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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을 버리고 정체성을 택하다 - 이상은 <공무도하가> (1995)

포크, 재즈, 록에서부터 일렉트로니카의 사운드를 담은 신보까지 늘 음악적인 열정과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그녀의 명반, 6집 <공무도하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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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필요한 감정 처리나 치밀한 코드 워크들. 언뜻 생각하기엔 여성 뮤지션의 활동이 활발할 법도 한데 국내외를 살펴보면 실제론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죠. 이런 상황에서도 얼마 전 14집을 발표하며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뮤지션이 있습니다. 바로 ‘이상은’이죠. 포크, 재즈, 록에서부터 일렉트로니카의 사운드를 담은 신보까지 늘 음악적인 열정과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그녀의 명반, 6집 <공무도하가>입니다.

이상은 - <공무도하가> (1995)

고등학교 입시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공무도하가」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표적인 고전 시다. 물에 빠져 죽은 임을 향해 바치는 아내의 노래로 이별과 상실의 정서를 그리고 있다. 한자어 네 개로 이루어졌고, 네 개의 행이 만나 완성된 시가 인생의 슬픔을 함축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놀랍다. 짧지만 여운이 긴 동양적인 미를 살리고 동반자를 잃어버린 양 헤매는 젊은이의 이정을 담은 탓에 앨범의 성격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88년 강변가요제를 통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상은은 이름보다도 「담다디」를 예명 삼아 알려졌다. 이름보다는 외우기 쉬운 ‘담다디’가 더 입에 잘 붙었던 탓이다. 마치 CF에서 상품명만 알고 회사는 모르는 현상이 간혹 일어나듯이 노래만 살고 가수가 외면 받는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80년대생들이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당시에 보기 드문 롱다리 가수였다는 점뿐. 한창 활동이 진행될 때 영화에 출연하는 등 외적인 이미지를 알리는 데도 주력했지만 본인이 상관없는 모습으로만 각인되었다. 그는 돌연 미국으로 향한다.

좋아하는 미술을 하고 그곳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의 영향으로 음악을 향한 지향은 180도 바뀌어 버렸다. 전자음이 범벅이 된 뉴웨이브 댄스에서 벗어나 생음악 환경에 맞는 곡을 쓰는 싱어송라이터로 변모한 것이다. 3집의 「더딘 하루」에서는 강렬한 록 기운이, 「너에게 주고 싶은 것」은 퓨전을, 4집에서는 힙합 프로듀서인 김홍순을 만나 유행하던 뉴 잭 스윙 사운드를 시도했으며 5집에서는 「언젠가는」으로 대변되는 포크 색채가 가미되었다. 계속된 실험 정신을 구가하며 활동을 이어 나갔지만 이미 댄스 물결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요계 환경은 이상은과 같은 비주류를 받아들이기에 10대 지향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자신을 한때 따르고 좋아했던 어린이들이 댄스에 휩쓸린 상황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된 자기 물음에 답을 찾고 있을 찰나 일본으로 떠났다. 그곳에는 뉴욕에서 찾을 수 없었던 동양적인 감성이 살아 있음을 직감했다. 피아노를 통해 울려 퍼진 선율은 맑았으며 베이스와 드럼, 기타 터치 하나하나까지 감정선이 깊었다. 지금까지 음악 동료로서 활동하고 있는 타케다 하지무도 이 당시 만난 것이다. 그렇게 현지 일본인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최고의 명반이라고 칭송받는 <공무도하가>가 탄생했다.

집시를 연상시키는 아코디언 연주로 시작하는 첫 곡 「Bohemian」은 정처 없이 떠도는 히피의 모습을 자신과 보이지 않는 당신에 투영시킨다. 여기서 가사의 작법이 마치 이음부가 끊어지는 듯한 구성을 취한다. 독특한 해체의 미학이다. 다르게 보면 앞과 뒤가 생략된 단문 구성의 우리나라 본래의 성질이 배어 있는 것 같다.

타이틀 곡 「공무도하가」는 가사의 특징과 여백의 미를 살린 결정체다. 도입부에서는 님 잃은 슬픔이 가슴을 치듯 장중한 북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피리 소리가 설움을 서서히 잠재운다. 그리고는 한 구절 한 구절 생략된 이야기들을 불러 간다. 한자(漢字)로 이루어진 후렴구가 나오자 하나하나 음을 살려 읊어 간다. 마치 제의 때 곡(哭)을 흐느끼는 듯한 진한 여운이 남는다. 이어진 「삼도천」은 공무도하가의 정적을 깨고 매우 리듬감 있는 전개를 보여 준다. 피리 이외에는 전통적인 정서를 느낄만한 속성은 없지만 바람 소리 같은 샘플을 이용하여 ‘인스턴트적인 자연’을 보여 준다. 다수의 국악기 편성 없이도 공연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셈이다.

동양적인 정서에 기댄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기존에 보여 줬던 포크, 재즈적인 터치를 한층 확장한 앨범이기도 하다. 「Don't say that was yesterday」는 짙게 드리운 슬픔을 포크와 재즈의 속성을 적절히 섞어 가면서 노래하고 있고, 역시 「Summer clouds」도 중간에 구성을 바꾸는 형식으로 포크와 블루스를 연계시키고 있다. 스팅의 「English man in NewYork」의 재즈 편성을 듣는 듯한 「새」의 경우 파이프 피리 소리가 매우 인상적이다.

퓨전 국악이라는 말이 일상화되는 요즘 상황에서 선배격의 작품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악기가 쓰이지 않았다는 점과 전체적인 구성이 재즈에서 볼 수 있는 즉흥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보인다. 또한 살타첼로처럼 국내 민요를 재즈로 재편성시키는 차원은 아니다. 어찌 보면 두 가지 축을 일탈해 보이고자 했던 욕심일는지도 모른다.

6집 <공무도하가>를 통해 도시 속에 자연주의를 잉태한 이상은은 7집 <외롭고도 웃긴 가게>에서 허무를 낳고 이름을 리체(Lee Tszche)로 바꿔 세계 시장을 위한 8집을 내놓는다. 그리고 6집이 기반이 된 9집 <Asian prescription>을 통해 계속된 시도를 해보지만 실패한 뒤 국내에 정착하게 된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마니아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남들과 타협을 버리고 정체성을 택한 용기만큼은 「공무도하가」처럼 널리 확산되었으면 한다.

- 글 / 류석현(soulryu@hanmail.net)


제공: IZM
(www.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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