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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시즘과 호러가 뒤섞인 영화

<렛미인>, 예정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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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가 요청한다. 인간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뱀파이어가 들어온다. 호명받지 않은 뱀파이어의 온몸이 균열되면서 피가 번진다. 그걸 알고도 들어오기를 감행한 것이다.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만 네가 ‘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즉 어떤 호명에 의해서만 연인이라는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호명을 넘어서 사랑하는 관계를, 이 영화 잔혹하게 보여준다.

<렛 미 인>, 토마스 알프레드손 감독, 2008

이 영화, 악평할 수도 있다. 여러 장르를 잘 섞어 놓았다. 뱀파이어 서사를 축으로 에로티시즘, 멜로, 호러, 슬래셔slasher, 환타지에 학원폭력 서사까지 결합시키니 장르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혼성장르 영화가 된다. 게다가 에로티시즘도 어린아이들에 의해 묘하게 정화되면서 관객의 관음을 되돌려 받는다.


그러나 장르를 섞었을 때 나타나는 과잉의 이미지는 없다. 마치 침묵의 눈雪이 다 덮어버린 듯. 낭자한 피도 눈이 다 덮어버려 화면은 내내 관객을 묵직하게 짓누른다. 극적인 장면일수록 카메라는 최대한 절제하고 냉정하게 다가가며 편집에는 기교가 없다. 어린 배우들의 표정은 무심하여 슬프다. 열두살 ‘오스카르’는 창백하고 파리하며, 뱀파이어 ‘엘리’의 동공은 초점마저 커다랗게 부풀어 사람들의 시간이 넘치게 꽉 차 들어 있는 듯하다.

보통 다른 뱀파이어 영화처럼 분명 알레고리 영화라는 것 알겠는데, 이 영화 왠지 알레고리로 읽기 싫어진다. 예컨대 어떤 부조리한 사랑이나 불가해한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한 뱀파이어와 인간의 설정이 아니라, 정말 그냥 뱀파이어와 인간의 사랑인 것이다. 그리고 그 뱀파이어와 인간이 현실에 ‘있다’고 한 순간만 생각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 사랑의 시작은 이러하다.
Let me in,

뱀파이어가 요청한다. 인간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뱀파이어가 들어온다. 호명받지 않은 뱀파이어의 온몸이 균열되면서 피가 번진다. 그걸 알고도 들어오기를 감행한 것이다.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만 네가 ‘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즉 어떤 호명에 의해서만 연인이라는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호명을 넘어서 사랑하는 관계를, 이 영화 잔혹하게 보여준다.


사랑은, 그러니까, 호명하든 하지 않든, 호명되든 되지 않든,
‘향하는’것이다.

꽃이 되지 못해도, 의미 같은 것은 없어도 발을 들여 놓는 것……. (그러나, 역시 이렇게 말하는 것, 자신없다.)

“엘리, 내 여자친구 될래?”
“오스카르, 나는 소녀가 아니야.”
(……)
“넌 죽은 거니?”

뱀파이어는 죽고 나서 귀환한 유령이 아니다. 뱀파이어는 인간에게 기생해야 하므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과 전혀 관계가 없는 존재이다. 인간이 죽어서 된 존재도 아니고, 인간이 퇴행하거나 진화해서 만들어진 존재도 아니다. 뱀파이어는 인간의 관점으로는 포획되지 않는 비존재인 것이다. 엘리는 그래서 ‘소녀’도 아니고 삼인칭 ‘그녀’도 아니다. 단지 엘리를 아는 오스카르나 호칸에게 ‘너’일 뿐이다.

‘호칸’도 오스카르처럼 열두 살 때 엘리를 만나서 예순이 넘도록 그녀에게 피를 제공해 준 것일까? 사람이면서 산 사람의 피를 받고, 그 다음에 죽이고, 그랬을까? 그럼, 오스카르도 엘리와 함께 호칸처럼 살아가게 될까? 그러다가 호칸이 그랬듯이 “오늘만 오스카르를 만나지 않으면 안 돼? 소원이야.” 그런 말 남길까?


사랑할 수 없는 비존재이기에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서 인간의 삶을 엘리에게 모두 반납한 채 살겠지만, 오스카르도 열두 살을 빠르게 넘기고 서른, 쉰, 예순으로 치달을 것이다. 열두 살을 넘어가지 못하는 엘리는 ‘그 노인’을 연민하겠지만 그는 어느새 더 이상 힘에 부쳐 사람의 피를 가져올 수 없을 것이고, 스스로 엘리에게 거치적거리는 짐짝 같다고 여길 것이다. 그럼, 호칸처럼 자신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알아보게 되면 같이 사는 엘리의 존재도 노출될 테니까) 자기 얼굴에 염산을 붓고 응급실에 입원해 있다가 벽을 타고 온 뱀파이어 엘리에게 아무 말 없이 제 목을 내어주고 창에서 떨어져 죽게 될까?

인간에겐 다행히 ‘죽음’이란 게 있으므로 헤어짐은 어떻게든 ‘완성’되지만
죽음이 없는 뱀파이어는, 게다가 열두 살에 고착되어 있는 뱀파이어는
어떻게 이별을 완수할 수 있을까?


 

그녀는 얼마나 많은 이별을 반복했을까? 엘리, 얼마나 오랫동안 열두 살로 지내며 이별을 차곡차곡 쌓아가야 했을까? 뱀파이어 엘리가 말한다.
“잠깐 동안 내가 되어봐Be me for a while.”
인간은 뱀파이어가, 물론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동안for a while’이 아니다. 뱀파이어에게 흡혈되면 뱀파이어가 ‘영원히’되는 것이다. 엘리는 그러나 뱀파이어를 만들지 않는다. 뱀파이어를 만들어 서로 기대어 살지 않는다. 엘리는 직접 흡혈하지 않고 한 인간을 사랑하고 그 인간에게 사랑받음으로써, 그 (비)연인이 인간의 방식으로 산 자의 피를 가져오게 한다. 불가피하게 자신이 하게 된 경우에도 흡혈 후 인간을 죽임으로써 ‘혼자’남는다. 흡혈 중 한 남자에게 걷어차여 결국 여자의 심장을 멈추게 할 수 없었을 때 그 반인半人의 결말은 차마 비참하다는 것을, 오래오래 열두 살이었던 엘리는 아는 것이다. 그래서 오스카르에게 “잠깐만 내가 되어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함께이기 위한 ‘잠깐’인 것이다.

죽음조차 죽지 않는 엘리에게 죽음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스칠 즈음, 화면에는 암전처럼 검은빛이 들어차고 그 위에 점점이 박히는 유리가시 같은 눈. 그리고 기차. 오스카르. 오스카르 앞에 있는 큰 가방. 오스카르는 그 가방에 손가락 끝으로 모스부호를 보낸다. 가방 속에서 답변이 온다. 그들은 그렇게 떠난다. 예정되어 있는 끝으로 함께 간다.

***

사랑을 시작할 때 이미 끝은 닫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뱀파이어에 의해 필연적으로 버려질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자발적으로 버려짐으로써 이별과 죽음을 동시에 완수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을 시작할 때 이미 끝은 닫혀 있습니다. 끝을 안다고 그 끝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끝을 알기 때문에 슬픔 속에서 그 끝을 완수하는 과정을 밟아갑니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의 사랑이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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