몸을 드러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그 순간에, 김혜수는 몸으로 말했다. 배우의 몸도 똑부러지는 화법만큼이나 사람들과 소통하는 수단이며, 여배우로서 매력적인 자신의 몸을 대중들이 보아주길, 자신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아주길 바란다며…….1999년 이후 이어지는 청룡영화상은 김혜수의 드레스를 기다리는 재미로 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화제가 되었고 12년 동안 김혜수는 청룡영화상의 MC로, 영화제의 아름다운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했다. 건강 미녀와 드레스 여신은 스타로서의 그녀 이미지를 지속시키는 기폭제였지만, 배우로서의 김혜수는 여전히 목마른 것 같았다. 그녀는 보다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했다. 너무 일찍 노숙한 역할을 전담했던 김혜수는 성숙해질 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조급하고 답답해 보이는 사이, 김혜수는 늘 당당하고 활기차고 강인한 여성의 이미지로만 각인되었다.

지금 돌이켜 봐도 어색했던 TV 드라마 <장희빈>은 대체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거나, 동성을 시기해 모략을 꾸미거나, 패배할 것 같지 않은 김혜수의 이미지와 충돌하면서 미스 캐스팅 논란에 휩싸였다. 이후 김혜수는 그 답답했던 행보에 종지부를 찍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아주 과감한 선택을 했다. 최초로 누드 장면을 연기했던 2004년 <얼굴없는 미녀>로 김혜수는 다시금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과장된 영화의 스타일 속에 역시 과장된 김혜수의 스타일은 역효과를 일으켰다. 무섭고 심각한 순간에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이야말로, 배우에겐 치명적인 모욕이 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김혜수가 꺾였던 것은 아니었다.

2005년에는 모성과 여성 사이의 광기를 열연한 <분홍신>을 통해 새로운 김혜수를 선보였다. 김혜수는 밝고 화려하고 섹시한 모습만 아니라, 어둡고 고독하고 혼란스꾷운 자아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김혜수에게서 그런 혼란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김혜수의 화려함은 늘 주목받고 호들갑을 떨게 하는 소재이지만, 미디어는 역시 호들갑을 떨다가도 그녀가 다소 과하다고 냉정하게 비판한다. 미디어는 그녀에게 더 바라는 것이 없어보였다. 건강 미녀이며 노출 드레스를 즐기는 당당한 여신이면 된다고 얘기한다.


돌이켜 보면, 김혜수는 늘 남자들 틈에 끼어있다. 여자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잔잔한 드라마 보다는 남자들 틈에서 소란을 떨고, 그 틈새에서 부대끼는 것이 더욱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런 대중들에게 먹히는 고정된 이미지는 그대로 가지고 가면서도 김혜수에게는 기회가 되었던 작품은 최동훈 감독의 <타짜>였다.

최동훈은 <범죄의 재구성>에서 염정아를 재발견시킨 그 방법으로 남자들 틈에서 김혜수가 돋보일 수 있는 방법을 독려하고 끌어낸다. <타짜> 속 정마담은 흔히 여성 캐릭터에게 기대하는 섹시한 매력 혹은 여성적인 매력을 넘어선, 여자의 몸을 하고 있지만 남자의 속물적인 욕망을 가진 캐릭터이다. 지금도 회자되는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정마담의 허세는 김혜수를 만나 드디어 폭발한다.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차근차근 <얼굴없는 미녀>와 <분홍신>에서 조금씩 보여주었던 어둡고 그늘진 이미지가 헛된 것이 아님을 <타짜>를 통해 그녀는 증명했다. 김혜수 특유의 과장된 스타일과 강인하면서도 섹시한 여성성이 정마담이라는 캐릭터와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 김혜수는 <타짜>를 성공시킨 1등 공신이 되었고, 그 순간 김혜수는 새로운 대접을 받는 배우가 되었다.

활짝 핀, 하지만 더욱 만개할…….


<타짜> 이후 이어지는 작품들이 큰 인기를 얻어 탄력 받은 그녀의 연기를 탄탄하게 받쳐주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이후 큰 화제작이나 흥행작은 없었다. 하지만 <좋지아니한가>의 찌질한 미경이나, <바람피기 좋은 날>의 당찬 주부, <열한 번째 엄마>의 모성애 넘치는 엄마나 <모던 보이>의 신여성 조난실 역할까지 그녀의 연기변신은 날개를 달고 도약한 것처럼 보인다.

어느새 김혜수는 틀에 갇힌 스타가 아니라, 다양한 연기를 선보일 수 있는 배우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김혜수는 남자들이 꿈꾸는 에스트로겐 넘치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주체’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폭넓은 스펙트럼에 도전했으며, 안정세에 접어든 그녀의 연기는 여전히 빈 틈 없을 정도로 꽉 차 숨차 보이지만, 그 변신은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가끔 김혜수를 보고 있으면 피아노 박자를 맞추는 메트로놈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메트로놈을 틀어놓으면 그 박자에 맞춰 춤도 추고 말도 하고, 그 박자에 맞춰 또각또각 걸을 것 같다. 너무 일찍 연기를 시작했고, 아주 오랫동안 고정된 틀 속에 갇혀 지내다가 이제야 조금 숨을 돌릴 수 있겠구나 바라보면 여전히 그녀는 꼿꼿하게 긴장하고 있다. 몸에 꽉 끼는 정장을 입고 있어야 하는 순간처럼, 꽉 찬 긴장감 때문에 김혜수는 쉽게 보고 넘어갈 수 있는 다른 여자 스타들과 다른 힘을 가진다.

늘 정확한 문장으로 얘기하고 방점까지 찍어내는 이 배우의 언어 사이에는 쉼표가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쉼표 없는 이미지와 스타일이 김혜수, 그 자체인 걸 부정할 필요는 없다. 사춘기를 무던히 넘긴 사람이라면, 언젠가 나이 들어서도 다시 사춘기를 겪어야 하는 법이다. 그녀는 충분히 성숙하지만, 더욱 성숙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이다.

김혜수, 라는 여자에 앞서, 김혜수는 늘 꽃처럼 아름다웠지만 더 활짝 필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배우로 발전하고 있다. 늘 피어있지만, 더욱 활짝 핀 꽃이라…….대체 그 아리송한 느낌이 뭔지 그녀를 통해 확인해 보고 싶어지는 배우, 그녀가 김혜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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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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