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차승우의 록큰롤 스타
하이브리드 태생의 록큰롤에 크리에이티브를 심다
보 디들리
록큰롤이란 용어는 1951년에 라디오 DJ인 앨런 프리드가 자신의 라디오 프로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최초의 록큰롤 넘버’는 무엇인가? 이것은 구미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지금껏 논란의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록큰롤이란 용어는 1951년에 라디오 DJ인 앨런 프리드가 자신의 라디오 프로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최초의 록큰롤 넘버’는 무엇인가? 이것은 구미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지금껏 논란의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록큰롤은 대중음악의 모든 요소가 지역과 인종의 벽을 넘어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유입된 문화적 집합체이며 지극히 자연 발생적인 음악이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록큰롤의 시대’에 앞서 1940년대에 이미 록큰롤의 형식을 갖춘 음악들은 존재하고 있었다. 흑인의 시카고 블루스와 리듬 앤 블루스가 바로 그것이었다.
록큰롤이 백인 음악과 흑인 음악의 ‘하이브리드’였다고는 해도, 실질적으로 음악적인 지분은 대부분 흑인 음악에 그 몫이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음악에도 인종 간의 분리가 엄격했던 시절. 몇몇 진보적인 백인 뮤지션들은 흑인 음악 고유의 스타일에 고무되어 그러한 요소들을 자신들의 음악에 적극 반영해 나아갔고, 그것은 점차 젊은 백인 청중들에게도 받아들여지게 된다. 지금껏 접해 보지 못한 새로운 그 무엇에 그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흑백의 격리가 그렇게 붕괴되어감에 따라 음악은 점점 더 요란해져 갔다. 50년대 중반에 이르러 록큰롤은 대륙 전체를 장악했고, 그것을 이전의 음악들과 뚜렷이 구분 짓게 한 원동력은 다름 아닌 비트였다. 단순하면서도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듯한 원초적인 리듬은 록큰롤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하고 구현해 낸 사람이 ‘보 디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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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블루스 맨 존 리 후커의 연주를 듣고 감명을 받은 보 디들리는 바이올린을 완전히 때려치우고 기타에 전념하게 된다. 십 대 시절부터 시카고 거리에서 연주 생활을 시작하게 된 그는 마라카스의 제롬 그린, 하모니카의 빌리 보이 아놀드와 함께 트리오를 결성하고, 고교 졸업 후에는 클럽에서의 음악 활동과 트럭 운전, 막노동 등의 일을 병행하였다.
청운의 꿈을 안고 데모 레코드를 제작한 그는 시카고의 여러 음반사를 다니며 자신을 어필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대와 무관심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흑인 음악의 명가 체스 레코드(머디 워터스, 하울링 울프, 척 베리 등 여러 흑인 뮤지션을 발굴하여, 블루스와 리듬 앤 블루스 그리고 초기 록큰롤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로부터 연락이 왔다. 공동 대표인 체스 형제가 그의 데모 레코드를 듣고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 그리하여 가사와 타이틀을 바꾸고 체스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다시 한 후, 체스 산하의 체커 레코드에서 그의 첫 번째 레코드가 발매되었다. 데뷔 싱글 <Bo Diddley> <I'm a Man>은 곧바로 R&B 차트의 톱을 차지했다. 1955년 3월의 일이었다.
같은 해,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의 국민적 TV쇼였던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게 된다. 프로그램 상으로는 테네시 어니 포드(Tennessee Ernie Ford)의 히트곡인 「Sixteen tones」를 연주하는 것으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생방송 중 돌연 이를 어기고 자신의 곡인 「Bo Diddley」를 연주함으로써 진행자인 에드 설리번의 대노를 샀다. 이후 <에드 설리번 쇼>의 출연은 금지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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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부터 보 디들리는 그레치(미국의 기타 브랜드)에 특별 주문 제작한 ‘시가렛 박스 기타’(기타의 바디가 직사각형으로 설계되어 있었다)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이것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50년대 후반에 와서는 우연히 만나 알게 된 어린 소녀를 밴드의 세컨드 기타리스트로서 합류시키게 되는데, ‘레이디 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게 된 그녀는 세계 최초의 여성 록큰롤러가 되었다.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Mona」 「Who Do You Love」 「Cracking up」 「Road Runner」 「You Can’t Judge a Book by the Cover」 같은 명곡을 꾸준히 발표해 나갔지만, 데뷔 싱글만큼의 스매시 히트는 기록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67년에 발표한 「Ooh Baby」는 그의 마지막 차트 톱 20위 진입 곡이 되었다. 69년에는 당시의 블루스 리바이벌 붐에 힘입어 블루스의 대가인 머디 워터스, 하모니카 연주자 리틀 월터와 함께 ‘수퍼 블루스 밴드’라는 프로젝트 밴드를 결성, 체커 레코드에서 음반을 발매하였다. 1979년 1월에는 영국의 펑크록 밴드 더 클래쉬의 전미 투어에 오프닝으로 참가하는 등 까마득한 후배 뮤지션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가지며 꾸준히 활동을 이어 나갔다. 1987년에는 마침내 록 뮤지션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록큰롤 명예의 전당 공연자 부문에 헌액되었다. 곁다리로 얘기하자면, 89년에는 나이키 광고의 모델로 출연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리듬 앤 블루스 재단의 개척자 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1997년 그의 첫 번째 히트곡인 「Bo Diddley」가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입성, 그 외에도 수많은 어워드를 획득한 해가 되었다.
그는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세계를 돌며 여전히 정력적으로 투어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지만, 2007년 5월 12일 아이오와 주의 카운실블러프스에서 공연을 마친 직후에 심장 발작으로 쓰러져 다음날 13일에 입원했고, 8월에 재발해서 다시 입원을 했다가 집으로 돌아와 요양을 했다고 한다. 2008년 6월 2일 오전 1시 45분경 그의 자택에는 35명의 가족들이 모여 찬송가 「Walk around the Heaven」를 불렀다. 조용히 노래를 듣던 그는 “나는 이제 천국으로 간다.”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향년 79세.
보 디들리는 실험가였다. 그가 낳은 정글 비트는 록 음악의 보편적인 리듬 패턴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아프로 아메리칸 특유의 거리 문화인 Dozen(랩의 원형이 되는 일종의 욕지거리 교환 게임)을 록큰롤의 세계에 반입했다. 또한 그는 야성미 넘치는(때때로 폭력적이기까지 한) 하모니를 구사하며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자적인 기타 사운드를 선보였다. 그 영향력은 척 베리에 필적하는 것이었고, 음악적인 독창성으로 말하자면 척 베리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의 기타 주법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떤 신비적인 영역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Mona」와 「Bo Diddley」 등 그의 명곡들에서는 당시로서는 미래 지향적인 사운드 이펙트와 자연적인 소리의 왜곡을 통해 이전 그 누구도 표현하지 못했던 독특한 무드를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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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문샤이너스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다. 초등학교 때 뱀이 그려진 전자 기타를 외할머니에게 선물로 받아 처음 기타를 잡았고, 고등학교 때 크라이베이비라는 밴드로 활동을 시작했다. 역시 고등학교 때 노브레인을 결성하여 2집까지 활동한 후 일본의 도쿄 스쿨 오브 뮤직으로 기타를 공부하러 갔다. 하이라이츠라는 밴드를 거쳐 문샤이너스를 결성했다. 최근에 문샤이너스 정규 1집인 <모험광백서>를 펴내고 열렬하게 활동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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