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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세계를 설계한 최초의 작가

버디 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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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무 데나 갖다 붙여 쓰게 된 ‘혁신’이라는 단어의 고유한 의미를 실현한 로큰롤 스타가 있다면, 그는 버디 홀리다. 그를 단순히 초기 로큰롤 음악의 아이콘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 결론부터 말하건대 로큰롤 세계에서 그는 진정한 의미의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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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무 데나 갖다 붙여 쓰게 된 ‘혁신’이라는 단어의 고유한 의미를 실현한 로큰롤 스타가 있다면, 그는 버디 홀리다. 그를 단순히 초기 로큰롤 음악의 아이콘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 결론부터 말하건대 로큰롤 세계에서 그는 진정한 의미의 개척자였다.

로큰롤이 등장한 50년대 중반 미국은 인종 문제가 서서히 수면 위로 대두되기 시작하던 때다. 마틴 루터 킹이 주도한 흑백 격리 반대 데모가 한창이었고, 완강하던 남부의 학교들도 ‘브라운 판결’* 이후 흑인들에게 문을 열어주기 시작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인종의 격리가 붕괴되어 감에 따라 그 여파는 곧바로 음악계에 미쳤다. 무언가 ‘힙한 것’에 목말라 있던 백인 십 대들이 흑인음악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부모들은 ‘사악한 검둥이 음악’에 환장하는 자녀들을 걱정했다. 그 철딱서니 없는 아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 호황을 누리고 있던 미국에 새롭게 떠오른 소비층이었다.


전쟁통에 뼈 빠지는 고생을 했을 부모 세대와는 달리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비교적 손쉽게 용돈을 벌 수 있었고 모든 것을 처먹고 노는 데 소비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제임스 딘이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같은 외모를 꾸미는 데 열중했고 자신만의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전축을 가지고 있었으며, 최신형의 캐딜락에 열광했다. 이는 곧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받아들여졌고, 기성세대들은 우려 섞인 눈빛으로 이들을 주목하였다. 이른바 ‘틴에이저’.

몇몇 똘똘한 지방 라디오 DJ들은 인종에 구애받지 않고 틴에이저의 구미에 맞는 ‘힙한 음악’을 틀기 시작한다. 앨범 제작자들은 이내 흑인처럼 노래할 줄 아는 백인 가수를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의 첫 번째이자 최대의 수혜자는 다름 아닌 엘비스 프레슬리. 트럭 운전사 출신으로 한낮 시골뜨기에 불과한 놈팽이였지만 어려서부터 엄마 몰래(엘비스는 전형적인 마마보이였다고 함) 심야 라디오를 들으며 흑인음악 특유의 비트감과 폭발적인 창법을 몸으로 익혔고 주말 저녁엔 댄스홀을 누비며 쓸 만한 춤 실력까지 겸비하게 된 터였다. 백인과 흑인의 가장 핫한 부분만을 취한 듯한 퍼포먼스는 덤이고 눈부신 외모까지 더하였으니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바야흐로 로큰롤의 황금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사실 로큰롤 음악은 백인 음악과 흑인음악이 섹스를 해서 낳은 ‘잡종 음악’, 하이브리드라고 해야 맞다. 버디 홀리의 출신지인 남부 텍사스는 그런 의미에서 각 인종의 음악 본류가 만나는 요충지였다. 힐빌리나 블루 그래스 같은 백인 전통음악(컨트리 뮤직)의 산실임과 동시에 흑인의 노동요, 가스펠, 블루스의 고장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소질을 보이며 악기 다루기에도 남다른 애착이 있던 버디 홀리가 이와 같은 환경에서 여러 이질적인 요소를 모아 자기만의 아이덴티티로 확립시켰다는 것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버디 홀리는 수줍은 말라깽이였다. 다섯 살 무렵 동네 장기자랑 대회에 참가해 상금 5달러를 받은 이력 말고는 딱히 두각을 나타낸 일이 없었다. 그의 고교 시절 담임교사의 회고를 빌리자면 “너무나 조용하여 눈에 띄지 않았던” 그런 아이였다. 청소년기에 들어서 고교 동창과 블루 그래스 듀엣을 조직해 활동을 시작한 그는 당시 태동하고 있던 로큰롤 뮤직에 시선을 돌리게 된다. 그즈음 집 근처 극장에서 공연을 하던 엘비스의 무대를 직접 목도한 그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바로 저거다!” 버디 홀리는 로큰롤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에게는 눈부신 외모도, 쿨한 한량 기질도 없었지만 곡 쓰기와 악기 연주에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엘비스의 오프닝 무대를 시작으로 데카 레코드와 계약을 하고 곧바로 밴드 ‘the Crickets’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리드 기타, 리듬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의 라인업이었다. 이 같은 밴드의 구성은 지금으로선 심지어 로큰롤 밴드가 아니라고 해도 굳이 낯설 것이 없지만, ‘솔로 가수와 백밴드’라는 공식이 당연시 되던 당시의 백인 음악계에선 실로 파격적인 행각이었다. 1956년 버디 홀리 앤 더 크리켓츠는 백인 음악 사상 최초의 ‘그룹’으로서 음반을 녹음한다.

여기서 버디 홀리는 같은 로큰롤이지만 엘비스나 여타 로큰롤 가수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취했다. 당시 로큰롤을 규정짓던 스타일은 격하고 성적인 이미지로 한정되어 있었다. 퍼포먼스에 있어 흑인 특유의 성적 에너지를 그대로 구현해 낸 엘비스 (무대 위에서 그 특유의 허리 놀림은 성교 시의 ‘피스톤 운동’을 연상케 하였고 이에 ‘Elvis the pelvis’라는 칭호까지 얻게 된다. 56년 ‘에드 설리번 쇼’ 출연 당시 카메라는 그의 상반신 아래는 아예 비추지도 않았다고 한다), 제임스 딘과 말론 브란도의 와일드한 이미지에 착상을 얻은 에디 코크런과 진 빈센트는 아예 뒷골목 양아치를 자처(실생활에서도 소문난 망나니였던 그 둘은 절친한 친구 사이로 1960년 함께 타고 있던 차가 화물 트럭과 충돌하여 에디 코크런은 즉사하고 진 빈센트는 평생 불구가 되어버린다)한 사내들이었다.

그들 모두 포마드를 잔뜩 발라넘긴 ‘폼파도르 헤어’를 하고 다녔으며 흑인들 사이에서 유행이던 통이 큰 하이 웨이스트 슬랙스를 즐겨 입었다. 이 같은 와중에 버디 홀리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아이비리거들이나 사립학교 학생들이 입는 프레피 룩으로 차려입고 주로 달달한 사랑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이미지를 소년적인 감수성으로 귀결시키며 로큰롤의 난폭자들과는 차별성을 두었다.


그는 안경을 쓰고 무대에 오른 최초의 록 뮤지션이었다. 또한 전자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한 최초의 록 보컬리스트였다. 그는 처음으로 레코딩에 더블 트래킹(한꺼번에 모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녹음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친 다중 녹음, 오버 더빙을 말함)을 시도하였고, 로큰롤 앨범으로선 최초로 클래식 현악기를 도입했다.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단조로운 로큰롤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여러 가지 파격을 취했다. 컨트리의 말똥 냄새와 블루스의 무거움을 조금씩 걷어내고 반복적인 비트를 강조한다. 극히 심플한 악곡과 구성을 취하되 그 안에 백인 음악과 흑인음악의 여러 요소들이 성공적으로 융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재능이 그에게는 있었다.


보 디들리와 같은 흑인 뮤지션이 장기로 사용하던 ‘정글 비트’를 「Not Fade Away」 같은 곡에서 컨트리의 방법론으로 해석해 냈는가 하면 첫 번째 히트 넘버이자 전형적인 셔플 블루스 패턴의 「That'll Be the Day」 같은 곡에서도 당시의 천편일률적인 로큰롤 곡들과는 차별화된 하모니와 세련된 연주 패턴을 들을 수 있다. 버디 홀리는 척 베리와 함께 록 역사상 최초의 ‘작가’였다. 그의 이렇듯 작가주의적이며 혁신적인 면모는 향후 비틀즈와 같은 뮤지션들이 그들만의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하는 과정에 있어 크나큰 모범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수많은 기적을, 그것도 활동 기간 단 1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행하고 별안간 그는 불귀의 객이 되어버리고 만다. 1959년 2월 3일 비행기 추락사고……. 그가 고작 스물둘 되던 해의 일이다.

눈치챘겠지만 버디 홀리를 말하면서 처음이라는 단어를 유독 많이 썼다. 버디 홀리는 ‘최초’라는 수식어를 정말 많이 사용하게 되는 뮤지션이다. 그는 로큰롤의 태동기에 등장해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 향후 수십 년간의 음악 씬을 설계한 아티스트였다. 이후 록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60년대의 수많은 뮤지션들, 특히 비틀즈를 위시한 영국 밴드들의 음반과 그들에 관한 문헌에서 버디 홀리의 영향력을 감지하기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대중음악 전반에 걸쳐 그가 이룩한 모든 것들은 현재에 이르며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버디 홀리는 자신이 만든 곡으로 성공한 최초의 록 스타였다.


*브라운 판결: 미국 캔자스 주의 린다 브라운이라는 흑인 소녀가 집 가까운 곳의 초등학교에 가지 못하고 먼 곳의 흑인 학교까지 가야 하는 데 항의하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1951년에 시작된 이 소송은 1954년 3년 만에 마침내 브라운의 승소로 결론이 나며 인종차별 철폐 역사의 획기적인 획을 그었고 이후 벌어진 흑인 인권 운동에 불을 지폈다. 현재 미국 대부분의 법조인들이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판결의 하나로 꼽고 있는 사례이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차승우의 로큰롤 스타> 연재를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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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승우

밴드 문샤이너스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다. 초등학교 때 뱀이 그려진 전자 기타를 외할머니에게 선물로 받아 처음 기타를 잡았고, 고등학교 때 크라이베이비라는 밴드로 활동을 시작했다. 역시 고등학교 때 노브레인을 결성하여 2집까지 활동한 후 일본의 도쿄 스쿨 오브 뮤직으로 기타를 공부하러 갔다. 하이라이츠라는 밴드를 거쳐 문샤이너스를 결성했다. 최근에 문샤이너스 정규 1집인 <모험광백서>를 펴내고 열렬하게 활동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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