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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가·책 읽는 사람·탐서가

마이클 더다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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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북』은 ‘젊은 독서가의 초상’이다. 마이클 더다는 독서가다. 어떤 수식어도 불필요한 알짜다.

내 아버지는 팔순을 바라보신다. 고백할 게 있다. 내가 개성적인 출판평론가로 활동하는 것은 다 우리 아버지 덕분이다. 나는 1970년대의 어린이잡지가 나를 만들었다고 두어 번 얘기한 바 있다. 아버지는 형들에게 1970년 전후의 <소년중앙>과 <소년세계>를, 내게는 1970년대 중반 창간된 <소년생활>을 꾸준히 사주셨다.

아버지와의 추억이랄까. 아버지는 취학 전의 막내아들을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셨다. 부평역 옆에 있던 대한극장은 꽤 자주 갔다. 어떤 영화들을 봤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흐뭇한 부자 동반관람이었다. 또 그 무렵, 나는 월미도 유원지에서 사이다를 시음한다. 이 ‘독한’ 청량음료 한 모금은 내 코를 통해 곧바로 배출되었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아버지와 함께 송림동 고모네를 방문했다. 그때만 해도 인천의 구 도심지는 부평과 거리감이 있었다. 경인 국도 부평삼거리-간석오거리 구간은 산길 2차선 도로였다. 전철이 다니기 전, 경인선 철도의 열차 배차 간격은 길었고 부평역과 동인천역 사이에는 동암역, 주안역, 제물포역, 이렇게 역이 세 곳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철강 노동자로서 집안이 문화적인 분위기였다고는 볼 수 없었으나 소년 더다는 어린 시절부터 홀로 독서에 열중, 조숙함을 드러내며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독서가 마이클 더다(Michael Dirda, 1948- )의 『오픈 북』(이종인 옮김, 을유문화사, 2007) 한국어판 앞표지 날개의 저자 소개글 일부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물론 더다는 그가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과 같은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누린 풍부한 문화자본은 그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하지만 미 오하이오 주 로레인의 빈민촌에 위치한 비좁은 집에 지적인 분위기는 넘쳐흐르지 않았을지언정 지적인 것을 배척하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내게 책읽기를 감각적 황홀로 만들어 주었다. 내가 책을 펼칠 때마다 글이 주는 즐거움을 깨닫게 해 준 것이다. 반면 나의 아버지는 말의 아름다움과 환기력(換氣力)에 눈뜨게 해 주었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몇 년 뒤 아들의 책벌레 근성에 질색을 하게 되지만 어린 자식을 공립도서관으로 이끌었다. 더다가 ‘까칠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부분은 가슴 찡하게 다가온다(217~218쪽).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사우스 로레인의 펄 가에 있는 자그마한 도서관을 자주 방문했다.” 그런데 그 도서관의 ‘상태’는 별로였다. “단 하나뿐인 열람실은 비좁은 데다 책상, 테이블, 선반 등이 들어차 있어서 갑갑했다. 밝은 형광등이 번쩍거리는 오늘날의 멀티미디어 도서관에 비하면 그곳은 도서관이라기보다 차라리 헌책방에 가까웠다.”

아메리칸 드림에는 이처럼 도서관이 개입한다. 하면, 코리언 드림은? 내 어릴 적 도서관은 매우 희귀한 존재였다. 군에 다녀와 좀 있으니 집에서 5분 거리에 도서관이 들어섰다. 인천북구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이 한 20년 전에 만들어졌다면 내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백운역 인근의 인천부평도서관은 내가 중학생 때 생겼다. 나는 이제껏 부평도서관은 가본 일이 없다. 도서관은 역시 접근성이 중요하다.

『오픈 북』은 ‘젊은 독서가의 초상’이다. 마이클 더다는 독서가다. 어떤 수식어도 불필요한 알짜다. 이 책은 독서자서전이다. “나는 이 책에서 많은 책들을 언급했으나 내용에 대해서는 서너 줄을 넘기지 않도록 애썼다.” 책 얘기만 읊어서는 재미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의’ 독서가는 너무나 잘 안다. 그래도 책과 관련된 사연이 압도적이다.

책 내용 언급을 자제하는 것은 장단점이 있다. 유년기의 일상 묘사는 나름대로 흥미롭다. 하지만 이성(異性)이 전면에 등장하는 고교 시절과 대학생 때의 일부 대목은 흥미가 떨어진다. 좀 진부해보여서 말이다. 책 읽는 재미에 일찍 눈뜬 조숙함을 빼면, 마이클 더다의 성장 과정은 동년배 미국인과 그리 다를 게 없다. 그는 아주 정상적으로 자랐다.

“넌 플라스틱 비행기도 변변히 조립하지 못하잖니.” 마이클 더다는 아버지로부터 이런 핀잔을 들었지만 나는 프라모델 조립 그런대로 꽤 잘했다. 책과 독서에 관한 것은 나하고 비슷한 점이 많다. 그가 살짝 내비친 그의 독서론은 크게 공감한다.

“뒤마의 소설들은 축약본으로 읽었는데 『몽테 크리스토 백작』의 경우, 축약본이 오히려 스토리의 객관적 교훈과 신비한 호소력을 더욱 높여주었다.” 나도 그렇다. 나의 『몽테 크리스토 백작』은 제목마저 축약했다. 허름한 양장본이지만 빨간 겉표지를 두른 『암굴왕』은 흥미 만점이었다.

그는 속독 능력을 겸비한 “천천히 읽는 지구적인 독자”다. “독서의 즐거움은 속도가 아니라 독자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이야기꾼의 목소리이다. 저자의 문장을 꼼꼼하게 들어 주고 또 그 뉘앙스를 음미하면서 그 멋진 분위기를 칭송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늘 천천히 읽는다. 이틀에 『오픈 북』을 읽었다. 야금야금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데 너무 빨리 읽은 건 아닌지.

읽은 것의 기억은 편차가 심하다. “어린 시절의 독서는 거의 성스러운 위력을 발휘한다. 나는 이런 소설들과 그 밖의 ‘쓸모없는’ 소설들의 플롯도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가령 「타잔과 황금의 도시」는 그레이스트로크 경이 거의 확실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반면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은 하나도 기억 못한다.

“나의 목적은 뭔가 새로운 것을 기여하는 데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를 소개하거나, 잘 알려진 작가일 경우 그의 작품이나 경력의 생소한 부분을 소개하는 것이다.”(에드먼드 윌슨) 마이클 더다는 에드먼드 윌슨을 인용하면서 “상아탑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정직한 르포르타주를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 역까지』(1940)의 몇몇 장들, 특히 「칼 마르크스 책상에서 죽다」 같은 것은 투르게네프나 헨리 제임스의 중편 소설처럼 리듬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선 입학연도가 아니라 졸업연도를 학번으로 친다.

“이 책은 미국 <워싱턴 포스트 북 월드> 편집 기자이자 문학평론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받은 마이클 더다가 자신이 평생 읽어 온 책 중에서 일반 독자에게 덜 알려져 있으나, 고전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90여 작품을 골라 해설한 책이다.”(‘옮긴이의 말’)

마이클 더다는 고전이 재미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고전은 순전히 교육적인 측면이 강하여 고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세대 아니 수세기에 걸쳐 사람들이 그 책들을 읽을 만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고전이 된 것이다.”

고전이 재미가 있고 없는지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마이클 더다의 고전 읽기의 즐거움』(이종인 옮김, 을유문화사, 2009)은 지금껏 내가 접한 ‘책에 관한 책’ 가운데 제일 뛰어나다. 이제까지는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 시키기』와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를 높이 쳤다.

하지만 두 권 모두 저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개별 꼭지마다 빠짐없이 서너 개의 밑줄을 그을 정도는 아니었다. 또한 나는 ‘책 읽는 사람’이라고 나댄 적도 없는 데다 ‘탐서가’는 더욱 아니어서 같은 해(2001) 번역된 두 권은 내 취향에 맞지 않았다. “위대한 스토리를 전하고 있”는 “이 책에 소개된 작품들은” 우리에게 좀 낯설다.

길거리의 현자와 관련된 일화에 비유하자면 ‘햇빛을 가리니 춥소’보다는 “거지가 양 손바닥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것을 보고서 이 철학자는 자신의 컵을 내던져 버렸다”에 가깝다. 낯이 설기는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대략 1865년에서 1935년까지 70년 동안” “영문학에서 이야기가 활짝 개화”하는데 기여한 영어권 작가가 이리 많을 줄이야!

마이클 더다가 즐겁게 읽은 고전이 2선, 3선에 있는 고전인 것도 우리의 생소함을 가중한다. 그는 열두세 살 소년이었을 적에 우연히 습득한 클리프턴 패디먼의 『평생 독서 계획』 수정 4판(1997)인 “패디먼-메이저 개정판에 들어 있는 133명의 작가들은 대부분 의도적으로 제외했다.” 클리프턴 패디먼은 앤 패디먼의 아버지다.

“세상의 정평 있는 걸작들을 이처럼 건너뛰는데 어떤 이득이 있겠는가?” 그는 아주 많다고 본다. “『고전 읽기의 즐거움』은 패디먼과 (존 S.) 메이저가 다루지 않은 작가들만 다루고 있는데, 대중적 상상력에 호소하는 중요한 작가들이고 또 더러는 좀 더 알려질 필요가 있는 군소 작가이기도 하다.”

마이클 더다는 한마디로 ‘책 도사’다. 그는 엄청나게 읽었다. 한 줄 혹은 제목만 나오는 책까지 합쳐 『고전 읽기의 즐거움』에 등장하는 책은 몇 백 권이나 된다. 모름지기 그가 거론한 책을 전부 독파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그런 척을 하거나 젠체하지 않는다. “마이클 더다는 미국에서 책을 가장 잘 읽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독자에게 뽐내는 법이 없다.”(마이클 킨슬리)

그는 마치 책을 꿰뚫어보는 듯하다. 책들의 연관성에 대해 매우 밝다. 예컨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오스카 “와일드는 그 책의 제목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의 묘사-‘플롯이 없고, 등장인물이 한 명인 소설’-를 볼 때 도리언 그레이가 데카당스의 공인된 바이블인 J.K. 위스망스의 『거꾸로』를 발견한 것이 틀림없다.”

책을 소개하는 글의 첫째 목적은 그 책을 읽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전 읽기의 즐거움』은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다. 나는 책을 읽는 도중,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와 맥스 비어봄의 소품을 주문했다. 맥스 비어봄(1872-1956)의 동화 『행복한 위선자』(류건 옮김, 바람출판사, 2007)는 짐 캐리의 <마스크>와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를 섞은 듯하다.

하지만 마이클 더다가 권하는 공포물 몇 편과 시집 몇 권, 그리고 러디어드 키플링을 읽을 생각은 아직 없다. 내게는 “더다, 자네는 『킴』을 꼭 읽어 봐야 해. 아주 좋아”라고 말하는 동료가 없거니와 내 뇌리에는 “키플링이 유행 지나간 2류 작가일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자, 성차별 주의자, 인종차별 주의자”로 각인된 탓이다.

『고전 읽기의 즐거움』은 “좋은 독서로” 우리를 이끄는 뛰어난 길라잡이다. 그러면서 그 자체로 풍부한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훌륭한 책들에게 보낸 연애편지 모음집”이다. 참으로 대단한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마이클 더다, 그가 바로 ‘책 읽는 사람’이다, ‘탐서가’다.

(『고전 읽기의 즐거움』 부분은 <기획회의>(통권 244호, 2009년 3월 20일자)에 실린 필자의 리뷰를 축약하고 일부 내용을 덧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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