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흔든 향기로운 울림의 시작 - 신승훈 <미소 속에 비친 그대>
신승훈은 여운을 남기는 애절한 멜로디 그리고 시대와 남녀노소의 장벽을 뛰어넘는 보편적 화두인 사랑을 가사에 담아 음악을 풀어냈다.
발라드 기근 현상이 죽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중음악의 주 소비층인 10대와 20대 초반들을 겨냥한 댄스음악이 초강세를 보이는 게 큰 이유가 될 듯합니다. 과거 랩 댄스가 급부상하던 시절에도 감성을 촉촉이 적시는 발라드 음악이 많은 이에게 인기를 얻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요즘에는 전혀 그러지 못하네요. 그래서인지 그 시기에 발라드 열풍을 주도했던 신승훈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랑」 「그 후로 오랫동안」 「널 사랑하니까」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같은 노래로 ‘발라드의 황제’라는 칭호를 받은 그의 노래가 더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신승훈 <미소 속에 비친 그대>(1990)
시장의 몸집 측면에서 한국 음악계의 전성기라고 할 1990년대. 그곳에는 랩, 레게, 힙합과 같은 흑인음악 그리고 음악 청취자들이 좀더 경험을 많이 한 발라드가 커다란 위치를 차지했다. 특히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이후의 음악 시장은 랩 댄스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랩 댄스를 중심으로 한 그룹을 형성하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아직 일상화되지 못한 이 생경한 음악은 단순히 서태지와 듀스를 흉내 내기에 급급한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져온, 한국인들의 감성에 늘 흐르고 있는 ‘스토리텔링 송’ 즉 발라드에 대한 애착은 새로운 기류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 중심에 신승훈이 있었다. 어쩌면 1990년대에 발라드는 신승훈이란 재목이 있어 장르의 중력을 유지했는지도 모른다.
신승훈은 여운을 남기는 애절한 멜로디 그리고 시대와 남녀노소의 장벽을 뛰어넘는 보편적 화두인 사랑을 가사에 담아 음악을 풀어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귀를 홀리는 그의 미성은 다른 장르의 음악과 차별화되어 넓은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는 큰 무기로 작용하였다.
그는 대학 시절까지 상당 부분을 보낸 대전 지역에서 통기타 가수로 활동하며 음악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가 된 것은 이 시절의 경험이 뒷받침된 결과다. 그는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꺾임과 떨림 그리고 견고한 성량으로 등장하자마자 센세이션에 가까운 호응을 창출했다. 데뷔 때의 그를 보고 가왕 조용필은 그에게 “나를 라이벌로 삼고 음악을 하라.”는 다소 엄포와도 같은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이수만과 박진영이 음반 제작에 참여하기 이전, 박미경, 김건모 등을 발굴해 음반 업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프로듀서 김창환과 함께 그는 <미소 속에 비친 그대>로 1990년 데뷔한다. 앳되고 어딘가 어수룩해 보이는 외모의 이 신인은 노래뿐 아니라 작사, 작곡 능력까지 갖춘 싱어송라이터로 더욱 주목을 받는다. 커다란 안경과 다소 어색한 차림의 뒤에는 혼자서 곡을 다 주조해내는 재능이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던 것이다.
1990년 11월에 선보인 처녀작에서는 앨범 동명의 곡인 「미소 속에 비친 그대」와 「오늘 같은 이런 창밖이 좋아」 등이 주목받으면서 그는 단숨에 발라드 장르의 신성(新星)으로 솟아올랐다. 「미소 속에 비친 그대」가 없었더라면 1991년 ‘그리움 때문일 거야…….’하는 처연한 후렴 부분으로 전 국민을 포획한 「보이지 않는 사랑」의 선풍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대중과도 호흡할 수 있는 어법으로 변형시킨 점이 이 앨범의 진면목이다. 첫 앨범에 통상적인 촌스러움보다는 풋풋한 사운드를 분출하는 데 성공한 노래들은 우리의 귀에 잘 맞았다. 이는 감수성을 터치하는 사랑에 대한 그의 감상(感傷)이 이미 개인의 수준을 벗어나 있음을 입증한다. 신승훈이 담아낸 사랑에 대한 순수는 우리의 보편적 감성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랑은 그댈 위한 나의 마음 그리고 그대의 미소 내가 아는 이별은 슬픔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너무나 슬퍼 나는 울고 싶지 않아 다시 웃고 싶어졌지 그런 미소 속에 비친 그대 모습 보면서…….’
사랑에 대한 기억과 아픔이 곡의 전체를 지배한다. 간접적인 가사 내용은 저마다의 기억은 다르되 생각만 해도 아련한 사랑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공통적인 감성을 담고 있다. 그의 음악은 잘 쓰인 한 편의 수필과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을 듣는 동시에 편지를 읽는 것 같다. 일렉트릭 기타가 사용되지만 멜로디를 위주로 한 작법과 건반이 주도하는 가운데 잔잔한 리듬이 깔리는 발라드의 가장 일반적인 패턴으로 전개된다.
신승훈은 비록 현재 급변하는 음악 시장의 분위기에서 이전만큼 최고의 위치에 놓여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저 그런 음악을 하는 다른 가수들과는 구분되는 명실 공히 한국 대중음악의 거성임에는 틀림이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때로는 지금 10대 또는 20대 초반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분명히 각인되지 않은, 다소 오래된 가수로 인식되는 부분도 있지만 거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강건하게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여전히 신조류와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파워풀한 무게감을 유지하고 있다.
아름다운 뮤지션, 신승훈이다. 어느덧 20년에 가까운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처연함을 잃지 않는 명품 목소리와 함께 퍼져 나오는 향기로운 울림은 여전하다. 발라드를 선호하는 인구의 가슴을 흔든 그 울림이 이 앨범과 함께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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