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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무의식에 숨은 정체성의 결 -‘우리’를 찢고 탈출하라

수도권 신도시에 사는 한 30대 주부의 체험을 옮겨본다. 그녀는 7~8명 정도가 모이는 아파트의 주부모임에 나갔다가 기분이 상했다. 그 모임에서 왕언니로 통하는 이가 제멋대로 쓴 ‘우리’라는 주어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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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석은 왜 ‘우리’에 이를 갈았나
눈치 없는 말실수에서 무색무취함에 활용되기까지 조심해야 할 그 주어

우리는 ‘우리는’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수도권 신도시에 사는 한 30대 주부의 체험을 옮겨본다. 그녀는 7~8명 정도가 모이는 아파트의 주부모임에 나갔다가 기분이 상했다. 그 모임에서 왕언니로 통하는 이가 제멋대로 쓴 ‘우리’라는 주어 탓이었다. “OO에 갔더니 전철역부터 물이 다르더라고. 우리하곤 정말 달라.” OO는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또 다른 수도권 신도시였다. 우리하곤 정말 다르다고? 우리? 결과적으로, 자신을 넘어 그곳에 모인 참석자 모두를 비하하는 화법이었다. ‘문제의 주부’는 문제의 발언을 계속했다. (모인 이 중 한 명을 가리키며) “어쩜 이렇게 날씬해? 자기는 운동 안 해도 되겠다. 우리는 죽어라 운동해도 요 모양인데…….” 나머지 주부들의 얼굴이 일순 붉어졌다는……ㅎㅎ.

한국인 무의식에 숨은 정체성의 결

중딩 준석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1학년이지만 나름 어엿한 중학생이라 뽐냈는데, 그 자부심을 여지없이 짓밟은 사건이다. 학원에서 만난 초딩 6학년 여학생이 ‘우리’라는 말로 싸잡아 같은 편 취급했기 때문이다. 상대의 소속을 모르고 얼떨결에 뱉은 소리였다. 현장에선 그냥 넘어갔지만, 준석은 집에 돌아와 그 초딩녀에게 이를 갈았다.

‘우리’에 관한 코믹 버전 몇 가지를 소개했다. 악의에 기인했다기보다는 눈치 없는 말실수에 해당한다. 오랫동안 입에 붙은 언어습관도 작용했다. 오늘은 그 ‘우리’의 뿌리에 관해 생각해본다.

앞의 40대 주부처럼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 태어난 이들은 ‘우리’가 익숙하다.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우선하던 때였다. 1968년 12월 제정된 국민교육헌장만 봐도 ‘우리’ 천지가 아니던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그래서인가. 엄마도 우리엄마, 집도 우리집, 학교도 우리학교, 나라도 우리나라다.

‘우리’는 한국인들의 무의식 속에 숨은 어떤 정체성의 결을 보여준다. 개별성보다는 소속을 중요시하는 문화. 부정적으로 따지면 ‘집단주의’다. 혈연, 지연, 학연 또는 기타 권위 있는 ‘우리’의 우산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개인보다는 ‘우리’에 묻어가고 싶어 한다.

글을 봐도 그렇다. ‘우리는’이라는 주어로 시작하는 글이 쓰기 편하다.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독자에게 욕먹을 확률이 적다. 보편타당한 규범이나 가치를 앞세워 적당한 논리로 눙치면 된다. 대의나 정도를 들먹이며 공자말씀 할 수 있다. “가만있으면 중간은 간다”가 아니라 “적당히 ‘우리’로 때우면 중간은 간다.” 결국 그러한 글엔 향기가 없다. 특색도 없다. 신문 사설이나 성명서가 단적인 예다. 나만의 경험, 나만의 취향, 나만의 입장이 자리 잡을 틈은 없다.

나만의 경험, 나만의 취향, 나만의 입장은?

유럽 문학에서 나(I)라는 1인칭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는 18세기 초라고 한다. 공동체의 집단생활에서 개인이 점차 분리되는 현실을 반영해서였다. 언론 분야에 종사한 경험으로 밝히자면, 대한민국 미디어 글쓰기에서 ‘나’가 본격 등장한 때는 21세기 초였다. 한국의 글쓰기 문화에선 아직도 ‘나’보다는 ‘우리’가 지배자다.

어떤 주제로든 글을 쓸 때 ‘우리는’을 자제하자. 무색무취한 결과물을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람들에게 읽히는, 색깔 있는 글쓰기를 바란다면 ‘나’라는 주어부터 떠올리자. 주관화의 함정은 경계하되…….

***

흐리멍텅한 우리, 위선적인 우리

옛날엔 ‘내 아빠’였다.

‘내 집’이었고 ‘내 학교’였으며 ‘내 선생님’이었다. 준석과 은서는, 말을 익힐 무렵은 물론 유치원 시절에도 ‘나’를 앞세워 말했다. ‘우리 아빠’나 ‘우리 학교’같은 화법을 쓰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부터 말버릇이 달라졌다. ‘우리’를 강조하는 한국사회의 문화에 동화된 셈이다.

이번 글의 주제는 ‘우리’였으나 아이들에게는 같은 종류의 글을 요구하지 않았다. 맨 처음 ‘나와 우리’에 관해 글을 써보라는 제안을 했지만 매몰찬 거부를 당했을 뿐이다. “무슨 말을 쓰라고요. 어려워서 못 쓰겠어요.” 대신 자유주제를 줬다. 준석은 ‘불법 다운로드’에 관해 일침을 가했다.

불법다운로드? 우리는 양심을 지키자

어디서나 DMB와 iPOD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DMB나 아이팟을 옆에서 같이 보는 들러리들은 그 주인이 부러울 따름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때 이걸 꼭 묻는다. ‘뭐 봐?’ 그 때, 내 친구의 경우 이렇게 대답하였다. ‘토이 스토리 3 보는데.’ 그때가 7월 말이었다. 그 몇일 뒤 원주에 있는 영화관에 갔다. <토이스토리3> 포스터가 보이는데, 하단 포스터에 ‘8월5일 대개봉’ 이라 써있는 것이 아닌가? 친구가 영화를 다운받은 건 영화 개봉을 앞둔 지 일주일이 넘은 때였을 텐데? 그래서 부모님께 여쭈었다. ‘근데요, 영화가 개봉하기 전 영화 다운이 가능해요?’ ‘아니?!’ 부모님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하긴, 영화 다운을 어찌하는지도 모르는 부모님께 물어봐야 그게 그거지 뭐. 그러면, 불법 다운?

사실, 내 개인적인 관점이지만, ‘불법 다운’이란 건 영화계에서나 인정하고 쓰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왜냐고? 우리는 ‘오직 관객’ 이다. 영화계에서 돈을 버리는(?) 것은 관객이며, 돈을 버는 것은 감독이다. 또한 반대 방향으로 관객은 영화표에 돈 쓰는 일이 필수가 아니며, 그것을 장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감독에겐 그 저작권에서 우러나오는 ‘돈’이란 것이 생계에는 필수이며, 무조건 장려한다. 일단 그래도, 이 글에서는 감독의 입장보다는 우리의 입장을 주시해야 한다. 지금의 스포트라이트는 관객, 즉 우리니까.

사람은 누구나 돈 쓰는 일을 싫어한다. 특히 필수가 아닌 일은 더더욱, 그래서 사람들은 같은 물건을 살 때 더 ‘싼’ 값의 물건을 찾게 된다. 그래서인지 영화계에서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다, 바로 ‘인간의 본능’으로 인하여 영화계에서는 ‘불법 다운로드’라는 것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지금은 영화표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관객’들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불법 다운’은 ‘불법’ 이 아닌 다운로드가 되어 버렸다. 보아라! 누군가 ‘나는 오늘 불법 다운을 했다!’ 라고 하여서 경찰에 신고하는가? 이제 불법 다운로드는 우리의 세계에서 불법이 아닌 ‘보통’ 다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성급’ 그리고 ‘돈’ 이라는 것 때문에 ‘불법 다운’ 이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 사람들의 특징이 위의 두 가지와 관계해 있지 않은가? 다른 말로 바꾸자면 ‘빨리 빨리’ 그리고 ‘물질 숭배’ 이고, 그래서인지 이해는 갈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관과 집에서 보는 영화는 그 ‘맛’과 ‘즐거움’ 이 천차만별의 차이를 내놓지 않던가? 거대한 스크린과 작은 스크린, 나쵸와 팝콘, 그리고 라면, 볼륨의 차이, 과연 영화관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불법 다운 따위에 비교나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당신들이 하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영화관을 추천케 될 것이다. 물론 본능에 의해 조조 할인을 추천하겠지, 어쨌든, 우리는, 불법 다운보다는, 영화관을 사랑하는 양심의 인간이 되자.


고준석이 본 ‘불법 다운로드’

‘나’라고 쓰면 이기적이라고?

하나만 보면 열을 안다. 마지막 문장 하나만 보면 열을 안다. “어쨌든, 우리는, 불법 다운보다는 영화관을 사랑하는 양심의 인간이 되자.” ‘우리는’이 첨가된 이 계몽형 문장 하나만으로도, 위 준석의 글은 혹평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상투적이고 뻔한 결론이라서다. 글의 내용이나 논리전개 형식에서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곤란하다. 작은 컴퓨터와 거대 스크린의 비교 따위 발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다만, 전혀 다른 차원에서 준석이 대견하다. ‘우리’에 관한 그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는데, 준석은 준석은 6번이나 ‘우리’라는 말을 사용해 아빠가 쓰는 글의 주제에 정확히 캺합해주었다. “나는 양심의 인간이 되자”고 해도 될 텐데 왜 “우리는 양심의 인간이 되자”고 했을까. 맨 먼저 등장하는 “그런데 우리는 그 때 이걸 꼭 묻는다”는 문장도 그렇다. 왜 기어코 “우리”라고 했을까. 준석이는 답했다. “다들 그렇게 묻거든요?” 나는 되물었다. “다들? 누구? 네 친구? 아님 선생님? 아님 아빠도?” 준석은 한풀 꺾인 목소리로 “저나 친구요”라고 말한다. 그럼 “친구들은 꼭 묻는다”라거나 낡나는 이렇게 묻뾽다”라고 쓰면 되잖아. 준석은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 “‘나’라고 쓰면 이기적이잖아요.” 걱정도 팔자다. “내가 다 가지겠다”는 식의 글도 아닌데 이기적이긴 뭐가 이기적이니?

준석은 “이 글에서는 감독의 입장보다는 우리의 입장을 주시해야 한다”고도 했다. 여기서 ‘우리’란 무엇이냐고 준석에게 다시 물었다. 한숨이 돌아온다. “그거 하나하나 다 따지면 글을 어떻게 써요? 휴유~.” 괜히 시비 거는 게 아니다. 정확하게 쓰자는 말이다. “관객의 입장을 주시해야 한다”고 쓰면 되지 뭐. 왜 굳이 ‘우리’라는 포괄적 일인칭을 쓴단 말인가. 준석이 쓴 6개의 ‘우리’ 중에선 고개를 끄덕여줄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다음은 은서의 글이다. 핸드폰에 관한 단상이다.

스마트폰 만지지 마요, 우리가 걱정해요

우리 아빠는 핸드폰을 올해 초에 바꿨다. 그것도 요즘 유명한 아이폰으로 바꾸셨다. 아이폰은 엄청 유명하다. 아이폰은 터치폰이고,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은 모두 다 할 수 있다. 또한 메뉴를 늘릴 수도 있다. 원래 그냥 슬라이드 핸드폰이나 폴더 핸드폰은 대부분 메뉴가 9개이다. 그걸로 끝이다. 절대 늘릴 수 없다. 메뉴를 더 만들 수 있는 아이폰이 부러울 뿐이다.

아빠는 요즘 아이폰을 너무 많이 만지신다.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필요없는 일에도 아이폰을 만지신다.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이다. 예전에 야구 게임이 있을 때에는 엄~청나게 많이 만지셨다. 필요 없는 게임에도 말이다. 나도 게임이 많이 있어도 그렇게 많이 하지는 않는다. 일주일에 몇 번 하기만 한다. 아, 참 핸드폰을 많이 만지면 전자파가 우리 몸에 들어와서 우리가 암에 걸릴 수도 있다. 이 내용은 엄마와 뉴스에게서 들었다.

내가 그냥 생각하는 점인데, 아빠는 우리보다도 더 암에 걸릴 가능성이 많은 것 같다. 아니, 아예 아이폰을 만지는 사람들이 말이다. 아이폰은 중독성이 그냥 핸드폰보다 몇 배나 더 많아서 암에 걸릴 가능성이 더 많다고 뉴스로 들었다. 만약... 아빠가 암에 걸려서... 어디 놀러도 못 가고 할머니 집에도 못 가고, 그 등등의 일이 벌어지면... 으~~~ 그건 너무나도 싫다. 정말... 끔찍하다. 그래서 나와 엄마는 자주 아빠에게 핸드폰을 만지는 것을 자제하라고 하지만, 아빠는 우리 말을 듣지도 않는다. 충고를 안 받아들인다. 내가 아빠에게 바라는 점은, 아빠가 핸드폰을 만지는 것을 좀 자제하는 점이다. 충고를 받아들이길 바란다.

아, 참 그리고 핸드폰을 사용할 때도 예의가 있다. 공공장소에서 핸드폰을 매너모드로 해 놓지 않고서 큰 소리로 키워놓고 핸드폰 게임을 한다던지, 공공장소에서 전화를 할 때 큰 소리로 통화를 한다던지, 핸드폰으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서 사람들이 나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던지. 그런 점이 근처에 있는 사람들께 실례이다. 이런 일을 하면 근처의 사람들에게 욕을 들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큰 소리가 들리면 자기도 큰 소리로 말하고 싶은데 작은 목소리로 하는 자신이 억울하고 또, 남에게 피해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욕을 듣기 싫다면 주의를 해야 한다. 그러니깐, 한 마디로 핸드폰을 매너모드로 해 놓고서 게임을 하기! 랑 공공장소에서 전화를 할 때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하기!


고은서가 걱정하는 아빠의 미래.

고준석이 생각하는 ‘핸드폰 깡패’.

‘우리’는 따뜻한 울림을 주기도 한다

준석과 은서는 실제 핸드폰을 많이 쓰지는 않는다.
처음에 쓴 글은 자신이 핸드폰 기종과 기능 설명이었다. 덧붙여 아이폰을 자주 만지는 아빠를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횡설수설하는 느낌이 있어 ‘핸드폰에 관한 두 가지 생각’으로 요약하도록 시켰다.

은서의 ‘우리’는 총 5개다. 처음부터 ‘우리 아빠’다. 그냥 ‘아빠’라고 하면 안 되니? 아빠를 아빠라고 부를 ‘우리’는 준석과 은서뿐이잖아. 뒤에 오는 ‘우리’는 또 조금 다르다. 가령 “아빠는 우리보다도 더 암에 걸릴 가능성이 많은 것 같다”에서의 ‘우리’는 가족이다. 은서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 아빠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 구성원 말이다. 그럼 ‘나머지 가족’이라고 쓰면 되잖아? 사람들은 ‘사람’이라고 써도 될 곳에 곧잘 ‘우리’를 집어넣곤 한다. ‘대중’이라고 해도 되는데, ‘시청자’나 ‘관객’ 또는 ‘독자’라고 해도 되는데 ‘우리’의 탈을 뒤집어씌우려고 한다. 은서야, 너는 그런 버릇을 빨리 고치기 바란다.

물론 ‘우리’의 미덕도 만만치 않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나’를 넘어서는 공동체적 ‘우리’의 가치는 소중하다. <그들도 우리처럼>이라는 영화 제목에서 보듯 ‘우리’라는 단어가 따뜻한 울림을 주는 경우도 많다. 적절하게 잘 사용하면 따뜻한 공공선의 정신을 잘 되새길 수 있다. 이 글은 불필요하고 부정적인 ‘우리’를 경계하자는 의미다. 종합적으로 다음 네 가지를 경계했으면 좋겠다.

1. ‘우리’는 때로 실례다.
맨 앞 에피소드에서 밝힌 것처럼 함부로 남을 ‘우리’에 편입시키면 인간관계 상하므로 우리모두 ‘우리’를 조심하자. 어쩌면 ‘대화의 기술’에서 중요한 사항이다.

2. ‘우리’는 때로 흐리멍텅하다
콕 짚어서 ‘너’ 아니면 ‘나’ 아니면 ‘그’라고 하면 된다. 흐리멍텅하게 ‘우리’라는 우리에 가두지 말자. 잘못하면 ‘돼지우리’된다.

3. ‘우리’는 때로 위선이다.
‘우리’엔 공동체 정신이 스며있지만 모호하게 쓰면 오히려 배타적인 무기가 된다. ‘우리’에 속하지 않은 ‘남’(타자)을 괴롭히기 위해 ‘우리’를 강조할 때가 있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민족주의나 인종주의에서의 ‘우리’란 참으로 위험하다.

4. ‘우리’는 때로 흑심이다.
국가는 대중들의 결속을 의도적으로 조장하려 할 때 ‘우리’를 무차별 남발한다. 가령 ‘우리 국민은’이라는 한마디는 그 속에 담긴 수백, 수천, 수만 가지의 다양성과 차이를 하나로 단순화시킨다.

이제 결론이다. 지금까지 실컷 씹은 ‘우리’를 달래는 차원에서 멋있게 한 번 써주고 끝내야겠다. ‘나’와 ‘우리’의 동시캐스팅!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나는 글 쓰다가 스트레스로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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