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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도시에서 멘토를 만나는 행운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나는 피로하다 고로 도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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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인들은 여가 또한 아무렇게나 소비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도시인들은 기를 쓰고 여유로운 휴가를 얻기 위해 고속도로의 정체를 뚫고 간다.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도시인들에게 피로는 도시의 삶, 혹은 자본주의가 만들어준 형벌일 것이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소피아 코폴라 감독, 2003

도시를 부유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바꾸어가는 새로운 인류, 도시유목민. 도시유목민은 생산하지만 그것은 소모와 탕진을 위해서이며, 이 소모와 탕진을 생산으로 인한 피로의 회복이라는 그럴듯한 상투구로 해석한다. 그러나 소모와 탕진은 오히려 생산-피로의 가중치가 되어 피로는 결국 도시인들의 삶 자체가 되어버린다. “나는 피로하다, 고로 도시인이다”라는 명제는 어떤가.

도시인들은 여가 또한 아무렇게나 소비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도시인들은 기를 쓰고 여유로운 휴가를 얻기 위해 고속도로의 정체를 뚫고 간다.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도시인들에게 피로는 도시의 삶, 혹은 자본주의가 만들어준 형벌일 것이다. 탈脫도시하였다고 해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도 아니고 낯선 자아정체성을 만나는 것도 아니다. 그곳은 또 하나의 의사도시擬寫都市이자, 도시의 연장일 뿐이다. 도시는 특정 지역이 아니라 하나의 속성이며 도시인은 특정 지역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증상인 것이다.

도쿄. 입체적인 공룡의 이미지가 평면의 빌딩 벽을 가로지르는
하이퍼리얼리티의 도시.

 

과부하된 이미지 사이로 비닐우산을 쓴 여자가 지나간다. ‘샬럿(스칼릿 조핸슨)’이다. 한눈에 봐도 그녀, 피로하다. 이 피로는 무료와 무기력의 피로이다. 그녀는 다만 사진작가인 남편을 따라 도쿄에 와서 ‘정착’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호텔에서 ‘숙박’하고 있다. 글을 쓰고 싶었으나 만성화된 우울은 ‘쓰다’라는 동작을 가동시키지 않는다. 남편은 연신 ‘사랑한다’는 말을 흘리지만, 그것은 습관적인 기표의 남용일 뿐이다.

도시의밤. 초로初老의남자가지나간다. ‘밥해리스(빌머레이)’이다. 그는낮 동안의 광고 촬영으로 지쳐 있다. 광고 프로듀서가 길게 설명한 것을 통역자가 한마디 영어로 자신에게 전하는 것에 내내 어리둥절하면서 보낸 하루였다. 메이크업도 지운 상태이고 옷은 구겨져 있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곳에 너무나 멋진 ‘자신’의 이미지가 있다. 광고 전광판, 거대한 사이즈로 상업화된 우울의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 낯설다. 미국에 있는 자신의 아내와 통화해보지만 아내는 집을 치장할 인테리어 타일을 고르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 둘이 호텔 카페에서 마주친다. 일어가 낭자한 도시에 영어가 영어를 알아보았는데, 단지 언어가 서로 통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일어와 영어가 서로 번역 불통lost in translation이다가, 드디어 번역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상태만은 아닌 듯하다.

영화의 포스터에 나온 대로 누구나 발견되기를 원하는 것인데Everyone want to be found, 이 둘은 상대에게 노출되었고,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자면 호명이 되어 주체가 된 것이다.

밥은 샬럿에게 오랫동안 주저했던 글쓰기를 하라고 조언하고, 샬럿은 밥에게 갖고 싶었지만 항상 나이를 의식해서 사지 못했던 스포츠카를 사라고 말한다.


그들의 잠 또한 낮은 대화로 채워진다. 샬럿은 적체되었던 자신의 언어들을 줄줄이 뽑아낸다. 밥은 오래오래 그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리고 나직한 응대가 방점처럼 찍히고 그들은 잠 속으로 들어간다. 밥은 다친 샬럿의 발목을 잡는다. 태아처럼 웅크린 샬럿과 그녀의 발목을 따뜻하게 감싸 쥐고 있는 밥의 손이 화면의 중심에‘작게’잡힌다.

하지만 도쿄는 이들에게
지나치는 공간일 뿐이다.

밥은 광고 촬영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이제 헤어지는 것이다. 밥은 샬럿에게 무언가를 말한다. 영화에서 그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마치 <화양연화>에서 ‘차우’가 앙코르와트 사원 벽에 구멍을 내고 그 속에 언어를 넣어두는 것과 유사하다(실제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는 자리에서 왕가위 감독에게 헌사를 바치기도 하였다).

“그래, 우리 모월 모일 모시에 만나자”라는 식의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귓속말을 하는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샬럿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는 것을 보면, 그 짧은 듯 무궁한 아이온aion의 시간 속에서 샬럿은 체념과 절제와 비약과 슬픔과 확신과 치유와 회한과 미래를 보게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그러기에, 나는 이 영화를 사랑의 코드로 읽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멘토의 코드인데, 그것도 멘토-멘티의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멘토가 되고 멘티가 되는 관계인 것이다. 이 영화는 그래서, 생生에서, 혹은 낯선 도시에서 멘토를 만나고 또 자신이 멘토가 되는 행운을 얻은 희귀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


그러나 현실에서 멘토를 만나거나,
외로운 자아가 낯선 타자에게서 발견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 당신은 당신을 그저 방치해도 좋을 것입니다.


당신을 낯선 도시 어디쯤에 가져다 놓아도 되겠지요. 누군가 놓고 간 짐처럼 당신은 그곳에서 묘하게 섞여들 것입니다. 삶은 언제나 채워지지 않아서 당신이 닫아두지만 않는다면 우연은 언제나 당신을 방문할 것입니다. 그 우연 중 몇 개는 나쁘지 않겠지요. 그러나 기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대와 무관한 지금도, 아무 일이 없다는 어떤 일로 채워지고 있는 순간이니까요.

전류가 흐르는 발열체처럼 온몸이 아파오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당신, 조금 위험한 물질이 된 것처럼 약간은 뿌듯해지지 않았던가요. 방해받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도심의 물결에 휩쓸리며 세상과 수직의 각을 세우며 걷는 당신에게 설레는 일이 아니던가요. 이런 질문, 단지 위무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당신을 일시적으로 봉합하기 위한 그럴듯한 미사여구도 아닙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의 누선淚腺이 미소微少하게 떨리는 걸 보니, 저는 혹 자기최면을 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오래오래 도시의 어딘가에 저를 방치할 생각입니다. ‘나’라는 생각도 없이, 무리수 속에 끼워 넣고 길마저 잃게 내버려둘 터인데, 그럼 미몽에서 깨어나 새로운 템포로 시간과 나란히 혹은 어긋나면서 살아가게 되겠지요. 그때 저는 정말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녀도 저를 알아보지 못하겠지요. 저 또한 저를 몰라서 당황하겠지만, 그 당황함이 인식되는 순간 기쁘겠지요. 또 그 전에, 무엇보다 그 심밀深密한 슬픔 속에서 몇 편의 글조차 남길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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