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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턴테이블이즘의 첫 등장 - 디제이 소울스케이프(DJ Soulscape) <180g Beats>(2000)

1990년대 중후반을 전후해 디제이들이 주연이 되는 힙합이 등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턴테이블리즘’입니다. 이 장르가 우리나라에서도 언더그라운드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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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나 영국의 대표적인 차트를 보면 힙합 음악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음을 실감하지만, 늘 거기서 거기인 엇비슷한 노래들뿐입니다. 많은 장르가 그렇듯이 힙합에도 다양한 하위 장르가 있는데 유독 클럽 음악만 사랑을 받으니 아쉬울 따름이에요. 컨셔스, 폴리티컬, 갱스터, 레프트필드 등등의 양식이 있지만, 대부분의 이런 힙합은 래퍼가 음악의 주인공인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 1990년대 중후반을 전후해 디제이들이 주연이 되는 힙합이 등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턴테이블리즘’입니다. 이 장르가 우리나라에서도 언더그라운드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한국 턴테이블리즘의 시초가 된 음반을 소개합니다.

디제이 소울스케이프(DJ Soulscape) <180g Beats> (2000)

디제이 소울스케이프(DJ Soulscape)의 데뷔 앨범은 우리나라에서 탄생한 음악으로는 최초로 ‘턴테이블리즘(turntablism)’이라는 장르를 확인하게 해준 작품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엠시(MC)만이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하는 랩 중심의 힙합 외에도 디제이가 중추가 되어 음악을 설계하고 때로는 게스트로 래퍼를 초빙해 자기 음악을 치장하게 하는 체제의 힙합이 존재함을 가까운 곳에서 일러줬다. 세션으로 스크래칭을 하거나 비트를 제공하는 차원에 머물렀던 디제이의 위치 상승을 보여주는 결실이자 ‘힙합 프로듀서’라는 용어를 일반 명사에 준하는 단어로 만든 시발이 되었다.

장르의 명칭마저도 완벽하게 정립되지 않았던 태동기에 힙합은 사실상 래퍼보다는 디제이가 진두지휘하는 유희의 문화였다. 한동네에 사는 흑인 주민들이 어우러져 음악과 춤을 즐기는 모임이 되었던 ‘블록 파티(block party)’는 프로든 아마추어든 간에 판을 트는 디제이들이 믹서와 턴테이블을 이용해 동일한 노래의 특정 부분을 반복하거나 다른 두 곡을 이어 붙이고 LP를 긁어 특이한 소리를 냄으로써 운집한 사람들에게 흥을 제공했고 그들이 춤추기에 좋은 비트를 전달했다. 이 당시만 해도 디제이가 곧 주인공이었으며 창조자이자 총감독이었다.

드럼을 위주로 한 악기 소리만 연방 나오는 디제잉에 심심함을 느낀 이들은 디제이들이 비트를 트는 중간 중간에 짤막하게 추임새를 넣거나 자메이카의 전통 축제에서 영향을 받은 탄성, 혹은 완결된 문장으로 억양이 확실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랩을 본격화시킨다. 이후 1970년대 후반에 와서 슈거 힐 갱(Sugar Hill Gang)의 「Rapper's delight」, 콜드 크러시 브라더스(Cold Crush Brothers)의 「Punk rock rap」, 커티스 블로우(Kurtis Blow)의 「The breaks」 같은 올드 스쿨 랩 음악의 인기로 디제이 중심에서 래퍼로 연행자의 주도권이 이동된다.

스포트라이트의 위치 변경이 영원을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래퍼들 뒤에 서서 비교적 관심을 받지 못한 디제이들은 단순히 음악을 트는 소극적 역할에서 벗어나 디제잉을 하나의 독립된 예술 장르로 성장시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비트를 연결하고 판을 앞뒤로 긁는 것은 비트 저글링(beat juggling)과 트랜스포밍(transforming), 플레어(flare) 등의 용어를 만들어내며 기예의 단계로 성장해 인비저블 스크래치 피클즈(Invisibl Skratch Piklz), 엑시큐셔너스(The X-Ecutioners) 등의 턴테이블 묘기 전문가 집단을 등장시켰고 몇몇은 기존에 있던 음악을 떼어내고, 조립하는 과정을 거쳐 전혀 새로운 곡을 만드는 비트메이커 혹은 전문 프로듀서로서 입지를 구축했다. 포괄적으로 힙합의 신종 형식인 턴테이블리즘의 탄생이었다.

본토인 미국과 힙합 음악을 빠르게 수입한 서구 나라에서는 일찍이 턴테이블리즘에 대한 연구와 시도가 활성화되었으나 우리나라는 그러지 못했다. 음악과 비(非) 음악을 가리지 않고 따온 샘플을 조합한 사운드로 전 세계 음악팬들을 경악케 한 턴테이블리즘의 표본 디제이 섀도우(DJ Shadow)의 <Endtroducing>은 그야말로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다. 국내에서는 1990년대 후반, 전문 댄서들로 이뤄진 몇몇 그룹이 인스트루멘틀 힙합, 브레이크비트를 담은 앨범을 낸 적이 있으나 기존에 프로그래밍된 드럼 루프를 확장하고 나열함에 지나지 않았다. 디제이의 창조성과 재기를 확인할 수 있는 턴테이블리즘이라는 명칭에 맞는 작품은 없었다.

2000년에 출시된 소울스케이프의 데뷔 앨범 <180g Beats>는 이를 충족하는 첫 작품이었다.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는 생경한 사운드 콜라주라든가 균일함에서 이탈한 비트의 실험적 변주, 감탄을 금치 못할 스크래칭 묘기는 없더라도 그가 음반, 영상물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발굴, 채집한 소리들은 멋진 리듬과 선율의 음악으로 재탄생되었다.

마치 음악 수업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제공하는 「음악 시간」은 ‘음악이란 사람의 열정과 사상을 나타내는 시간적 예술이라고 하죠 / 자, 그러면 시작하겠어요 잘 들으세요.’라며 선생님이 직접 앞에서 이야기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며 듣는 이를 집중시킨다.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의 메인 테마로 사용되어도 손색없을 웅장함이 엿보이는 음원으로 생동감을 안기는 「Morning」, 샘플을 주재료로 달콤한 펑크(funk)를 주조해 낸 「Candy funk」, 20세기 초중반의 고전 재즈가 연상되는 「Summer 2002」 등은 여러 개의 음원을 이어 붙여 전혀 새로운 곡을 만들어 내는 소울스케이프의 명민한 주조 감각이 나타나는 작품들이다. 「보통 빠르기 / 느리게」에서 스크래칭으로 모데라토와 안단테를 설명하는 센스는 청취자들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한편으로는 랩을 위한 힙합 반주를 만들어 비트메이커로서의 역할도 이행함을 확인할 수 있다. 가리온의 엠시 메타(MC Meta)가 참여한 「浮草 (80일간 세계 일주 외전)」는 블루스 록의 기타 리프를 이용해 1990년대 중반까지 인기를 누렸던 힙합 스타일을 재현하며 리오케이코아(Leo K'Koa)의 자전적 이야기로 꾸며진 「Story」와 대팔이 목소리를 제공하는 「선인장」은 재즈 힙합의 향을 한가득 퍼뜨린다. 샘플링이라는 힙합 음악 제작의 정공법으로 다채로운 틀을 완성하는 비트 공인(工人) 혹은, 프로듀서의 능력이 발휘되는 부분이다.

<180g Beats>는 소울, 펑크(funk), 재즈 등에서 따 온 음원 덕분에 마니아 외에 일반 음악팬들도 가볍게 감상이 가능한 라운지 음악의 요소도 품고 있는 것이 매력이었다. 첫 앨범의 이러한 성향은 두 번째 음반 <Lovers:>의 한층 맑아지고 정제된 사운드로 이어졌다. 이는 2007년, 일정한 라디오 시그널, 광고 배경음악 등 일정한 활용 목적을 가진 ‘라이브러리 레코드’라는 모토를 내세운 3집 <창작과 비트 Vol. 1: Patterns For Words>로 한 차례 더 연결됐다. 흑인 음악을 근간에 두지만, 다수 청취자가 편안하게 접할 수 있도록 색을 조금 연하게 만들기가 총명한 프로듀서의 지분 확장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소울스케이프의 이 앨범이 세상 빛을 본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프로듀서 중심의 힙합, 턴테이블리즘 작품이 증가세를 보였다. 그와 함께 소울 체임버(Soul Chamber)라는 그룹으로 활동했던 페니(Pe2ny)가 2002년에는 래퍼 직함을 버리고 <Journey Into Urban City>라는 인스트루멘틀 앨범을 냈으며, 지금까지 언더그라운드 신의 걸출한 음악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울스케이프의 행보는 콰이엇(The Quiett), 디제이 손(DJ Son), 랍티미스트(Loptimist), 지케이 후니지(GK Huni'G), 디제이 웨건(DJ Wegun) 같은 전문 디제이, 프로듀서들의 활동에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었다.

글 / 한동윤 (bionicsoul@naver.com)


제공: IZM
(www.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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