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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리야, 접속사에 중독된 날라리야

자, 이제 오늘의 결론을 내 맘대로 요약해본다. 접속사와 자주 접속하면 불량 글쓰기. 날라리를 싫어하는 준석아. 접속사와 친하게 지내면 너도 ‘날라리’ 필자가 되는 거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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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와 ‘그리고’를 척결합시다
매끄럽게 문장 연결시켜준다지만 남발할수록 매끄럽지 못한 글을 만드네

“난 과자 먹는 날이 따로 있다. □□□1) 과자 먹는 날에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한다. 아이스크림과 과자는 맛있다. □□□2) 몸에 좋지는 않다. □□□3) 일주일에 2번씩은 꼭 과자, 아니면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4) 어쩔 때는 날씨가 좋은 날이 과자를 먹는 날이다. □□□5) 그런 날일 때마다 나는 고민한다. 과자를 먹을까? 아이스크림을 먹을까?”

꽃밭의 잡초이자 볼펜 똥 같은 존재

초딩 은서의 글이다. 네모 칸엔 어떤 접속사가 들어가야 적당할까. 이 퀴즈는 어느 포털 지식검색 사이트에서 본 질문 내용을 그대로 흉내 낸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이 문장에는 어떤 접속사를 쓰나요? :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그 어떤 것보다도 맨날 같은 음식만 먹고 사는 건 싫었기 때문이다. □□□ 아버지는 잠시 방으로 들어가시더니 굳은 표정으로 오천원 한 장을 들고 나오셨다.” 바로 밑엔 누군가의 답변이 달려 있었다. 상황을 시간순으로 살펴볼 때 ‘그러자’가 가장 자연스럽다고 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떠신가. 맨 위의 글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하지만? 그런데? 그리고? 그래도? 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나의 답은 단 하나다. “다 필요 없어!” 위의 두 예문 모두 접속사가 없다고 생각하고 읽어보시라. 부자연스러운가?

은서는 맨 위의 글에서 접속사를 남용했다. 네모 칸별로 1)하지만, 2)하지만, 3)그래도, 4)그리고, 5)그래서 순이다. 중딩 준석도 글을 쓸 때 비슷한 빈도로 접속사를 남발한다. 한 단락에 네댓 개씩 사용하기도 한다. 준석에게 “왜 꼭 그래야 하냐”고 물었다. 대답이 퉁명스럽다. “필요하니까 쓰는 거죠. 연결을 시켜야 하잖아요.” 이 말을 듣자마자 즉각 ‘오더’를 내렸다. “다음 번 글은 반드시 접속사를 하나도 넣지 말고 써봐.” 준석은 대뜸 더 까칠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그런 걸 글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당연히,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이나 잡지, 소설을 읽을 때 실험해보라.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을 매끄럽게 ‘접속’시켜주기 위해 쓰이는 ‘그리고’ ‘그러나’ ‘그런데’ 따위들이 꼭 필요한지. 그것들을 빼고 다시 읽어보라.

꽃밭엔 잡초도 있다. 잡초가 많으면 당연히 꽃밭의 품위는 떨어진다. 나는 접속사가 글밭을 지저분하게 하는 잡초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르게 비유한다면 공책에 필기할 때 묻는 볼펜 똥 같은 것이다. 잡초를 뽑아주자. 볼펜 똥을 지우자.

어떤 충동…… 안 쓰면 혹시 불안하니?

1년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읽었다. 작품성에 대한 찬반논쟁이 있었지만, 전혀 엉뚱한 차원에서 독후감을 말하고 싶다. “참 ‘그리고’가 많죠~잉.” 그 다음에 읽었던 주원규의 소설 『열외인종 잔혹사』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을 하고 싶다. “엄청나게 ‘하지만’이 등장하지요~잉.” 『1Q84』『열외인종 잔혹사』 두 소설 곳곳의 잡초를 뽑고 볼펜 똥을 지워주고 싶었다. 2/3 정도 치우면 더 깔끔해질 것 같았다.

‘접속사’란 어떤 충동이다. 글을 쓸 때마다 나 역시 그 충동에 시달린다. 여기도 써야 하고, 저기도 써야 할 것 같다. 안 쓰면 괜히 의미가 불명확해지지는 않을까 불안해진다. 정갈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 충동을 억제하는 습관을 기르는 게 바람직하다.

접속사는 글을 구차하고 만들고 늘어지게도 한다. 명확한 사실이나 근거를 제시할 수 없을 때, 말을 빙빙 돌려야 할 때 찾게 되는 게 바로 접속사다. 요지가 분명하면 ‘접속사’에 의존할 일이 별로 없다.

***

접속사 노? 써놓고 보니 여섯 개!

나는 접속사에 특별한 감정이 없다. 접속사 박멸주의자도 아니다. 그저 적절히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언젠가 나의 글에 접속사가 불필요하게 남발된다는 사실을 우연히 깨달았다. 그 뒤로는 퇴고 과정에서 꼭 접속사가 몇 개인지 세보는 습관까지 생겼다. 신문과 잡지에서 데스크 역할을 할 때도 후배나 외부 필자의 원고에서 접속사부터 걸러냈다.

준석과 은서의 글에서도 가장 먼저 거슬린 게 접속사였다. ‘그러나’ ‘하지만’ ‘그런데’ ‘그리고’는 아이들 문장의 절대적 존재처럼 보였다. 완전 접속사 중독이었다. 앞에서도 밝힌 것처럼, 이번엔 접속사를 사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글 한 편씩을 쓰도록 했다. 처음에는 둘 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며 반항했지만, 밀어붙였다. 준석은 ‘날라리’에 관해, 은서는 ‘모르는 사람이 끌고 갈 때는’이라는 제목으로 납치대응수칙에 관해 썼다. 먼저 준석의 글을 보자.

이 땅의 날라리들에게 고함

우리는 흔히 놀기만 하고 패거리로 몰려다니는 아이들을 날라리라고 한다.

나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날라리란 그냥 한 마디로 재수가 없는 아이들이다. 그리고 나는 날라리란 것 자체가 없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잘 노는 아이들을 날라리라 하나, 그렇지 않다. 날라리는 욕도 하고 삥도 뜯고, 아주 위험하게 논다. 가령 책상을 바닥으로 아는지 밟고 다니기 일쑤다.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다. 보통 아이들은 날라리를 좋아 하지 않는다.

날라리들의 특징 : 손에서 핸드폰을 뗄 줄을 모른다. 체력이 좋다. 활발하다. 인맥이 넓다. 패션이 독특하다.

날라리들은 아주 통제 불능이다. 핸드폰, 수업 시간이나, 학원 시간이나, 언제나 손에서 핸드폰을 떼어 놓을 수가 없는 그들은 항상 문자를 보내고 있다. 이런 걸 내가 아는 이유는 이런 장면을 많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싫어하는 날라리들을 옆에 둘이나 앉혀 놓고 내가 옆을 두리번거리니 그 날라리들이 문자질을 아주 열심히 하고 있더만, 학원 수업 보다 훨씬 더 집중해서 말이다. 날라리들은 선생님께 걸려도 몇 번이고 문자질을 반복한다. 그들은 문자질 통제 불능이다.

날라리들은 체력이 좋다. 놀기만 하니, 그것도 뛰어 놀기만 하니 그런 것인가? 하긴, 운동 신경이나 체력은 날라리들의 겉표시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

이건 뭐 당연히 알 것이지만, 날라리들은 대부분 전부 다 욕을 한다. 이런 거다. 욕을 잘하는 날라리는 좀 날라리 중에서도 리더십이 있다. 그 날라리는 보통 아이를 끌어다가 날라리로 만든다. 보통 아이는 날라리가 되어 그 리더 날라리의 욕을 수없이 듣는다. 보통 아이도 욕을 따라한다.

날라리들 중에는 소심한 아이가 한 명도 거의 한 명도 존재 하지 않는다. 전부 다 활발한 아이들이다. 그것도 지나치게 활발한 놈들. 내 생일에는 ‘저 생일이에요! 좋겠죠? 저 뭐 선물 주세요~!’ ‘저 영어 잘하는데~ 나 영어 열심히 하는데’ 이 중에서 진짜 날라리들이 이 말을 한다고 이 날라리들이 영어를 열심히 한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한마디로 날라리들은 나댄다. 내가 날라리들을 재수 없게 여기는 이유 중 하나.

날라리들은 인맥이 넓다. 아주 아주. 먼 학교라도, 날라리들은 관계를 맺는다. 초등학교 날라리가 원래 같은 초딩 날라리를 중학교에 오면서 다른 초등학교서 온 날라리들에게 초등 학교 친구 날라리를 소개 시키면서 날라리들의 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이다. 조금 복잡한가? 그러면 이렇게 설명해 본다. 두 날라리가 있는데, 두 날라리는 친구 날라리가 한 명씩 있다. 그런데 친구 날라리 두 명은 서로 모른다. 그러다가 두 날라리가 서로 전부 한 명씩 날라리를 소개시킨다. 그러면서 날라리는 모인다. 그 중에서 날라리들 중 좀 세거나 한 아이들을 바로 ‘일진’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즘은 날라리 집단을 ‘일진회’라고 하던가?

날라리들은 패션이 독특하다. 뭐, 다들 알겠지만 좋은 패션은 아니다. 남자는 분홍 슬리퍼나, 좀 짧은 바지를 입는다. 그리고 대부분 머리를 반삭 하거나 중딩답지 않게 머리를 기르기도 한다. 여자는 아주 짧은 바지를 입거나 바지를 말아올린다. 정말 여자로서, 중딩으로서 재수없는 점은 벌써부터 화장하고 립스틱 바르고 한다는 것이다. 날라리들 때문에 학교 규정이 생긴 것이다. 화장을 하지 말라는 학교 규정, 날라리들 때문에 생긴 것들 아닌가?

날라리들이 날라리가 되는 시기나 사유 : 날라리들의 전도(?) 사춘기, 충격.

아까 전에도 말했지만 날라리가 보통 아이를 날라리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또는 사춘기 역시 날라리가 될 수 있는 사유가 될 수 있다. 내가 이런 경우를 아는 이유는 사춘기 때문에 날라리가 된 S양이 같은 수학 반 이기 때문이다. S양은 초등학교 때 평균 99점 정도 맞고 수학 경시 대회 1등, 영재원에다가 UCC 상, 그 S양은 어느 샌가 매일 체육복 바지를 말아올리며 자신을 날라리라 표시한 날라리가 되어 버렸다. 그 이유를 조사해 보니 그 S양이 사춘기라더라. 그렇다. 혹, 그 S양의 친구가 전교 1등을 하여 S양이 충격을 먹어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날라리가 되는 시기 역시 따로 있다. 날라리가 되는 시기는 빠르게는 4학년 쯤, 그리고 대부분은 중1때 날라리가 되고는 한다. 내 교회 4학년 친구도 예전에는 날라리가 아니었는데 사춘기가 와서인지 지금은 날라리가 되어 있다.

날라리들에게 하고 싶은 말 한마디로 딱 잘라서 : 사회에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되지 말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이라도 해라.

내가 이들을 날라리에서 착한 사람으로 바꾸어 줄 수도 없는 법이지만, 내가 그들에게 평을 전하자면, 불쌍하다 이다. 너무 불쌍해 죽겠다. 특히 나쁜 원조 날라리로부터 갑작스레 날라리가 되어 버린 날라리들. 이렇게 전해 주고 싶다. 그딴 식으로 살 거면 아예 살지 말라고. 좀 심한 말이라고? 너희들은 나라에 도움이 되라고 탄생한 꿈돌이들인데, 너희들이 그렇게 살아 봐야 사회나 경제에 피해나 가지 않겠냐는 것이다. 사회는 능력 있고 모범적인 사람을 원한단다. 그딴 식으로 놀다가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정부에서 돈을 받고 살 거냐? 제대로 좀 살아라. 최대한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노는 건 적당히 하고, 공부도 좀 해라. 라고 전해 주고 싶다. 좀 심했나? 그러나 날라리들은 이 말을 들어야 한다. 뭐, 바라지만, 될 수도 없지만, 나는 날라리가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다음엔 ‘날라리들의 역사’를 파헤쳐봐

준석이 그린 날라리의 모습

준석에게 접속사를 하나도 안 썼냐고 물었다.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인다. 검사를 해보았다. 한글 프로그램의 ‘찾기’ 기능으로 검색을 했다. 먼저 ‘그리고’. 세 번이나 나왔다. 준석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나도 모르게 써버렸네?” 더 있었다. ‘그러나’와 ‘그런데’ ‘그러면’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무의식중에 총 6개를 쓴 셈이다. 이건 ‘양반’이다. 그전에 비슷한 분량(200자 원고지 기준 12매, 10포인트 글자로 A4용지 1과 1/3)으로 썼던 다른 글과 비교해보았다. 그 글에 쓴 접속사를 검색해보니 ‘그리고’가 7개, ‘그러나’가 4개, ‘하지만’이 3개, ‘그런데’가 3개, ‘그래서’가 7개였다. 총 24개였다. 이번엔 그 1/6을 쓴 셈이다. 선방했다고 오히려 칭찬해줘야 할까?

준석은 “의외로 힘들지 않았다”고 평했다. 그동안 접속사를 너무 많이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많이 써도 이상하고 적게 써도 이상한 것이라고 했다. 적당히 글에 배분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다 준석아. 그런 말은 모호하다. 불필요한 접속사는 아예 쓰지 않아도 된다. 하나도 없어도 문제 될 거 없다. 정 필요할 때만 쓰면 된다.

접속사와 관계없이 글에 대한 평을 하자면, 날라리를 너무 단편적으로만 묘사하는 느낌이다. 왜 그 아이들은 그렇게 옷을 입고 다니고 아이들이 보기에 부정적인 행동을 할까. 준석은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이른바 ‘날라리’로 통하는 아이들에게도 사연이 있을 거야. 걔들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원인과 단순하지 않은 역사가 있는 거야. 그런 것을 무시하고 무조건 “날라리는 재수 없다” 해버리면 설득력을 주지 못해.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거든. 다음엔 네가 날라리라 생각하는 친구 한 명을 붙잡고 심층 인터뷰를 해보길 바란다. 이 말에 준석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완강히 거부 의사를 밝힌다. “내가 왜, 내가 왜 그래야 해?”

다음은 은서의 글이다. 은서는 ‘모르는 사람이 끌고 갈 때는’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자신이 작사·작곡했다며 흥얼거렸다. 내친 김에 그걸 주제로 ‘접속사’ 없는 글을 써보라고 했다.

위험하면 거시기를 차세요?

내가 노래를 작곡, 작사를 했다. 가사는

모르는 사람이 끌고 갈 때는~ 안 돼요, 싫어요, 도~와 주세요~
모르는 사람이 길 물어 볼 땐 죄송해요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세요!~
내 몸을 소중히 지킵시다~
간주~
안 돼요, 싫어요, 도~와 주세요~ 그것도 안 되면 갖고 있는 물건을 던지거나,
발을 밟으세요. 간주~
모든 것이 안 먹히면 마지막 방법~ 발로 거시기를 차~세요.

마지막 부분에서 '발로 거시기를 차~세요.'가 좀 이상하다. 나는 배운 것 이지만... -_-

내가 이 노래를 만들게 된 이유는 학교에서 아동 안전에 대한 동영상을 봤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안돼요, 싫어요, 도와주세요.를 외치라고 했다. 선생님께서 거시기를 차라고 했다.

납치범은 아이들을 어떻게 유혹할까. 유혹을 하거나, 끌고 가거나 길을 물어본다. 난 한 번도 그런 유괴를 당할 뻔한 적이 없다. 며칠 전에 한 아이가 학교 운동장에서 이상한 사람에게 끌려간 적이 있다고 했다. 도망치면 됐지만, 또한 몸이 안 움직였을 테이다. 당한 그 아이는 6시간 동안이나 수술을 했다고 한다. 나도 조심해야 겠다. 유괴는 한 순간에 일어난 다는 것을 엄마에게 들었다. ㅎㄷㄷ 내가 유괴 당하면 어떨까? 엄마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겠지? 거짓말~이라고 소리치겠지. 장난은 하면 안 된 다는 것을 안다.

정말 ‘그러나’를 제대로 쓰는 거니?

은서가 그린, 모르는 사람이 끌고 가는 상황

접속사가 없다. 비슷한 분량의 다른 글에선 대여섯 개 나왔는데 말이다. (내가 볼 때 은서가 완벽하게 접속사를 청소한 것은 글이 너무 짧았던 덕분이다. ^^) 은서는 “‘그러나’와 ‘그리고’를 안 쓰니까 글이 이상하다”고 했다. 그건 고정관념이다. 그걸 이상하다고 느끼는 네 생각이 이상하다.

글의 내용은 글쎄~. 거시기를 차라고? 극적인 위험상황에선 효과적인 대응책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잘못 찼다간 두 배, 세 배의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 쩝, 더 이상은 노코멘트!

아무튼 오늘의 주제는 ‘접속사’다. 많이 쓰는 게 ‘그러나’ ‘하지만’ ‘그런데’ ‘그리고’ ‘그래서’이다. 종류별로 분석을 해 보자.

‘그러나’와 ‘하지만’은 앞의 이야기를 번복할 때 쓴다. ‘그런데’도 비슷한 용도인데, 전혀 다른 상황의 전개를 암시할 때 더 많이 쓴다. ‘그리고’는 앞부분의 내용에 뭔가를 덧붙이려 할 때, ‘그래서’는 인과관계를 설명할 때 쓴다. 여기서 소설가 김훈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접속사를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못 써요. ‘그러나’를 쓰는 것은 무지 어려운 일이죠. ‘그러나’를 쓰기 위해서는 앞에서 전개한 사유를 번복해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그러나’를 쓰면 안 되죠. 그런데 사실 한국에서 ‘그러나’가 똑바로 쓰이는 경우라는 것을 나는 잘 보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앞에서 전개한 사유를 번복하는 새로운 사유가 뒤에 나오지 않는데 ‘그러나’를 쓰니까, 이런 것을 쓰면 안 되는데 왜 쓰나 싶어요. 그러니 ‘그러나’를 쓴다는 게 나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겠어요. 그것이 무서워서 안 쓰는 거예요. 사유의 번복이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런 놈들이 왜 ‘그러냐’를 쓰냔 말이에요.”(『문학동네 2004년 여름호 대담에서)

거개의 사람들은 사유를 번복하지 않으면서도 ‘그러나’와 ‘하지만’과 ‘그런데’를 소비한다. 자꾸만 읽다가 걸린다. ‘그리고’와 ‘그래서’도 마찬가지다. 없을 때가 훨씬 깔끔하다. ‘그리고’와 ‘그래서’는 글쓰는 사람을 구차하게 만드는 느낌이다. 특히 ‘그래서’가 가장 그렇다. 이번엔 김훈의 무공해 문장을 감상해보자.

노목희가 대파를 썰어서 냄비에 넣었다. 파가 끓는 국물에 잠기면서 김 속에서 단내가 풍겼다. 노목희는 레인지 불을 끄고, 달걀을 풀어넣었다. 냄비 속에 남은 잔열에 달걀이 익었다. 달걀은 반쯤 익으면서 국물 속으로 풀어졌다. 달걀이 풀어지자 대파가 익는 단내가 부드러워졌고 파의 날카로움이 숨을 죽였다.
노목희가 라면 한 개를 두 그릇에 나누어 펐다. 김이 피어오르고, 냄새가 방 안에 가득 찼다. 대파와 달걀이 국물 속에서 익어가면서 서로 스민 냄새였다. 문정수가 비닐봉지에서 김밥과 겉절이김치를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 경찰서 구내식당에서 김밥을 살 때 얻어온 김치였다.
(중략)
노목희가 젓가락으로 겉절이김치를 집어들었다. 배추가 너무 커서 한 입에 넣을 수 없었다. 문정수가 젓가락을 뻗어서 김치를 잡았다. 문정수의 젓가락과 노목희의 젓가락이 배추 한 조각을 맞잡고 세로로 찢었다. 찢어진 김치를 각자 라면 위에 얹어서 먹었다. 문정수는 그릇을 들어서 국물을 마시고 입을 휴지를 닦았다.


장편소설 『공무도하』의 한 장면이다. 남녀 주인공이 라면을 끓여먹는 광경이 손에 잡힐 듯 정겹게 묘사돼 있다. 라면을 끓일 땐 파를 먼저 넣고 달걀을 넣어야 한다는 논리도 그럴듯하다. 문장들 속에다 ‘그러나’ ‘그래서’ ‘그리고’를 우겨넣고픈 충동을 느낄 수 있겠지만, 접속사는 실제 찾을 수가 없다. 김훈의 소설에선 그것들을 만난 기억이 없다.

자, 이제 오늘의 결론을 내 맘대로 요약해본다.

접속사와 자주 접속하면 불량 글쓰기.

날라리를 싫어하는 준석아.
접속사와 친하게 지내면 너도 ‘날라리’ 필자가 되는 거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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