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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지도 못할 거면서

맑고 향기롭게 사는 법을 알았던 스님은 아마도 가방 가득, 욕심껏 채워 넣은 내 책들을 보면 분명 뭐라고 한마디 하실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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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 방송에 따라 안전벨트를 매고, 비행기 좌석을 곧추세웠다. 오전 10시의 활주로, 거대한 비행기들의 정류장, 다소 쓸쓸하고, 기이할 정도로 텅 빈 듯한 그 공간을 나는 멀리서 내려다보았다. 육중한 비행기는 곧 엄청난 굉음을 일으키며 조금 전까지 내가 발을 디디고 달리던 땅 위를 이륙하려 했다. 하늘은 티 없이 파랗고, 구름은 너무 하얘서, 항공사 브로슈어에 나오는 스틸 사진처럼 보였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나간다.


2주 전쯤, 급히 출장을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알다시피, 이런저런 테러 사건으로 인해 항공기 보안 검색이 심해지면서부터 비행기에 생수나 음료수 같은 액체류를 가지고 탈 수 없었다. 하루에 물을 3리터 가까이 마시는 공인된 ‘하마족’인 나는 늦잠 때문에 맘이 급했던 탓에, 무심결에 가방에 넣어 두었던 생수를 보안 검색대 직원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더구나 비행기를 놓칠까 봐 체크인 카운터에서부터 달리기 시작한 터라, 다양한 국적기가 한눈에 보이는 공항 라운지에서의 우아한 모닝커피고 나발이고, 얼굴은 이미 목덜미 아래까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자마자 비행기 좌석에 앉아, 제일 날렵해 보이는 스튜어디스에게 물부터 달라고 말했다.

“예, 알았습니다. 손님!”

아름다운 그녀는 예의 가지런한 치아 대여섯 개가 보이는 전형적인 스튜어디스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곧 투명한 플라스틱 컵 하나를 건네주었다. 나는 컵 안의 생수를 쉬지 않고 단숨에 마셨다. 바짝 말라가던 목 안이 촉촉하게 젖어드는 시원한 느낌 때문에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고여 있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제야 내가 가야 할 곳과 내가 있는 곳에 대한 생각들이 조금씩 가슴에 와 닿았다.

기내 방송에 따라 안전벨트를 매고, 비행기 좌석을 곧추세웠다. 오전 10시의 활주로, 거대한 비행기들의 정류장, 다소 쓸쓸하고, 기이할 정도로 텅 빈 듯한 그 공간을 나는 멀리서 내려다보았다. 육중한 비행기는 곧 엄청난 굉음을 일으키며 조금 전까지 내가 발을 디디고 달리던 땅 위를 이륙하려 했다. 하늘은 티 없이 파랗고, 구름은 너무 하얘서, 항공사 브로슈어에 나오는 스틸 사진처럼 보였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비행기 날개와 함께 순간 몸이 30도쯤 젖혀졌다. 스튜어디스에게 건네주지 못해, 그때까지 내 손안에 쥐어져 있던 텅 빈 투명한 일회용 플라스틱 물컵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고였다.

그날은…… 법정 스님이 입적하신 지 꼭 하루가 되는 날이었다.

깊은 위로

 


 

 

 

서점 직원일 때부터 생긴 동시다발적인 독서 행각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아서, 우리 집 거실과 침대, 화장실 선반 위에는 읽다 만 대여섯 권의 책들이 쌓여 있었다. <페이퍼>에 연재하던 시절부터 늘 낄낄대며 박장대소했던 김양수의 만화 『생활의 참견』에서부터, <GQ> 3월호, 출판사에서 보내 준 몇 권의 신간, 그리고 화장실에 두고 반복해서 읽는 필립 들레름의 『첫 맥주 한 모금 그리고 다른 잔잔한 기쁨들』까지 말이다(시인 김정란이 번역한 ‘필립 들레름’의 이 에세이는 아침에 읽으면 하루가 상쾌해지는 완벽한 아침용 도서이다. 가을에 입는 넉넉한 스웨터, 막 콩깍지에서 빼낸 초록색 완두콩, 갓 볶은 원두 향이 나는 에세이로, 아쉽게도 이미 절판되었으나 헌책방에 종종 출몰하니 부디 점검해 보시길).

『깊은 위로』를 읽은 것 역시 화장실에서였다. 책 무더기 속에 쌓여 있던 그 책은 소설 연재가 끝나가던 작년 여름 즈음에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은 조금씩 잊혀졌는데, 그림을 통해 저자의 일상을 쓴 에세이 형식의 이 책이 집 안에 있는 수많은 책 무더기 속에 파묻혀 버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책 속의 ‘너무도 싫은 당신’ 같은 챕터가 말해 주는 것처럼 가방 하나 사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마저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는 저자의 글이 여간 솔직한 게 아니어서, 나 역시 같은 제목으로 ‘너무도 싫은 당신’이란 글을 써볼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인터넷으로 메일을 확인하다가 『깊은 위로』가 떠올랐던 건, 병중이었던 법정 스님이 돌아가셨단 얘길 듣고 난 직후였다. 인간의 수명이 갈라파고스 거북이만큼 길어질 것이란 미래학자들의 예언이 끔찍하다가도, 늘 곁에 있었으면 하는 큰 어른이 돌아가시는 일엔 여간해선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그날도 젖은 빨래가 마르길 기다리며 베란다 앞에 웅크리고 한동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선반 위에 쌓여 있던 책들을 뒤져 『깊은 위로』를 찾아냈다. 내가 생각하기에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대한 최고의 에피소드가 바로 이 책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깊은 위로』의 진가는 ‘위대한 영혼의 빈 걸망’이란 제목의 에피소드만으로 충분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중학교 시절, 아빠가 사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사라진 ‘종로서적’ 마크가 찍힌 이 책의 앞장에는 육필로 쓴 아빠의 짧은 편지가 있었는데, 이 책으로 반드시 독후감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엉터리 독후감을 쓰고, 혼이 났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하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라 스님이 쓰신 책의 내용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무소유』를 읽고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마음속에 또 다른 의문이 생겼었다.

커피숍의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히말라야나 티벳, 어쩌면 인도에서 온 수도승 같았다. 나는 동그랗게 반짝거리는 스님의 머리를 유심히 바라봤다. 어렸을 땐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감동받지 않았다. 대신 선생님을 향해 이렇게 되물었다.
“왜 아무 것도 소유하면 안 돼요? 말도 안 돼!”
인생은 꿋꿋이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한다는 소설을 읽고 나선 이렇게 물었었다.
“심심한데 둘이 가면 안 되나?”
나는 언제나 거꾸로, 늘 실수투성인 채로 살았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인생의 단어장에는 ‘조화’ ‘균형’ ‘관계’ ‘평화’ 같은 말들이 있다. 이런 말들에 겨우 기대어 지금까지의 실수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며 살아온 건지도 모른다.


 

 

‘왜 아무 것도 소유하면 안 돼요?’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질문 하나. 어쩌면 이것이 나 같은 평범한 중생들의 솔직한 생각이 아니었을까. 이토록 아름다운 물건을 가지면 왜 안 되냐고, 스님이 들고 계신 빈 걸망 안에 내가 좋아하는 찰스 디킨스의 책들과(기왕이면 전집으로!) 데메테르 향수를 잔뜩 넣어 가지고 다니면 왜 안 되느냐고 되묻고 싶었다. 열여섯 살의 나는 ‘무소유’를 말하는 스님에게 묻고 싶었었다. 어쩜 그때의 의문이 『스타일』 속의 이서정이란 인물에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깊은 위로』를 읽다가 나 같은 평범하고, 속물적인 사람도 감동하고 말, 스님의 진짜 모습을 발견했다. 나로선 진정한 ‘생활의 발견’이었다.

『깊은 위로』를 쓴 저자의 후배는 스튜어디스였다.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법정 스님을 자신의 비행기 승객으로 모시게 됐다. 평소 스님이 쓰신 책을 좋아했던 그녀는 이 특별한 손님을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스님은 긴 비행시간 내내 고기나 야채는 물론이고 샐러드조차 먹지 않은 채, 처음 비행기를 탄 모습 그대로 비행기 좌석에 꼿꼿이 앉아 계시기만 했다. 걱정이 된 그녀는 고민 끝에 구아바 주스와 빵을 가져다 드리기로 했다. 그제야 스님은 그것을 아주 조금 드셨다고 한다. 아홉 시간 동안을 주스 몇 잔과 빵만으로도 아무런 불만이 없어 보이는 스님을 보면서 그녀는 깊은 감동을 받았고, 삭발승의 파리한 머리 같은 정갈한 삶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이야기가 여기까지였다면, 이것은 훈훈하지만 그저 지나가는 일화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한국에 도착한 그녀는 경복궁을 구경한 뒤 근처에 있던 ‘법련사’에 들렀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법정 스님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스님은 그녀를 대번에 알아보면서 반가워하며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안쪽에 있는 어느 스님 방의 다락을 뒤적이더니, 자신의 허름한 걸망을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그때 스님이 걸망 안에서 꺼낸 것은 작은 컵이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그녀가 비행기에서 스님께 구아바 주스를 대접했던 바로 그 일회용 종이컵이었다.

쓰면 쓸수록 흐물흐물해지는 게 종이컵의 특성이다. 하지만 법정 스님은 비행기에서 준 끈적거리는 종이컵을 버리는 것이 아까워 그것을 몇 번이고 물로 헹궈 가며 다시 쓰고 있었다. 스님의 모습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그녀는, 그날 이후 어떠한 것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물을 마셨던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집으로 가져왔다. 나도 이 컵을 스님처럼 오래오래 사용할 생각이다.
입적하신 큰스님의 시신을 수습하자, 오랜 세월 고행의 결과로 사리가 몇십 개 쏟아져 나왔단 헤드라인 뉴스보다 이 작고 소박한 이야기는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지상의 종이컵 하나가 땅 아래의 중생에게 깊은 각성 하나를 주었으니, 아마 먼 곳에 있을 법정 스님은 분명 웃고 계실 거다. 비행기에서 줄곧 사용하곤 하는 플라스틱 컵을 보다가 법정 스님의 일회용 종이컵 얘기가 떠올랐던 것도, 코끝이 찡해져 눈물이 나왔던 것도, 종이컵 하나 귀히 여겨 버리지 못하는 분을 이곳에서 다시는 볼 수 없으리란 애달픔 때문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자신의 안구를 기증하고 이 땅을 떠났던 것처럼, 세상에 말빚을 남길 수 없다며 자신의 책을 절판해 달라고 당부하던 법정 스님마저 이 땅에선 다신 볼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의 삶이 잦아들 때마다, 새로운 생명 하나가 파도처럼 떠밀려 이곳으로 온다고,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이 둥근 원처럼 연결되어 우리가 사는 곳을 움직인다고 말했던가. 3월에 폭설이 내린 서울 도심의 교통지옥 속에서, 사람들은 가끔 ‘박재철’이란 지극히 평범한 이름을 가졌던 남자를 아련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스님이 떠났으니 참 슬프다고 말하면서도 어김없이 때가 되자 배가 고팠다. 스님처럼 주스 몇 잔에 빵 한 조각으로는 어림없는 삶이 아닌가. 스튜어디스가 챙겨 주는 기내식을 꾸역꾸역 먹은 나는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았다. 고단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을 실어 나른 비행기는 포근하게 떠 있는 구름을 뒤로하며 따스한 바람이 부는 남태평양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맑고 향기롭게 사는 법을 알았던 스님은 아마도 가방 가득, 욕심껏 채워 넣은 내 책들을 보면 분명 뭐라고 한마디 하실 것만 같았다. 김영하가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 너무나 좋아하는 엘모어 레오나드의 『악어의 심판』, 책 만드는 후배가 좋다고 추천한 『칠레의 밤』, 몇 번이고 읽게 되는 폴 오스터의 『빵 굽는 타자기』, 그리고 꼭 읽겠다고 다짐했던 『코끼리에게 물을』,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아이들의 숨겨진 삶』 『전주에서 놀다』 『맛있는 빵집』…… 맙소사! 그러고도 내 여행 가방 안에는 세 권이나 책이 더 들어 있었다.

“너는 참 욕심이 많구나. 고작 4일인데, 다 읽지도 못할 거면서.”

맞다.
반의반도 읽지 못했다.
들고 다니느라 종일 어깨만 아팠다.
나는 늘 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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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백영옥

장편소설 『스타일』로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 2008년에서 2009년에 걸쳐 YES블로그에 장편소설 『다이어트의 여왕』 연재, 일간지 연재칼럼을 모아 낸 에세이집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 단편집 『아주 보통의 연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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