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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불행한 시대의 지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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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는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정확함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내 맘에 쏙 드는 표현이다. 백번 듣는 게 한번 보느니만 못하다는 격언은 일방적일 수 있다. 보는 게 듣는 것보다 좀 더 정확하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게 어떨지.

나는 지도와 지도책이 좋았다. 그런데 1970년대만 해도 지도와 지도책은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당시엔 세밀한 지도는, 보거나 구하기가 어려울뿐더러 그런 지도를 소유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야산에서 내려온 신사복 차림의 남자가 신고 있는 흙 묻은 구두와 다를 바 없었다. 하여 어린 나는 형들의 『사회과부도』로 지도에 대한 갈증을 달랬다.

『지리부도』라고도 하는 『사회과부도』는 넓은 의미의 사회과목에 딸린 지도책이다. 『사회과부도』는 교과서 등속 가운데 제일 큰 판형이고 지도를 담은 부분은 컬러판이며 상대적으로 책값도 가장 비쌌다. 하드커버 장정의 고등학교 『사회과부도』는 분량 또한 만만치 않았다. 지도 찾기는 형들과의 오락거리였다. 역사지도 부분은 건너뛰었지만 후반부의 각종 지리통계까지 달달 외울 만큼 『사회과부도』를 섭렵했다.

존 레니 쇼트의 『지도, 살아 있는 세상의 발견』(김희상 옮김, 작가정신, 2009)은 “전 세계를 아우른 지도의 변천사”다. 선사시대의 바위지도부터 오늘날 위성지도까지 지도가 걸어온 길을 보여준다. 책에 실린 다종다양한 지도들은 나 같은 왕년의 ‘지도 팬’에겐 눈요깃거리로 그만이다.

“지도는 생동감 넘치는 인간 의사소통 형식 중 하나다.” 존 레니 쇼트의 일성(一聲)이다. “지도는 세기와 시대를 넘나드는 일종의 의사소통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좀 있다 덧붙인 말이다. 이처럼 존 레니 쇼트는 이 아름다운 ‘지도책’의 갈피마다 지도의 반짝이는 성격을 수놓았다. 우선 ‘보물지도’에 드러난 보물부터 살펴본다.

지도는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정확함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내 맘에 쏙 드는 표현이다. 백번 듣는 게 한번 보느니만 못하다는 격언은 일방적일 수 있다. 보는 게 듣는 것보다 좀 더 정확하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게 어떨지. 아는 만큼 보인다는 감상의 기율은 꽤 건방지다. 머리만 있고 가슴은 없다 할지.

“세계를 그려 보여주는 지도는, 우리가 주변 환경을 보고 이해하는 방식과 그 예술적 묘사 그리고 과학적 탐구 등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온몸으로 웅변한다. 다시 말해 지도는 단순히 종이 위에 그려진 물체가 아닌, 사회적 사건의 기록이자 증언이며 역사를 품어 안은 공예품인 것이다.”

지도는 양면성이 있다. 먼저 심오함과 거짓이 공존한다. 세상을 선택적으로 축소한 “지도는 땅의 거짓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지도는 단순히 사물의 위치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물이 담고 있는 심오한 의미를 공표한다.” 지도에 그런 의미는 극히 일부만 드러나 있을 따름이나.

“지도는 종교적 신심의 발원이기도 하지만, 점증하고 있는 상업적 이해가 얽혀 있기도 하다.” 또한 “지도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 아니며, 보편 진리의 중립적 전달자도 아니다. 지도는 나름대로 목적을 갖는 대변인이다.” 지도의 주된 목적은 “땅을 차지하고, 땅을 관리하며, 주요 도시의 거점을 알아두는 것”이다. “땅을 차지하고 싶은가? 지도를 그려라.”

존 레니 쇼트는 세 가지 유형으로 지도를 가늠하곤 한다. 지도로 세상을 나타내는 방법은 상징적 기호와 그림, 그리고 도면이다. 신앙 고백에 가까운 ‘마파 문디’(mappa mundi, 세계지도)는 ‘삼분할’ ‘지역분할’ ‘전이(轉移)’의 세 형태를 띤다. 르네상스 시대의 도시 지도는 측면에서 바라본 ‘전망’, 바로 위에서 내려다본 ‘평면’,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본 ‘조감’ 등 세 관점을 사용한다. 지도(map)의 어원인 라틴어(mappa)는 ‘옷’을 뜻한다.

이슬람 세계지도의 특징을 네 가지로 나눈 것은 유형별 접근으로는 예외적이다. 이슬람 세계지도는 첫째, 웅대한 관점으로 그린 세계 전반에 대한 묘사다. 둘째, 중동지역이 세계의 중심을 이룬다. 셋째, 프톨레마이오스의 전통을 강하게 반영한다. 넷째, 무미건조한 구조는 종교적 영향과 더불어 수학의 영향을 받아서다.

“지도는 인류 문화 발전의 보고인 동시에 시대의 기록이자 증언이다.” 존 레니 쇼트가 말수를 아끼며 전달하는 지도와 지리학이 인류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측면은 놀랍다. 다른 분야로 응용된 지리학 용어가 좀 있다. 오리엔테이션과 레전드는 대표적 사례다.

“사실 ‘방위(Orientation)’라는 용어는 ‘동쪽’을 가리키는 라틴어 ‘oriens’에서 파생된 말이다. 즉, 초기 지도의 방위를 잡는다는 것은 동쪽을 위로 두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북쪽이 아닌, 남쪽을 지도의 위쪽에 둔 지도 역시 예전엔 흔했다. ‘범례(Legend)'란 “기호들의 의미를 설명하는 약어표 혹은 암호 해독 체계를 지칭”한다.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여덟 권짜리 『지리학 안내(Geographike hyphygesis)』는 『알마게스트(Almagest)』 『테트라비블로스(Tetrabiblos)』와 함께 ‘천동설’을 대표하는 고대 천문학자의 주저로 꼽힌다. 핼리혜성을 발견한 에드먼드 핼리는 지도제작자였다. 천체도가 지도의 한 종류라는 것을 고려하면, 지리 분야에서 천문학자의 활약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설혜심 교수(연세대 역사학)의 『지도 만드는 사람-근대 초 영국의 국토?역사?정체성』(길, 2007) 리뷰는 거두절미하지 않고 표지커버에 반영된 「책을 내면서」와 「맺음말」을 적극 수용키로 한다. 특정 지역이나 어느 고장을 상징하는 캐치프레이즈가 만들어진 과정에 대한 궁금증에서 이 책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교과서에선 “특정한 공간에 대한 개념, 혹은 이미지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것을 근거로 만들어졌는”지 거의 다루지 않는다. 영국사를 전공한 저자는 2002년부터 영국 르네상스 시대의 답사기들을 읽으면서 희미하게나마 그의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한다. 서양의 고대 역사서술 또한 동양의 그것 못잖게 박물지(博物誌), 본기, 열전 등의 다양한 형식을 취했다.

“하지만 중세부터 시간적 흐름에 따른 역사쓰기가 강조되면서 편년체 역사서술인 연대기(chronicle)나 국왕이나 기독교 성인들의 삶을 다룬 열전이 발달해간 반면, 지(志)의 분야는 일종의 배경 지식으로 폄하되었다. 르네상스 시기에 들어 과거 지의 큰 부분을 이루던 지지(地誌)를 중심으로 역사지지서(historical topographical writing)의 부흥이 일어났지만 곧 새로운 ‘과학적 역사’의 의해 역사학의 영역에서 밀려나게 된다.”

역사학에서 배제되고 지리학에서 소외된 역사지지 분야를 복원하려는 저자의 뜻은 “영국 사람들이 국토라는 공간에 역사를 접목해가며 정체성을 만들어간 내용을 살펴”보는 연구로 이어진다. “근대 초 영국에서 국토를 매개로 국가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룬 연구”의 결론 일부를 인용한다.

“지도는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경계가 분명한 ‘국가’라는 공간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심어주었다. 르네상스 이후 지도는 과학적인 시선이라는 포장 속에서 더 큰 권위를 발휘하게 되었다. 16세기에 발달하게 된 영국의 지도들은 브리튼 섬을 아름답고도 풍요로운 공간으로, 질서 정연하면서도 활기찬 생산의 터전으로 그려냈다.

나아가 지도는 영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계층별로 범주화하거나 부부의 모습으로 그려내어 이성애적이고도 가부장적인 사회 질서를 주입하기도 한다. 이렇게 관념화된 공간은 지리적이거나 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인 어떤 것이 되어 국토에 대한 정서적 감정이 배양될 수 있게 만든다. 아버지의 땅(fatherland)이나 모국(motherland)과 같은 명칭이 국토에 접목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도, 살아 있는 세상의 발견』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이를 보완하는 측면이 없지 않는 발 로스의 『지도를 만든 사람들-미지의 세계로 가는 길을 그리다』(홍영분 옮김, 아침이슬, 2007)는 저자의 이야기솜씨가 돋보인다. 지도에 얽힌 역사인물들이 살아 숨 쉬는 듯하다. 외국의 청소년도서상을 받은 이력에 값한다.

그래도 한두 가지 아쉬움은 있다. 옮긴이의 지적대로 이 책은 서구 중심의 세계관과 거리를 둔다. “항해왕 엔리케와 노예무역의 역사”를 거론한 것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으나, 포르투갈 왕가의 “엔리케 왕자는 ‘유럽 노예무역의 아버지’라는 악명을 결코 떨쳐 버릴 수 없다”는 표현은 와 닿지 않는다. ‘노예무역의 아버지’는 오명이기는커녕 ‘음악의 아버지’마저 불쾌히 여길 관대한 표현이다.

명나라 초기 남해 원정 대함대를 이끈 정화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가정은 무의미하다. “어쩌면 정화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원정에 나섰던 1405년에서 1433년까지의 시기에는 유럽 국가보다는 오히려 중국에 의해서 세계 지도가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황제들이 수차에 걸친 대규모 해양 원정을 통해 정화가 수집한 정보와 기술들을 제대로 활용했다면, 아마도 유럽인이 아니라 중국인이 세계를 정복하고 식민지를 지배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어가 아닌 중국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어 우리들은 영어 대신 중국어를 배우려고 머리를 싸매고 있을 것이다.”

이 책에도 등장하는 콜럼버스, 마젤란, 제임스 쿡 같은 지리상의 발견을 주도한 자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여부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패권주의 관점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옮긴이가 의역한 것으로 보이는 영어 혹은 중국어 세계 공용어론은 부적절하다. 발 로스는 캐나다의 방송인이자 자유기고가다. 캐나다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함께 쓰고 있는 나라다. 그 곳의 프랑스어 사용자가 영어를 구사하는데 큰 불편을 느끼나!

덧붙임- 이 글 제목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반성완 옮김, 심설당, 1985) 본문 첫 문장에서 따왔음. 원문은 이렇음.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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